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들의 미美뇌腦창創 칼럼 4] 예술과 중용은 친구일까 적일까
[고리들의 미美뇌腦창創 칼럼 4] 예술과 중용은 친구일까 적일까
  • 고리들 화가/ <두뇌사용설명서>저자
  • 승인 2018.08.3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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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사용설명서> 저자 고리들 씀
▲ 고리들 화가/미래학자.<두뇌사용설명서>저자.

최근 중용을 재해석하는 책을 쓰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군자에 들어가는지 소인에 들어가는지 예술이 중용의 수단인지 중용이 예술의 수단인지 사색 중이다. 우선 예술가는 예술적 천명을 타고났을 것이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이후 자기 예술성을 잘 다듬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를 하지만 그 다음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에서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다. 교육을 받는 것이 예술에 더 나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화법을 따라가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화가가 너무나 많다. 타고난 천명(nature)과 길러지는 솔성(nurture)을 다듬기 위해서는 역시 ‘박학심문博學審問신사명변독행愼思明辯篤行’이 적당하다.

요즘처럼 예술에서 기법보다 컨셉과 스토리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는 널리 배우고 깊게 질문하고 생각하고 판별하고 독실하게 행동해보는 것 모두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인터뷰를 통한 명변明辯은 매우 중요하다. 독행에서는 특히 두껍게 물감을 손으로 바르는 화가들이 생각난다. 독실하다의 독篤은 왜 도탑거나 두터울 독일까? 중용이라는 고전이 예술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독행보다는 박행을 하는 예술가들이 더 많다고 느낀다. 얇은 박행은 팝아트나 미디어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시간은 성실하지만 결과는 확률이 낮은 희박稀薄한 컨셉이 중요하다. 결과적 인상은 드물지만 널리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스토리가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덕체가 체덕지體德智로 순서가 바뀌는 것이 유리하다. 몸으로 실행하다보면 몸 안에 있는 카오스가 발동하여 희박한 결과가 가끔 나오기 때문이다.

예술을 하다 보니 중용에서 군자들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대표적 2가지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공자 왈 소인들이 즐긴다는 무기탄無忌憚과 색은행괴素隱行怪이다. 하얀 캔버스를 펼치고 창의성이 중요한 순간 화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탄없는 표현이 아닌가? 다른 작가와 다른 결과를 위해 은밀하고 특이한 형상을 찾는 색은행괴가 필요하지 않는가?

2024년으로 예측되고 있는 AGI의 등장과 함께 생기는 인문학적 위기와 문제의 문구는 군자시중君子時中과 소인무기탄小人無忌憚이다. 무슨 일이든지 가장 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일이 인공지능에게 넘어가고 있으며 인간들에게는 무기탄이 남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더 즐기고 더 창의적 활동을 하면서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몇 대 없는 슈퍼컴퓨터는 기상청에서 우리 일상의 시중時中을 도와주고 있다. 국내 여러 병원에서 활동하는 IBM의 인공지능 ‘왓슨’은 암치료의 절차와 타이밍을 도와주고 있다. 인공지능 심리상담은 인간들의 노력보다 만족도가 좋으며 인공지능 스피커의 눈높이 대화는 아이들이 엄마보다 스피커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있다. 거의 모든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인공지능은 인간들의 이성적 판단과 시중과 감정적 절도를 이미 능가했다.

몇몇 병원의 풍경은 성인군자가 된 AI에게 평범한 소인 의사들이 자문을 구하는 지경이다. 필자는 중용을 재해석하면서 피할 수 없이 무례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해야만 한다. “과연 동양고전에서 제시한 성인군자의 기준이 인간적이라고 보는가?”이다.

감정의 미발未發과 겸손이 군자의 것이라면 예술가에게는 감정의 거침없는 표현과 자랑이 필요하다. 그럼 예술가는 공자의 눈에는 소인일 것이다. 그렇다. 즐거운 소인 웃는 소인이면 족하다. 인간은 도덕적 로봇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인간들은 모두 예술을 즐기는 소인이 되어갈 것이다.

공자는 색은행괴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군자지도가 비이은費而隱(넓고 깊다)이라고 했다. 즉 깊고 은미한 것을 찾지 않지만 도는 은미한 곳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두 문장은 모순이 된다. 물론 전자의 은隱은 부정적인 것 후자는 긍정적인 것일 게다. 하지만 원래 은미한 것들을 어떻게 긍정성과 부정성 구분을 하랴. 이후 도를 지속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노력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본다. 도는 넓어서 누구나 행할 수 있지만 그 깊이로는 성인도 지킬 수 없다는 비이은費而隱에 대한 해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군자가 거대한 말을 하면 천하가 다 담을 수 없고 작고 섬세한 말을 하면 천하가 더 쪼갤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장은 도道의 비이은費而隱에서 비費의 극대함과 은隱의 극미함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더 뒤에는 어약우연魚躍於淵이 나온다. 물고기나 고래가 수면을 돌파하여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다가 다시 물로 다이빙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이 말은 현세의 가치관과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다른 차원을 즐기는 장면이다. 마지막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보이는 도가 점차 커지면 결국 천하를 모두 비춘다는 결론이다.

화가는 무기탄無忌憚으로 시작하여 색은행괴素隱行怪를 하다가 어약우연魚躍於淵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중용을 지켜 함부로 나대지 말다가는 물고기가 수면을 벗어나는 비약과 도약을 즐기기 어렵다. 공자가 중용을 지키라는 말을 하던 시대는 그만큼 혼란과 모순이 많았다. 필부와 학자들 간의 지식의 차이도 너무나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핵무기의 위협과 기상이변과 환경재앙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다른 부분들은 그동안 어약우연과 색은행괴를 끊임없이 해온 인류들에 의해서 세상은 밝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