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포기와 베스’의 작곡가 거슈윈에게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포기와 베스’의 작곡가 거슈윈에게
  •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 승인 2018.09.18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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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연출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케이프타운오페라(Cape Town Opera. CTO)의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를 봤습니다. 오페라 원작 버전이 무대에 오르는 건 국내에선 처음입니다. 올해는 거슈윈(G. Gershwin, 1898-1937, 미국) 탄생 120주년인데, 아시아 최초의 공연을 성사시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의 모든 분께 감사하게 됩니다.

오페라는 최고였습니다. ACC는 이 작품을 펼치기에 딱 좋았습니다. 무대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적당한 크기의 세트가 놓여 있었고, 작품의 흐름에 따라 배우들이 직접 자연스럽게 세트를 전환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조명은 무대의 세트와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에 관객들을 극에 몰입하도록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감동과 감탄은 역시 CTO의 노래였습니다. ‘잘 부르려고 전혀 애쓰지 않으나’ 너무도 잘 부르는 노래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포기와 베스’하면 떠오르는 ‘섬머타임’은 극의 분위기에 따라서 몇 번 변주되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노래하나만으로’ 많을 걸 담아냅니다.

안무 또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답니다. 한국의 뮤지컬이나 k-pop을 보면서 ‘칼군무’에 놀랍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춤에선 개인이란 존재하기 어렵죠. 너무도 일사불란한 일치도 동작이기에 그렇습니다. ‘포기와 베스’는 꼭 그렇지 않았습니다. CTO에선 각자의 배우의 감정에 따라서 동작이 좀 달라 보입니다. 어떤 배우는 오버하기도 하고, 어떤 배우는 대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캐릭터가 다르듯, ‘안무는 안무일뿐’ 사람에 따라서 그 표현의 정도도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크게 어려운 동작이 없는 안무가, 제 눈엔 더욱 친근해서 끌렸습니다.

거슈인씨. 당신이 만든 음악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요? ‘포기와 베스’를 오페라 원작 버전으로 쭉 들으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조금 과장되게 말해도 좋을까요? ‘섬머타임’을 비롯한 모든 곡들이, 마치 ‘내가 편곡에 참여한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깊은 정서가 담겨있었습니다. 정말 이리 마음에 쏙 드는 음악극은 참 오래만입니다. 돌이켜보니 오페라 원작 버전의 ‘포기와 베스’를 실제 공연으로 접하는 건 처음입니다. 그럼에도 음악에 무척 끌리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내가 음악적으로 이토록 미국화(化)되었단 말인가?”

좀 아쉽다면, ‘코리아쿱오케스트라’입니다. ‘좀 더’ 재즈적이고, 블루스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입니다. 무엇보다도 흑인영가풍의 곡조가 그랬습니다. ‘negro spiritual’이란 이름처럼, 좀 더 진하게 영혼을 울리는 듯한 연주를 기대한 건 나의 과한 바람일까요?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CTO와 좀 더 많이 연습을 하고, 만약 장기공연을 한다면 그들은 보다 더 ‘스피리츄얼’ 충만한 연주를 들려줄 거란 믿음을 가져봅니다.

거슈인씨. ‘포기와 베스’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연된 것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1962년 8월,  이근삼(1929~2003) 번역, 오사양 연출로, 극단 ‘드라마 센터’의 제 3회 공연이었습니다. 1회 ‘햄릿’, 2회 ‘밤으로의 긴 여로’에 이어서, ‘포기와 베스’를 선택한 겁니다. 드라마센터를 이끈 유치진을 비롯해서, 당시 연극인들이 얼마나 이 작품을 갈망했는가도 미루어 짐작하게 되더군요.

드라마센터의 ‘포기와 베스’에서 포기는 김동훈(1939∼1996), 베스는 최지희와 오현주의 더블,
크라운은 김동원( 1916~2006)과 조항(1928~1968)의 더블이었습니다. 사이먼의 오현경, 제이크는 김성원, ‘스포팅 라이프’의 김성옥, 세레나의 여운계(1940~2009) 등. 이 분들은 한국의 연극은 물론이용, 영화와 드라마와 관련해서 너무도 큰 역할을 한 분들이죠.

극단 ‘드라마센터’의 대표 유치진은 ‘포기와 베스’에 애착이 무척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로부터 4년뒤, ‘포기와 베스’는 보다 더 당신의 의도에 맞게, 공연을 하게 됩니다. 유치진은 자신의 딸(유인형)이 ‘포기와 베스’를 제대로 된 뮤지컬 형태의 작품으로 연출해 주길 바랐었다고 하는데, 유인형의 연출데뷔작이 ‘포기와 베스’입니다.

드라마센터에서 1966년 11월 9일부터 21일까지 장기공연을 했습니다. 오페라와 뮤지컬의 장기공연이 정착되지 않은 당시 한국에선 매우 이례적인 장기공연의 성공이었죠. 유인형은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에서 특별상(신인연출상)을 받았는데, 이 또한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내 마음 속에 깊이 저장되어 있던 ‘포기와 베스’에 관한 기억과 오래전 자료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군요. 투 트랙의 파노라마만 이런 것인가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는 CTO의 ‘포기와 베스’의 황홀경에 빠진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의 ‘포기와 베스’의 공연사를 훑은 것이죠. 그렇게 1막은 끝이 났습니다.

‘포기와 베스’의 2막을 대하면서, 나의 관람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내게 딱 어울리는 음악극이고, CTO 배우들의 매력은 더욱 발산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반성적인 의문이 들더군요. “아, 우리에게도 ‘포기와 베스’와 같은 스토리와 이에 필적할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포기와 베스’의 원작의 배경은, 1920년경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 배가 오고가는 항구죠.  CTO 공연을 집중하면서도, ‘내 맘 속에선, 내 맘대로’ 그 무대를 1920년대 혹은 1930년대의 인천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인천도 찰스턴처럼 항구. 당시 인천의 ‘송현리’와 ‘화평리’가 작품과 오버랩되었습니다. ‘포기와 베스’의 모든 캐릭터가 당시 인천의 이 곳에서 살던 사람들과 참 상통하더군요.

그 시절, 신문기사를 한쪽을 채웠던 치정과 살인, 울분과 선행이 모두 ‘포기와 베스’의 상황과 겹쳐졌습니다. ‘스포팅 라이프’는 인천의 중국인촌을 돌면서 마약을 몰래 팔던 이였고, 피터는 일본인마을을 떠돌면서 살살거리면서 꿀을 파는 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더군요. 처음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포기와 베스’의 이야기를 인천을 무대로 ’번안’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좀 생각이 달라졌죠. 그 시절 인천에는 이 보다 더 흥미롭고 애틋한 얘기도 많은데, 그걸 ‘스토리텔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그냥 거기에 그대로 버려두고 있을 걸까?” 이런 반성적 자책과 실천적 의미가 내 몸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거슈인씨. 돌이켜보면, 이 땅에서의 재즈의 역사도 꽤 오래되고 든든합니다. 1920년대는 몰라도, 1930년대에 접어들면, 이 땅에서도 이미 재즈와 블루스가 낯선 음악은 아니었죠. 유성기음반산업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게 되죠. 트로트와 신민요는, 과거 조선의 전통음악과 함께 뿌리를 내리며 공존했습니다. “그 많던 조선의 음악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포기와 베스’가 끝나갈 무렵, 내 마음 속 ‘투 트랙’ 중 ‘한 트랙’도 비극적 분위기에 휩싸여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조지 거슈인, 당신은 진정 위대합니다. 당신과 다른 국적,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 이렇게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땅에서도, 그런 작곡가를 만나고 싶습니다. 한국의 음악극역사에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지난날의 최창권 (1934~2008) 과 김희조(1920~2003)가 그래도 당신과 가장 근접한 인물이겠죠. 요즘 대한민국 뮤지컬계에 좋은 작가와 좋은 작곡가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이 땅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요? ‘포기와 베스’처럼 가난과 차별을 밑에 깔면서, 삶의 다양성을 그려내는 작품이 나오게 될까요? CTO의 ‘포기와 베스’에 무척 흡족했지만,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한 트랙’은 계속 이렇게 공허하게 회전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 케이프타운 오페라 <포기와 베스>, 2018.09. 07~0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