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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진호 작가/전 광주시립미술관장 “시대정신-대동세상 위한 작품 하는 것, ‘나의 운명’”
“80년 5월 광주가 나를 이끌어, 죽을 때까지 꾸준히 목판 작업하겠다”
2018년 09월 18일 (화) 12:23:00 이은영 발행인/임동현 기자 press@sctoday.co.kr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오는 21일까지 <조진호 무유등등>전이 열린다.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첫 번째로 열리는 이 전시는 ‘80년 광주’를 목판화로 맨 처음 알린 조진호 작가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38년 전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보는 뜻깊은 전시다.

사회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미술학도에게 5.18의 참상은 충격이었다.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군인이 시민을 학살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항쟁의 현장으로 갔지만 어머니에게 반 강제로 집으로 끌려왔다. 이는 항쟁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그 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눈물이 그렁해질 정도로 한켠의 상처로 남게 됐다.

   
▲ 조진호 작가가 80년 5월 광주를 최초로 표현한 <오월의 소리 1980>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 빚을 판화 작업을 통해 탕감했다. 그의 판화는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최초, 최상의 매개체가 됐던 것이다.

광주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광주비엔날레’를 연다는 것에 반대해 ‘통일미술제’를 이끌었던 조진호 작가는 최근 광주시립미술관장 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전임 시장에 대한 도리’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기에 매년 전시를 하고 죽을 때까지 작업을 하고 싶다는 그다.

조진호 작가가 전하는 광주와 작품 이야기,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38년간 작업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옛날 것 먼지털어 싹 끄집어냈다(웃음). 프린트는 이번에 다시 한 것이다. 금남로 현장에서 한 것이 많고 시민과 공동작업한 것도 있는데 그곳에 놔두고 간 것도 많고 유실된 목판도 있다.  그 외에 개인전을 위한 목판은 내가 직접 관리했기에 90% 정도 남아있었다.

이번 전시 제목이 ‘무유등등(無有等等)’이다

광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등산이 어머니라는 걸 인정하고 무등산의 품 안에서 성장하고 작업하고 그 정기와 에너지를 받으며 산다. 무등산의 ‘무’가 ‘없을 무(無)’지만 산이 뾰족하지 않고 모든 것을 품는다는 점에서 없을 무가 통하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공평하다는 이야기다. 무등산은 다른 의미로 보면 평등의 의미로 다가오고  서로 얽혀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80년 광주를 제일 먼저 작품으로 표현했고, 각종 시집에도 작품을 실었다. 당시 작업은 어땠는가?

80년 5월 지나고 나서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뭔가를 해야한다고 느꼈다. 당시 항쟁이 한창일때 현장에 있다가 어머니께서 반 강제로 집으로 끌려가서 계속 내가 못 나가게 지키셨는데 마음 속에 ‘도망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미안함이 정말 많았다.

유화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판화로 옮기기로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광주항쟁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다만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살상을 했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뭔가 분출해야하는데 가장 적절한 표현 방법이 판화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판화가 적절한 작업이었다.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만  제일 사람들에게 내용을 함축시켜 전달시키는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판화는 문학으로 치면 시같은 것이었다. 시민들에게는 우리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작업하는 이에게는 빠른 시간내에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는 빨리빨리하는 것이 더 필요하기에 페인팅보다는 판화가 선호됐고 판화를 하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 메시지를 계속 전했다. 처음 판화를 한다고 했을 때는 이런 의도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다보니 판화가 적합한 장르라고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사회 흐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80년 5월 광주로 인해 사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적인 소용돌이에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작업의 주테마였고 그 테마로 쭉 나갔다.

많은 토론이 있었다. 다리갤러리라고 대안공간을 3년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작가들에게 무상대여를 했었다. 밤에는 작업하고 낮에는 전시하고 작가들과 난상토론이 계속 있었다. 그 과정이 작품의 정체성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됐고 사회를 보는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 일련의 참여미술들이 광주에서 이뤄지면서 갤러리를 중심으로 스터디를 한 젊은 작가들의 눈이 떠지고 표현 양식이 확대됐다. 그렇게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단체를 만들었고 본격적으로 목판화를 했다.

광주비엔날레 개최를 반대하는 통일축전을 열기도 했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비엔날레가 광주의 핏값으로 한다고 여겼기에 반대를 했다. ‘안티 비엔날레’로 미술공동체를 만들고 홍성담 작가와 내가 공동 대표를 했다. 우리끼리 한 미술행사가 ‘통일축전’으로 발전했다. 많은 민족미술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주셨고 민중미술 계열에서는 최초로 성공한 대규모의 행사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다.

   
▲ <대학살도>

광주시립미술관장을 맡았는데 광주비엔날레를 보는 지금의 시각은 어떤지?

공직에 있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적절치 않은 말일수도 있지만 비엔날레라는 형식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광주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처음부터 반대였고 지금도 안할수만 있다면 그 예산으로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광주라는 땅에서 하는 것이기에 광주의 정체성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감독들이 광주 정체성 보여준다하지만 결국 안됐다. 광주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외국 사람이 잠깐 와서 광주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미술 양식이 필요하다면 광주의 정체성을 살려서 평화 통일을 이루는 형식이 되어야지 아무 이해 관계 없는 비엔날레는 의미가 없다. 광주 정체성을 살렸던 통일미술제가 그래서 잘했다고 본다. 지금은 없어진 게 아쉽다.  

광주를 어떻게 하면 오늘날의 시대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광주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대동세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인데 광주의 정신 자체가 대한민국 통일을 지향한다고 본다면 광주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시작되어야한다고 본다. 이해 관계를 떠나 서로 한마음되어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야한다고 본다.

다만 광주의 어떤 정체성이나 정신을 강요할 수는 없다. 평론가나 역사학자들이 이를 전문화시키고 국만들이 공감할 수 았도록 작업해야한다. 5,18을 중심으로 민중미술이 진행된 과정을 아카이브하고 체계화해아 5.18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5.18이 일어난 역사적 환경과 그를 딛고 일어선 광주 사람들을 봐야한다. 항쟁에서 하층민들이 많이 죽었는데 방금 전부터 웃고 이야기하던 친구와 이웃이 바로 시체가 되는 분노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정리되고 밝혀지겠지만 그분들의 정신이라는 것이 댓가성이나 목표의식 가지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끈들이 연결된, 대동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한다. 

오늘의 광주가 하나의 지역인 광주가 아니고 광주민주화항쟁이 광주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 아니라 현대로 가는 꼭지점이다. 아직 광주민주화항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도 사람들을 표현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80년대를 매번 불안하고 쫓기는 심정으로 살았다. 표정에서 그런 모습이 느껴진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라. 90년 초부터 뒤돌아볼 시간 없이 일했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다른 세상이 잇다는 것을 보려고 유럽 여행도 가고 했다. 지금까지는 판화라는 매체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내 작업, 조진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남도의 붉은 황토, 역사의 흔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수묵으로 그렸는데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여러 작업 했는데 적당한 게 수채화여서 90년대에 본격적으로 하게됐다. 

관장 시절 개인 전시를 하지 않았다

관장을 한다고 하니까 몇 분이 조언을 해주셨다. 관용차 함부러 타고 다니지 말라. 식사 카드 규정대로 해라, 직원들에게 인사 잘하고 하대하지 말라, 자기 관직을 이용하지 말라 등을 적어줬다. 지키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사실 관장을 하게 되면 전시 유혹이 많다. 그것을 안하는 것이 동료 작가들에 대한 예의다. 후회는 없다.

   
▲ <학살도>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은 언제였는지

지역에 있는 아카이브를 강화시키고 외국 작가,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 모셔 전시하는 것도 중요한데 지역에서 원로들을 외면하면 누가 알아주나? 지역에서는 인정받지만 외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분들도 있지 않나. 이런 분들은 돌아가셨더라도 위로를 해드려야한다고 본다.

지난해 열었던 홍성담 전시가 기억에 남는다. 숙제 중의 하나였다. 관장으로 오기 전인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나고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의 <세월오월> 전시를 못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때 중간에 나서서 무엇이라도 했어야했는데 그저 구경꾼 노릇만 했다. 빚을 진 느낌이 있었다. 

이후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작가와 만나 전시 이야기를 했다. 홍 작가가 전시를 거절한 공무원들의 초상화를 다 그렸다고 하더라(웃음). <세월오월>을 메인으로 하고 나머지는 세월호 그림으로 가자고 해서 오케이했다. 

상당히 걱정했다. 홍성담 작가 성격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 막상 2~3년 지나고 풀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정리가 됐다고 할까. 서로가 많이 치유가 되는 전시가 됐다. 서로가 지고 있던 빚에서 벗어난 느낌이었고 보람있고 기억에 남는 전시였다. 

임기가 남아있었는데 갑자기 관장직을 그만둔 이유는?

모셨던 전임 시장님(윤장현 전 광주시장)이 내가 좋아하는 선배고 같이 여행다니는 좋은 형님이라 흔쾌히 캠프에서 도와드렸고 그분의 문화적 마인드를 제가 잘 안다고 생각해서 시장님의 생각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미술관에 들어갔다. 재선을 나가든 물러나든 같이 나가려했다.이후 불출마선언을 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도리라고 생각했다. 모신 분인데 가셨으니 옆에 누구 한 사람은 나가야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했다. 

전혀 후회가 없다. 살아나갈 동안 작업할 시간이 있지 않나. 중요한 계기 만들었기에 전혀 후회없다. 최근에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본다.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없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됐고 이로 인해 뒤늦게 ‘자질 논란’이 불거졌는데

인정한다. 미술 작업만 한 사람인데 국제적인 네트워크 문제 같은 것은 전문인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작가들의 외양을 넓히기 위해 외국을 나가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공립미술관이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데 공립미술관이 꼭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어야하느냐라는 의문이 있다. 지역 미술인들, 지역민들에게 외면받는다면 세계적인 미술관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광주시립미술관이 개관한 지 20년이 됐지만 시 재정이나 인프라 때문에 운영이 활발하지 못했다. 지역 사람들과 소통이 안됐다. 

관장으로 오면서 미술관은 지역 시민과 소통하는 것임을 첫 화두로 잡았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려면 평생 지역에 살면서 작업하고 그 작가들의 애로사항을 잘 아는 사람이 관장을 맡아 그 분야를 키우고 전문 경영인이 외양을 넓히는 과정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12월에 광주에서 새로운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를 하려한다. 그 동안에 작업한 것과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을 목판화로 표현한 것, 최근 작업을 통해 보완한 것을 12월에 전시하고 내년이나 내후년을 자료집 제작을 목표로 자료정리를 하고 있다.

가능한 매년 전시를 하고 싶다. 매년 전시하려면 그만큼 작업 결과가 나와야하니까 몸만 건강히 유지하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관 그만두고 나서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건 꾸며진 이야기니 걱정말라(웃음).

판화를 찍으면서 30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회상이 되고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한다. 목판을 다 쓸 것이다. 내가 사는 땅에서 내 눈으로 본 오늘이 모습을 흑백으로, 죽을 때까지 목판을 꾸준히 작업하고 싶다. 시대정신 있는 작품을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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