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한국미술의 미래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한국미술의 미래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8.12.0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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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

한국미술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잡지사나 신문의 앙케트, 칼럼, 강연, 좌담회, 혹은 대학의 수업을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내가 점쟁이나 미래학자가 아닌 이상 단언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어렴풋이 예측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미술이 어떤 방향성을 지니고 나아가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겨냥해야 할 것인가? 물론 세계속의 한국미술이다. 세계의 일원인 한국이 세계의 다른 여러나라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인류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것인가 하는 보편적인 문제가 일차적으로 떠오른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의 한 나라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그 나라도 식민주의의 시대를 마감한 뒤 점차 고유의 전통을 잃는 가운데 현대화의 문제에 직면해 왔다고 가정해보자.

현대화의 문제는 다름아닌 삶의 문제라는 점에서 거기에 상응하는 갈등과 혼란, 투쟁, 동조, 저항, 순응 등등의 다양한 심리적 기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전위가 있으면 후위가 있는 것처럼, 문화와 예술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문화를 향유한다. 

아프리카의 한 나라건 한국이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보편적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한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던 ''산을 허물어 골짜기를 메우는'' 전략이다. 여기서 산은 서구를, 골짜기는 아프리카나 한국과 같은 비서구권 국가들을 가리킨다.

산을 허물고 골짜기를 메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의  학자, 비평가, 에술가들이 서로 대등한 차원에서 만나 교류하고 의견을 나누며, 학문과 예술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전제돼야 할 것은 자국의 수준높은 학문과 예술의 업적을 성취하는 일이다. 자국의 이론가나 학자, 예술가들이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연마하여 산을 허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데, 글 설고 말 설은 서양사람들이 무엇때문에 그 힘든 일을 대신해주겠는가?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 보편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우선 시급히 두 가지 전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외적인 문제로써 번역사업에 집중하는 일이다. 미술은 시각예술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론은 번역을 통해 외국인들의 이해를 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미술이 곧 이론으로 간주되는 현대미술의 경우 이에 대한 국내의 축적된 학술적 비평적 성과를 해외에 알릴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예술경영지원센터를 비롯한 국가기관에서 이 일을 수행하고 있으나 아직도 미흡하다. 

두 번째는 대내적인 문제로써 지나친 서구적 편향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비단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설치나 미디어, 퍼포먼스 등 현대적 매체에는 얼마든지 개방된 의식을 가질 수 있으나, 작품에서 우리의 삶의 냄새가 나지않는 작품들, 즉 역사성과 전통, 삶의 구체성을 결하고 있어서 흡사 남의 옷을 걸친 것 같은 작품들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예컨대 마르셀 뒤샹의 <여행용 상자>는 고유의 창작품 같지만 그 이전부터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던 여행가방의 형태를 원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전통에 힙입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의 현대작가들이 그럴진대 우리의 작가들은 과연 어떤가? 현대미술의 원로일지라도 사후 50년을 버틸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개방된 정보화의 시대에 예리한 식자들의 검증의 눈을 피해 과연 건재할 수 있겠는가? 

서구의 문물에 뼈속까지 취해 그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작은 권력을 이용해 작가들의 의식화 작업을 선봉하는, 서양의 마름되기를 자처하는 전시 기획자가 이 땅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여기저기에 자생하는 진귀한 버섯들에게는 눈길 조차 주지않고 현대성의 미명하에 오로지 서양미술의 종자 퍼트리기에나 골몰하는 큐레이터나 미술사학자, 비평가는 없는지 우리 모두 반성해 볼 일이다. 이는 작가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보드라운 정구공의 반을 잘라 뒤집으면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된다. 오늘의 주류가 계속 미래의 주류로 남아있으라는 법 없고 오늘의 변방이 내일도 변방이리라는 보장이 없다. 세상은 늘 바뀌며 변화한다. 굳이 주역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게 세상의 이치다.

세상은 돌고 돈다. 오늘의 한국은 내일의 한국이 아니고 오늘의 동양은 내일의  동양이 아니다. 글로벌리즘이란 꽃밭은 로컬의 꽃들이 모여 아릉답게 만개할 때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