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신무용가 조택원의 행적을 찾아서(3) ‘기메뮤제’와 신무용가 조택원
[성기숙의 문화읽기]신무용가 조택원의 행적을 찾아서(3) ‘기메뮤제’와 신무용가 조택원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9.1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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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무용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은 있는 법. 조택원에게 있어 1938년 3월 10일은 기념비적인 날로 기록된다. 파리 ‘뮤제 기메’(Muse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이하 기메박물관)에서 첫 데뷔무대를 치렀기 때문이다. ‘승무의 인상’을 비롯 ‘작렬’, ‘포엠’ 등 10여 편의 작품이 선보였다. 서양 모던댄스와 조선의 전통춤으로 구성된 소박한 무대였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파리의 관객들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무용가 조택원의 춤에 흠뻑 빠져들었다. 극장은 만원이었고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대 최고의 무용평론가 페르노와 디보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조택원이 신비롭고 이국적인 특이한 예술로 우리를 매혹시켰다”고 극찬했다. 기메박물관 공연 이후 조택원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행운을 누린다.

공연 제의도 잇따른다. 순수하게 춤을 춰서 약 1,000프랑에 달하는 개런티를 받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위대한 예술가!’ 무대에서 조택원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공연개런티 덕분에 조택원의 파리생활은 궁핍함을 면하게 되었다.

 ‘뮤제 기메’에서의 첫 공연
조택원을 기메박물관에 소개해 준 사람은 일본인 야마다 기쿠(山田菊)였다. 기쿠는 리옹 총영사를 지낸 부친과 프랑스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여류시인으로 활동했고 스위스 출신의 남편 콘라드 메이는 유명한 화가였다. 이런 배경으로 기쿠는 기메박물관의 회원 자격을 얻었다. 조택원은 이들 부부의 집에 자주 초대됐고 여기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교분을 나누며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

기메박물관은 유럽 최대의 아시아전문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설립자 에밀 기메(Emile Guimet)는 리옹 출신 사업가로 1876년 이집트, 그리스를 비롯 인도,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아시아의 종교와 문명에 매혹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기메는 1879년 리옹에 박물관을 짓고 여행에서 수집한 미술품과 유물들을 전시했다.

리옹의 유물들은 10년 후 파리에 건립된 기메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후 소장품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비롯 유럽 각국은 극동 지역에 탐사단을 파견하여 고미술품을 발굴하고 수집하는 일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기메박물관의 컬렉션이 풍부해진 것은 이러한 당시 흐름과도 무관치 않다.

▲기메아시아박물관 외관

프랑스 당국의 행정적 결단도 기메박물관의 명성을 높이는데 한 몫을 했다. 결정적으로 1927년 기메박물관은 프랑스박물관국 산하로 편입됐다. 이후 국가 주도의 탐사를 통해 확보된 유물들은 자연스럽게 기메박물관으로 흡수되었다.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 장관이던 1945년 프랑스 정부는 국가소장품 재배치를 추진했다.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이집트 유물들을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기고 대신 루브르에 소장된 아시아 미술품들은 모두 기메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이로써 기메박물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아시아 전문박물관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파리 9구 이네나역에서 하차하여 지상에 오르자 대각선 방향 건너편에 기메박물관이 시선에 잡힌다.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유서 깊은 기메박물관에 도착하니 가슴이 설렌다. 첫 인상은 고풍스럽고 품격이 넘친다. 박물관 어딘가에 조택원의 숨결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1층 현관 입구의 높은 천장과 커다란 원형기둥은 신전의 느낌을 안겨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크메르의 불교석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의 일부를 떼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시바여신이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는 참파왕국의 풍부한 컬렉션은 기메박물관의 아시아적 가치를 증폭시킨다.

2층 역시 종교적 색채가 돋보인다. 히말라야,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등에서 수집된 희귀 유물들이 가득 차 있다. 고대 인도에서 비롯된 문명의 씨앗이 다양한 줄기를 생성하며 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간 징표를 느끼게 해준다. 실크로드를 타고 흘러들어온 악무(樂舞)의 시원과 확산, 그리고 ‘진보’의 흔적이 어렴 픗이 스쳐지나간다. ‘신들의 정원’을 빠져나와 3층으로 향한다. 

▲기메아시아박물관 내부

기메박물관의 한국 유물들
  3층은 한·중·일 3국의 전시관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유물은 약 1천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청동유물, 신라금관, 분청사기, 풍속화를 비롯 민예품 등 낯익은 전시물이 본국의 탐방객을 반긴다. 마침 ‘꽃의 작가’로 유명한 화가 김종학의 전시가 열리고 있어 일석이조의 행운을 맛본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화려한 꽃무덤 속으로 언제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기메박물관의 한국관은 소박하다 못해 왜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를 비롯 조선후기 김홍도의 풍속화, 이황의 서예작품 등 국보급 유물들은 수장고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일본관의 전시내용은 양적인 면에서 한국관보다 우월해 보였다.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일본, 중국의 유물은 약 1만 5천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애초 한국관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것이다.

일본관은 각종 조각상들과 노오·가부키의 의상과 가면, 도자기와 회화류 등이 주류를 이룬다. 에도시대 목판화의 진수 우키요에도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 취향 및 일본풍을 선호한 자포니즘(japonism) 풍조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 ‘무사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듯 갑옷을 비롯 다양한 형태의 검(劍)들도 눈길을 끈다.

역시 대국답게 중국관은 넓이와 깊이 면에서 남달랐다. 은·주시대의 고고학적 유물은 시간의 깊이를 웅변한다. 청동거울과 도자기, 회화류 그리고 불교미술품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특히 한·당시대 출토된 음악상, 무용상 등 각종 도상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중국, 대만 등 중화권 박물관 이외 가장 풍부한 한·당시대 악무 주제의 도상컬렉션이 아닌가 싶다.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한국의 유물은 중국, 일본에 비해 턱없이 빈약해 보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17,18세기 유럽의 귀족층을 사로잡은 이른바 시누아즈리(chinoiserie 중국풍예술)와 자포니즘(japonism 일본풍예술) 열풍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실제 오르세미술관, 국립장식박물관엔 중국의 도자기, 실내장식구 등이 비중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보주광장에 위치한 빅토르 위고 박물관에도 중국풍 장식구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유럽의 화가들 그리고 귀족층의 일상 속엔 자포니즘과 시누아즈리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기메아시이박물관 전시실에서 필자

사정이 이러하건대,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한국유물이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기메박물관의 한국 컬렉션은 어떻게 모아졌을까? 대부분이 콜랭드 플랑시 초대 주한 프랑스 대사의 수집품이라고 한다. 조선 재임 당시 고종황제에게 선물받거나 플랑시 대사가 직접 수집했다.  여행가이자 민속학자인 샤를 바라도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다. 바라는 아시아 탐험 중이던 1888년 조선을 방문하여 약 1년간 머물렀다. 프랑스 대사 콜랭드 플랑시의 도움으로 고종 황제의 신분증명서 및 추천서를 지참하고 한반도를 여행하면서 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관찰하고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전한다.

프랑스로 돌아간 바라는 1892년 여행전문지 「투르 뒤 몽드」지에 조선 여행기를 연재했다. 호기심 가득한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풍경은 바라의 글을 통해 서구사회에 최초로 소개되었다. 바라의 조선탐방기는 훗날  『조선 종단기』라는 제목으로도 출간됐다. 플랑시와 바라의 한국컬렉션이 망실되지 않고 기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은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기메박물관의 옛 지도
기메박물관은 개관 초기부터 전시기능에 한정되지 않았다. 아시아의 역사와 문명, 종교 등에 대한 강좌와 세미나, 음악회, 공연 등이 열렸다. 여성 스파이의 전설 마타하리가 기메박물관에서 데뷔무대를 가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타하리는 힌두교의 시바신 조각장식을 배경으로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춤으로 단숨에 유럽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타하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 독일정부에 포섭되어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17년 2월 13일 연합국 정보부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기메박물관 지층에 있는 공연장은 닫혀 있었다. 아쉽게도 조선의 청년무용가 조택원과 여성 스파이의 전설 마타하리가 혼신을 다해 춤췄던 무대공간과의 조우는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지도전시실을 둘러봤다.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각국의 옛 지도로 시선이 쏠린다. 근세 서구 열강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수집에 열을 올렸다. 각양각색의 옛 지도를 한 자리에서 보고나니 유럽에서 왜 지리학이 중요하게 취급되는지 알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기메박물관에 전시된 세계지도 속 한반도의 존재는 희미했다. 칼라로 그려진 정교한 옛 지도를 가진 중국과 일본이 부러웠다. 중국이 오랜 세월 중화주의를 표방하며 강건한 역사를 지켜온 이유를 새삼 깨닫는다. 근세 일본이 이른바 황인종단결론을 내세워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한 욕망의 근원을 엿볼 수 있었다. 지정학적 위치상 그 발판이 됐던 한반도의 슬픈 역사를 반추해 본다.

기메박물관 공연이후 이곳을 자주 찾았던 조택원은 상념에 젖곤 했다. 격동기 복잡한 정치적 메커니즘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청년무용가 조택원! 그는 오로지 춤으로 유럽의 심장 파리를 겨냥했다. 조택원의 파리는 외롭고 고독했으나 예술가로서는 시종 당당하고 야심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