[윤중강의 뮤지컬레터]여성국극 ‘햇님과 달님’(1949)의 원우전 님께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여성국극 ‘햇님과 달님’(1949)의 원우전 님께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8.08.3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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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돌아가신 당신께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과 관련해서, 살아있는 분들이 잘못 있는 걸 바로잡기 위한 쓰는 글입니다. 두 가지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1903년생이 아닙니다. 당신은 인천출생이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계셨다면 바로 잡아주셨겠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이렇게 제가 대신을 합니다.

선생님은 요즘 대한민국 무대미술의 역사를 얘기할 때, 늘 처음으로 거론됩니다.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자료에서 출생을 1903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어떤 한 사람이 추측해서 올린 걸, 뒤의 사람들이 계속 받아 옮겼기 때문입니다. 여러 자료 등을 두루 자세히 안 본 탓입니다.

편지에서 저도 원우전(元雨田)이라고 하고 있지만, 선생님께선 정확히 ‘우전(雨田) 원세하(元世夏)’라고 바로 잡아주길 바라실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1895년 12월 17일에 태어났고, 1970년 10월 1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인천지역의 문화발전에도 기여했지만, 원래 서울출생이지요. 1966년 4월 15일 오후 5시. 당신은 제 4회 한국연극상을 수상했을 때, 그 때의 당신은 모습을 그려봅니다. “서구 신연극을 도입한 개화기부터 우리나라의 무대미술을 개척한 분이며, 칠십평생을 한결같이 같은 일에 바쳤다” 한국연극상을 받을 때의 자료에, 당신의 생년월일과 출생지역이 정확히 나와 있지요.

당신과 연관되어서, 나를 설레게 하는 말은 “토월회의 혁신적인 무대장치”입니다. 무대미술이란 개념이 제대로 정착하지 않았을 때, 당신은 언제나 그 상황과 여건에 맞게 무대를 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조명이 꺼진 몇 초 사이에 변한 무대에, 관객들은 환호성을 보냈다고 하지요.

선생님은 인천과도 인연이 깊어선지, 인천출생의 저는 더욱더 선생님을 종종 그립니다. 연극단체 ‘토월회’ 해산 후, 당신은 연극적 동지들과 함께 인천에서 새로운 둥지를 튼 것 같습니다. ‘애관’에서 당신의 무대를 본 사람들의 모습과, 당신에 의해서 새롭게 바뀌었다는 ‘싸리재’의 간판을 상상해봅니다. 요즘말로 하면, 당신은 ‘공공미술’과 ‘생활미술’에 일찍이 관심을 둔 개척자라 할 수 있겠죠.

저는 국악계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국악공연’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당신의 무대미술이 국악공연의 변화에 초석이 되었으니까요. ‘조선윰률협회’ 창립공연에서 무대를 맡은 분이 원우전이죠. 조선음률협회는 ‘조선성악연구회’로 연결되는 단체입니다. 1930년 11월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서 조선극장(인사동)에서 창립공연이 성대히 벌어졌습니다. 이것과 관련된 기사에서도, 특히 원우전과 무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무대의 효과를 위하야 무대장치계의 하나로 꼽히는 원우전씨가 각 연주악곡에 적응한 배경과 배광(背光) 등 새로운 시험을 하게 되어 다만 음악뿐만이 아니고, 광(光)과 색(色)이 일치하여 찬란한 예술의 도취경을 이룰 터”라는 기사 내용입니다. (1930. 11. 16. 동아일보)

일류국창들이 출연하는 조선음률협회 창립공연에서, 당신은 무대뿐만 아니라 조명까지도 함께 담당한 것 같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무대미술’과 ‘조명디자인’을 모두 겸한 ‘기술감독’으로서의 역할을 하신 셈이지요. 그리고 ‘판소리’를 공연할 때, 그 사설의 내용과 분위기에 따라서 무대와 조명에 변화를 준 것이지요.

비슷한 시기에 공연한, 홍해성 연출과 원우전 미술감독이 짝을 이룬 체홉의 ‘벛꽃동산’은 어떻습니까? 이 작품은 꽤 호평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 배경이라든지 연기에 있어서 매우 능한하여 실로 아무런 ’핸디캡‘을 주지 않고도 칭찬할만한 것이었음”이란 공연평이 전해집니다.

지난 1968년, ‘경향신문’에선 “신극 60년의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근대 공연을 관련자의 대담과 함께 회고하면서 정리한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창극’관련 해선 게스트가 김연수(판소리 인간문화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악연구회 때부터는 정식으로 무대장치를 갖췄고, 의상도 제대로 입었으며, 하나의 완전한 연극을 했죠. 무대장치는 주로 원우전씨가 맡았습니다.” (1968. 10. 26. 경향신문)

해방이후, 당신의 국악공연과 관련한 활동을 앞으로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광복과 함께, 당시 전통예술(구파)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국악원’을 조직했지요. 이 ‘국악원’은 훗날에 만들어진 ‘국립국악원’과는 다르고, 나중에 ‘대한국악원’이라고 한 조직입니다. 여기서 해방이후 전통예술과 관련해서 최초이자 최고의 공연을 펼치게 되는데, 바로 ‘대춘향전’입니다. 여기서의 무대미술도 ‘원우전’입니다.

당신은 더욱더 생생히 기억할 겁니다. 우리나라 공연예술사에 ‘여성국극의 시대’가 있었지요. 여성국극의 시작을 알린 여성국극동지회의 ‘옥중화’(1948)에 이어서, 그 다음해에 공연한 ‘햇님과 달님’(훗날 ‘해님달님’)이 크게 성공을 했는데, 여기서의 무대미술도 원우전이었습니다. 여성국극은 소리(노래)이상으로 무대와 의상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공연으로 유명하지요. 여성국극과 관련해서도, 당신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인물입니다.

당신과 관련해서 ‘연극’분야에서 이미 많이 언급하고 있고, ‘창극’(국극)과 관련해서 이렇게 관심을 두고 있는데, 앞으로 ‘영화’와 관련해서도 이야기되길 희망합니다. 1930년대 후반, 당신은 조선영화 심청전(1937) 도성록(1938) 어화(1939) 애련송(1939)의 영화미술을 담당했습니다.

영화 ‘심청전’을 시사회를 보고 평한 글(서광제)은 매우 혹평인데, 거기서 “심청이의 실 감는 물레가 슬쩍 변하여 배의 돛 감는 것이 스르르 돌리는 것은 감독의 테크닉으로 잘 되었다”는 호평이 주목이 됩니다. 이건 제 생각으로는 감독뿐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미술적 안목’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조선영화 ‘심청전’ 중에서 ‘행선전야(行船前夜)’의 일부 필름이 남아있는데, 이 장면에서도 ‘판소리’와 함께 카메라로 돌아가면서 보이는 미장센에 대한 언급이 있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서 ‘원우전’의 ‘미술’에 관해서 더 깊이 알게 될 겁니다.

당신에 관해선 몇몇 논문도 나오기 시작했지요. 이제 여러 분야에서 원우전의 미술에 관심을 두면서, 우리나라 초창기 무대공연이 당신과 같은 분들에 의해서 어떻게 변화 발전되었는지 더욱더 소상하게 알려지길 바랍니다. 당신에겐 ‘다다를 수 없는’ 이 편지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다다르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