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신창극 ’우주소리‘ 김태형 연출에게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신창극 ’우주소리‘ 김태형 연출에게
  • 윤중강 /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8.11.0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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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 평론가, 연출가

“동료가 되었네.” 신창극 ’우주소리‘의 마지막 대사가 이렇죠? 코아티(조유아)와 실료빈(장서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임에도, 결국 듀 소녀는 친구가 됩니다. 우주의 질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고, 뜻을 세우고 우주를 떠납니다. 코아티와 실료빈은 서로에게 훌륭한 동료입니다.

동료(同僚)란 무엇일까요? 사전을 통해 더 정확하게 뜻을 짚어봤습니다. ‘같은 직장이나 같은 부문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더군요. 그렇다면 국악과 연극, 판소리와 뮤지컬은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을까요?

내게 당신은 실료빈입니다. 연극이고 뮤지컬입니다. 국악 혹은 판소리라는 ‘코아티’와 같은 존재에 일시적으로 기생하는 존재입니다. 실료빈이란 존재가 그런 것처럼, 이 글에선 ‘기생’이란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다는 걸 아시죠? 당신 또한 그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으시겠죠?

문제는 과연 ‘어떤’ 기생이었는지가 문제입니다. 그것이 아쉽습니다. ‘신창극’이란 이름으로 뭉친 코아티와 같은 ‘국립창극단’과 실료빈의 역할이 된 ‘김태형’은, 작품 속의 두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동료’라는 연대 속에서 뭔가를 해냈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 창극도 우주를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특히 국악계가 그렇더군요. 나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언하겠습니다. “신창극 ‘우주소리’는 ‘우주’를 소재는 잘 택했지만, 창극과 판소리에서 풀어내기엔, 대본(각색)과 연출에 많이 한계가 있다”

이 작품을 좀 달리 접근해볼까요? 만약 창극이 아닌, 연극 또는 뮤지컬로 대학로에서 올렸다고 생각해 볼까요? 과연 얼마만큼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작품의 소재와 내용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궁극적인 공연을 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대본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저도 창작의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으로 정말 잔인한 발언일지는 모르나 결국 수작(秀作)은 아니며 범작(凡作)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소재’에만 연연하지 마시고, 궁극적인 ‘작품’이라는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나게 못 만든 것도 아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 중요하지도 않은 장면에 시간을 지나치게 허비한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어떤 관객의 단평입니다. 나는 이 분이 이 작품을 가장 잘 봤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만약 다시 만들게 된다면, 이 분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없습니다. 아울러 작품 속에서 주제를 특별히 강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장면에서 작가(연출)이 진정 힘주어야 하는 것이 ‘장면’으로 각인 되지 않습니다. 모두 ‘설명’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대본을 다시 점검해 보시지요.

만약 ‘상대성이론’을 소재로 한 과학적 연극이 있다고 칩시다. 우리는 여기서 ‘상대성이론의 강의를 듣는 연극을 보고 싶진 않을 겁니다. 상대성이론을 다룬 연극을 본다면, 그 연극 속에선 상대성이론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이 존재하고,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이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느끼며 생각하게’ 만들어야 무릇 좋은 작품이라고 할 겁니다. 공연장은 강의실이 아니니까요.

신창극 ‘우주소리’는 많은 설명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선 설명이 도를 지나쳐서, 마치 작품의 스토리와 작가의 생각을 마구 관객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이런 장면에선 무대 위의 배우나 객석에 앉는 관객이나 피곤해지거나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죠.

배우들이 전체적인 작품을 틀과 주제에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애드립과 표정연기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가요? 매우 밋밋하고 지루했을 겁니다. 이 작품이 다루는 내용은 극적일지 몰라도, 실제 각색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인 ‘대본’은 극적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너무도 설명적이고, 진술적인 대본이죠.

때론 이렇게 사후(事後)적인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죠 사건이 벌어졌을 때와는 다르게, 더 이성적인 접근을 하게 한다거나, 상황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묘미가 있죠? 이  작품이 그러했나요? 이 작품은 ‘다이제스트’로 일관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우주소리’는 원작의 스토리를 알고 싶을 때 유용한 작품이고, 다른 게 말한다면 신창극을 표방한 이 작품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지 못하고, 설명과 진술로 일관한 극적이지 못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각각의 코아티와 실료빈, 더불어 코아티와 실료빈을 합쳐서 보면서, 이성과 감성을 계속 ‘쌓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지 못합니다. 장면들이 단속적(斷續的)입니다. 설마 이런 것을 판소리라는 구조가 갖는 ‘부분의 독자성’, 이런 아주 오래된 논문의 소제목을 가져와서 변론을 하려 하진 않겠죠? 무대와 조명은, 연주과 음향은 매우 훌륭해서 공연을 보는 것 같지만, ‘대본적 스토리’와 ‘연출적 스타일’은 리딩 공연이나 트라이아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김태형이란 연출가가 생각하는 창극 혹은 신창극은 무엇일까요? 나는 작품을 보면서 줄곧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그럴 찾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대독(代讀)헤주는 연극을 보는 느낌 같기도 했고, 가사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뮤지컬 넘버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내 입장에선, 연출자의 창극에 대한 생각 또는 고민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연출자가 내적으로 갖고 있는 ‘전통적 운율에 대한 기반’이 든든하지 못해서, 때론 관객인 내가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이런 대본과 이런 가사에서, 작곡가는 최선을 뽑아냈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너무 기존의 ‘창극’적인 시각으로 본다고 비난해도 좋습니다. 그럼 작품적으로 볼까요? 이 작품의 내용적 키워드라 할 ‘모험’과 ‘희생’이 실제 작품 속에는 얼마나 진지하게 ‘극적’으로 투입되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시죠? 스토리적인 면에선 그런 장면이 있지만, 스타일적인 면에서 그런 것이 어떻게 작품화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김태형 연출님, 창극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창극을 너무 쉽게 생각하신 건가요? 우선 이건 신창극도 창극일진대, 창극에서 주는 재미와 의미가 없습니다. 창극적 골계와 창극적 비장이 없다는 얘깁니다.

만약 창극을 깊이 있게 접근하지 못할 때, ‘반(反)창극을 만들어도 좋을 겁니다. 한태숙 연출의 ’장화홍련‘이 그렇습니다. 이런 작품은 오히려 그런 작품을 통해서 창극의 가치와 반창극의 매력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주죠. 이번 작품에서는 창극을 많이 본 관객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창극과 판소리의 차용입니다. 이건 대본이 갖는 한계이고, 연출이 갖는 한계입니다. 극적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신창극도 창극일진대, 작가 혹은 연출이 창극을 바라보는 시각이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창극 또는 신창극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당신이 실료빈이라면, 스스로 과연 어떤 실료빈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창극의 ’동료‘가 되길 바랍니다.
● 신창극 시리즈 2. “우주소리”, 10. 21. ~ 10. 28. 국립극장 달오름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