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우제길 화백 "영혼이 담긴 작품 한 점 탄생시키는 것이 작가로서의 꿈"
[특별인터뷰] 우제길 화백 "영혼이 담긴 작품 한 점 탄생시키는 것이 작가로서의 꿈"
  • 이은영 발행인
  • 승인 2018.12.0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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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길의 그림을 보면 살 맛이 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림 하나 남기고 싶다"

‘우제길 빛의 미래전’ 아시아문화의전당 특별초대, 12월12일~2월 24일까지 

어린시절 밤이면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 그 시절, 냇물이 흐르는 언덕위에서 본 수많은 반딧불이가 어린 우제길의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 빛은 희망과 꿈으로 승화되어 작가 우제길의 평생동안 다채로운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 됐다. 어린시절 반딧불이의 향수에서 시작한 그 빛이 오늘날까지 빛에 천착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제길 화백은 한국 미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서구로부터 유입된 앵포르멜이 한창이던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에서부터 시작해 1970년대 빛의 형상화와 추상의 융합으로 이르고, 그 후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현대물질문명의 긴장감과 아우성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여 우제길 화백만의 강렬하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묵묵히 본인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가며 자리를 지켜온 우제길 화백은 오늘날의 한국현대미술이 세계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낸 것이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전라도는 올해로 천년을 맞았다. 그리고 이곳에 「우제길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작은 조각공원이 있는 아름다운 우제길 미술관에는 어린 시절부터 이루어놓은 우제길 화백의 수많은 작품들이 잘 정리돼 있으며 그의 수많은 작품을 비롯한 모든 아카이브가 기록되어 있다. 우 화백은 오늘도 작업실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우 화백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선정한 <미술작가 500인>, 2009년 한국미술평론가 협회가 주관한 <한국 근·현대미술가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광주비엔날레」 제 1회 본 전시 참여 작가로 최고 인기작가상을 수상, 2002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주관 대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옥관문화훈장을 서훈했으며 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주최 한극근현대작가 50년 초대展에 출품했다. 현재까지 동경, 센다이, 후쿠오카, 쾰른, 파리 등 10회의 해외전시를 포함한 96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일본 동경 긴자의 「구라이화랑」 전속 작가로 활동하며 일본화단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우즈베크 공화국 한국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대작들이 소장돼 있다. 2018년에는 정부 미술은행 에서 우 화백의 작품이 두 점 소장되기도 했다. 

겨울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부는 지난 22일 광주 우제길 미술관에서 우제길 화백과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적인 내조를 아끼지 않은 그의 아내이자 우제길미술관장인 김차순 관장과 만났다.

▲ 우제길 화백(왼쪽)과 김차순 관장

오는 12월 12일 아시아문화의전당의 초대로 우제길 특벌전이 열린다고 들었다

올해가 전라도 1000년을 맞은해다. 이를 기념한 초대전시다. “우제길 빛”을 주제로 작품은 빛 시리즈로 대작20점을 전시한다. 대작 위주의 임팩트 있는 전시를 구성했다. 특히 이번 전시오프닝에 대안학교 학생들 40명의 수준높은 합창이 있는데 상당히 의미있는 전시 세레머니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품명에 ‘합창’이라고 붙인 것도 있다.(웃음)

선생의 작품 주제가 오랫동안 '빛'인데 작품 속 '빛'은 어떤 의미인가?

빛은 나 자신이라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여러 가지 꿈과 생각들을 빛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렸을 때 뒷동산에서 보았던 반딧불의 그 황홀함, 그것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남아 내 작품 곳곳에 ‘빛’의 생동감으로 살아있다. 꿈이나 생각, 사회의 일원으로서 광주미술을 하는 내게 빛은 또 광주라는 덩어리다. 광주가 바라는 꿈, 여러 가지 민주화를 열망해왔던 것들이 응축적으로 담겨있다. 재작년 열렸던 촛불시위를 ‘꽃빛’으로 표현했다. “꽃빛으로 봄을 부르다”라는 부제가 붙은 <한겨울밤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촛불로 어두운 시절을 환하게 밝힌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번에 모두 출품한다.

전업작가 50년이다 그간의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모름지기 작가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늘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좀 더 빨리 전업 작가가 됐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보다 오랜 작업의 결과로 얻어지는 창작물들을 좀 더 많이 탄생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내 작가적 욕심에 다름 아니다. 더한다면, 두 가지 직업을 겸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기도 할 수 있겠다.

작가라면 누구라도 다작에 대한 욕심 못지 않게 단 한 점의 작품이라도 후세에 널리 알려질 수 있는, 만인의 뇌리에 남아 사랑을 받는, 그런 작품을 한점이라도 남기고자 하는 욕심 또한 갖고 있지 않겠나.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영혼이 담긴 그런 작품 한 점을 탄생시키는 것이 작가로서의 꿈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29년 동안 몸담았던 교단을 떠나 참으로 고독한 창작의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도 그림에 대한 꿈을 자각하지 못했던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이 꿈을 이루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좀 전에 수장고와 작업실을 둘러보면서 선생의 어린시절부터 그린 작품들을 아카이브 해 놓은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어린 시절의 그림도 상상력이 현재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더라

수장고에 그림책 등과 신문과 잡지에 그린 삽화 등 아카이브된 것이 수천 점이다.. 어린 시절의 드로잉을 하던 습관들이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초를 닦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책에 그림을 그리고 직접 생물학 해부도도 그리고 여러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정작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광주서중 2학년 때 부터일 거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 그 일로 해서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나에게 그런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던 분들이 나점석, 양수아 선생님이었던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했던 첩첩산골 전남 장성의 조양초등학교. 그곳 말고도 몇몇 초등학교에서의 11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하면서 나는 무척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다. 그때의 그림에 묻어있는 칙칙함이란... (웃음)

그 후 군입대를 하고 베트남 파병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의 스케치전(전우였던 정주호(현재 대구에서 작품 활동 중)와의 2인전)을 하기도 했던 젊은 날의 열정이 나의 그림 인생의 청춘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진식 광주아시아아문화의전당 전당장이 선생의 작품은 광주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서 광주가 선생의 작품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선생도 광주미술을 말씀하시는데

민중미술 작가는 아니지만 광주의 습도 온도 등을 다 느끼면서 광주의 모습을 많이 담았다.

제1회 비엔날레 초대 작가로 출품한 작품인 ‘그날의 빛’은 광주민중항쟁의 원혼들을 표현한 설치미술이었다. 당시 관람객이 뽑은 작품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광주의 모습을 기록한 초기 작품들도 많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보다.

▲ Light 2018A-1, 2018, 판넬위에 하얀테이프칼라, 120.0x240.0cm

여러 큰 미술대전에서 수상도 일찍이 많이 하셨다

76년 한국 미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것이 첫 시작이었다. 첫 대상 작은 베트남 참전 이후 작품이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함께 여러 응모 전에 마치 전쟁을 치루듯 출품을 했다. 운이 좋았는지 많은 상을 타게 됐다. 그런데 첫 작품 대상작은 내가 소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20년 후에 한 후배가 동대문 고물상에서 그것을 찾아내서 내게 연락해 왔는데 얼마나 기뻤던지.(웃음)

공모전에 작품 출품은 내게 중앙화단을 알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전시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가 되고나서 비로서 작업과 전시를 병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쉴 새없이 그렸던 그림들을 전시를 통해 평가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87년의 관훈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그런 면에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결과도 생각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개인작품 발표회 30여 회와 30번 정도의 국제전 출품을 통해 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얻는 행복감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냈는데 미술대전 특선을 했다. 

여러 전시가 많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전시나 행사가 있다면

특이한 작업은 이광희씨와의 패션쇼를 한 것이다. 93년에 대전엑스포에서 두 번하고 신라호텔에서 앵콜쇼를 두 번하고 그리고 95년에 ‘우제길 회화 30년전’을 할 때 이광희씨가 오프닝 세레머니로 패션쇼를 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작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있는 일을 꼽는다면

200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한 전시 ‘한국추상회화 50년’전에 초대된 44인에 들어갔다. TV미술관 초기에 방영되기도 했다. 2009년 한국미술평론가 협회가 주관하고 33인의 평론가들이 선정한 <한국 근·현대미술가 100인>에 들어갔다. 남농 허백련, 의재 허건. 천경자 오승우 화백 등과 함께 나란히 들어간 것 등이 큰 보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 김차순을 만나 우제길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것이 큰 기쁨이자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작가로서 앞으로의 소망은?

언젠가 밤, 아주 적막한 가운데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소리의 마디마디가 내 혈관을 타고 들어와 내 몸 속의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때까지 내 그림의 주제였던 ‘빛’뿐만 아니라‘ 소리’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밤, 피리소리보다 더 진한 그 어떤 소리를 나는 내 그림 속에 기어이 담아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섬광처럼 짜릿하면서도 빛나는 전율의 화면에 밤 피리처럼 사람의 혼을 쥐어짜는 그런 그림을 기록하는 것이다. 소망과 평화에 자유까지를 가득 담은 그런 그림을 말이다. 작가란 언제어디서건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자기다운 작업에 임해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그리고 그런 독특함을 성취하기 위해 작가는 부단히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남아있는 내 그림에의 희망사항 하나는, 우제길의 그림을 보면 살 맛이 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런 그림 하나를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 미술관에는 우 화백의 작품을 소재로 다양한 아트상품이 전시돼 있다

아트상품이 사실 지금의 내 작품을 받쳐주고 있는 셈이다. 여러 수상도 많이 하고 했지만 내 작품이 너무 앞서나갔는지...작품 판매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을 우리 김 관장이 아트상품을 만들었는데 히트가 되면서 우리 살림과 내 작업을 하는 뒷받침이 됐다. 어지간한 공공기관 등에 가면 내 작품으로 된 넥타이가 없는 곳이 없다.

아트상품은 김 관장이 작품선정부터 재질 소재까지 꼼꼼하게 따져 만들고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김 관장의 희생은 말할 수 없었다. 김 관장은 내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뭐라고 그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다.


[김차순 관장]
"우제길 화백 세계적인 작가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서길"

우제길 미술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

작가 우제길 중심의 미술관이다. 미술관과 작업실이 각각으로 연리지처럼 연결돼 있다. 미술관 전체는 우제길의 작품이고. 미술관을 짓고 경영은 김차순, 내가 하는 것이다. 비엔날레도 여기에서 열만큼 광주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미술관을 오면 3번 놀란다. 우화백이 77세인데 젊다. 작가가 젊다. 작가의 나이보다 젊다는 것이다.(웃음)

미술관 개관 당시 광주 전남 시립 미술관이 각 하나씩 있었다. 제1종 문체부 소속 첫 미술관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프로젝트들도 많이 하게됐다. 지금은 2~30개 미술관이 생겼지만 우리가 허브 역할을 하며 그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미술관은 여백이 있는 미술관이다. 보통 미술관들 가보면 여백이 없다. 인간과 휴머니즘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 각박한 세상을 살 것인가. 암 투병이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바위 속에서 피어난 꽃이 눈에 띄는 것처럼 밝은 빛을 밝히는 것이 우리 미술관이라 생각한다.  

미술관 지을 때 이건창호 회장이 세 번이나 왔다. 당시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이건마루 창호를 대서 지어놓으니 그래서 이건물 짓던 중에 3년을 지었는데, 바닥에 철콘이라는 것을 대는데, 지진 대비해서 지어졌다. 모든 자재들도 현재의 최상으로 들였다. 다 이대로 제몸에서 색깔이 더 우러날 거다. 지금까지 박서보 선생은 13번을 왔다. 어떤 때는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데리고 왔다. 그 마음에는 우리 미술관에 대한 부러움이 있지 않나 싶다.

박 화백님은 “광주에서는 우제길이 이거야 이거, 작품은 우제길이지”라고 늘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그리고 미술관을 내가 짓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장을 하게 됐다, 하다보니 큰 기획도 자연스럽게 체득되고, 아트상품도 만들게 됐다. 

▲ 우제길 미술관

우 화백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작품활동에 든든한 조력자가 되고 있으시다. 우 화백의 작품과 김 관장이 생각하는 우 화백은 어떤 작가인가

우 화백을 빛의 작가라 하지 않나. 내가 생각하는 우화백의 빛은 태초의 빛을 생각하면서 연출되는 찬란한 빛이다. 본인도 찬란한 빛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본인이 얘기하는 것에는 조금 쑥스러움이 있는 것 같다. 우화백은 작품을 할 때마다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다’ 라고 한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전시 예술감독이 작업실을 와서 보고는 선생님 작업은 ‘진행중이다’라면서 새로운 작품을 토해내라 했다. 6개월간 외부와 단절하면서 자신의 작품에만 매진했다. 이 작품은 내 마지막 작품이라 하면서 계속 새로운 작품을 그려냈다. 그래서 지금 찬란한 빛이라고 한다. 태초의 빛을 가지고 나만의 찬란한 빛을 만든 것이다. 

사실 처음 털어놓는 얘기지만 이번 작품하는 동안 내가 많이 시달렸다. 작업하다 힘드니 내게 애기들이 엄마에게 하듯이 괴롭혔다. 평소에는 최고의 재료로 항상 좋은 것으로만 식사를 대접한다. 최상의 황제 대우를 해주다가도 작업할 때는 이혼할 수준으로 냉철하게 잘라버린다.(웃음)

우 화백은 화업 50년이다. 김관장이 지켜본 것은 25년이라 한다

우리 두사람 다 재혼을 했다. 처음 만날 당시에 나는 콜렉터였는데, 중간에 우 화백과 나를 을 잘 아는 분이 우리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줬다. 그때 이후 우 화백이 끊임없는 구애를 해왔다. 나를 좋아하는 지 전혀 몰랐는데 다른 사람과 선보고 준비를 하던 중에 소주 두잔에 넘어갔다.(웃음)당시 중견작가로만 알고 있었고 작업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너무 인품이 좋았다. 콩깍지가 씌여서 나중에 ‘존경한다’라고 까지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처음 우화백 집에 갔을 때 그렇게 좋아하셨다. 내가 어머니 16년을 모셨는데 시어머님과 내 아들이 4,5살 때 처음 만나 살았는데...시어머님과 바쁜 우리와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때도 치매걸린 시어머니와 손을 잡고 시어머니 방에 가서 누워서 얘기 나누고 놀아드리곤 했다. 너무 감사한 효자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헤어지지 말고 우리아들과 오래오래 살아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자. 천국에 자리 잡아놓고 있을테니”라는 유언을 남겼다. 시어머니와 서로 많이 사랑을 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유언을 상기시킨다. 

미술관 외관도 독특하고 디자인면에서도 뛰어나다

미술관을 지을 때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여러 건축가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승효상 선생에게 의뢰하기로 결정하고 서울 올라 가서 승 선생을 만났는데 첫 만남에 오케이를 했다. 승선생이 여기 현장을 와보고 작업실의 높이를 7미터나 올린 거 보고 놀라셨다. 이후 본격적을 미술관 설계를 맡은 승선생 아래 후배 건축사가 한 말이 10년을 앞선 안목이었다 하더라.

그리고 살림집을 함께 넣은 것은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선생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줘야겠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다. 24년을 출퇴근을 따로 하지 않았다. 작업실을 짓고 생활한 당시에는 돈이 없어 일부분만 짓고 한편은 정원으로 만들어 아주 예쁘게 잘 가꿨다. 광주시 예쁜정원상도 받고 어린이들이 견학과 소풍을 올 정도였다. 

그러다 그곳에다 지금의 브랜드 미술관을 짓고, 동서남북에서 해가 들어와서 24시간 해가지지 않는 미술관이다. 우제길의 설치작품으로 생각해서 설계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미술관은 우제길 선생이 조각도 많이 한 것처럼...이 작품이 해가지지 않는 빛의 미술관이다.

그래서 이 미술관은 우제길 설치작품안에서 우리가 인터뷰하는 것이다. 그걸 승효상 선생이 추상과 우제길의 설치미술을 염두해서 설계된 것이다. 전국의 건축학도 등 수없는 사람들이 미술관 견학이 발을 잇고 있다. 

미술관을 짓기까지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 

우 화백이 추상이 너무 빨리 했기에 그림이 안 팔리고 하다보니 3일간 라면만 먹은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 사실 내가 돈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우 화백을 만나 뒷받침을 하다 보니 많이 어려워진 것이었다.

다행이 우 화백과 결혼 전 소농장을 대규모를 하고 있었는데 운좋게도 IMF 직전에 처분을 하게 됐다. 그 돈을 종잣돈으로 작업실을 제대로 지어줘야 겠다 마음먹게 됐다. 우 선생이 작업을 너무 많이 하고 대작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큰 작업을 위한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큰 작업을 위해 7미터 고를 높였다.

암 수술을 3번이나 했다. 자궁암 수술한지 3일 후에 이곳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살았다. 우 화백을 만나기 전까지는 솔직히 남의 시선을 끌만큼 치장도 하고 다녔다. 당시 밍크코트를 발목뼈까지 오는 데까지 끌고 스카프하고 다니면 남자들이 지나가다 다들 돌아다 보기도 했다.(웃음) 그런데 미술관 짓느라고 소위 말하는 ‘몸빼’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니 주변에서 나를 ‘우화백에 미쳤다’고 둘 사이를 많이들 말렸다. 고생할 사람이 아닌데 고생을 사서한다는 거였다.

우 화백에게도 아트상품에 대한 애기를 들었는데 대단한 감각을 가진 거 같다

처음 만들 때는 우제길 작품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는데 이제는 큰 사업이 됐다. 작품이 작품을 받치는 결과가 됐다. 이전에 우화백의 작품을 두고 ‘연탄으로 그렸네, 자를 대서 그렸니’하면서 평가를 안 해줬다. 이후 아트상품으로 넥타이를 만들었더니 그것이 대성공이었다.

내가 우리나라 최초로 아트상품을 만들었다. 예전 우 화백에게 광주비엔날레서 작품 의뢰가 왔을 때 당시 지금의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만들어 최고작가로 인기상을 받았다. 그 당시 아트상품이 나오면서, MBC에서 외국작가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넥타이 스카프 등 1800만원어치를 구입해 갔다. 그 이후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때 스카프 1000장을 만들어 광주 시가지에 마구 뿌렸다. 아트사업에 보람이 있었길래 그에 대한 보답을 한 것이다. 여수엑스포 9년 동안 아트상품을 전속으로 계약해서 했다.

우제길 선생 작품이 좋으니 내년 세계수영선수권에 개페막식 등 전체 아트상품으로 다 들어간다. 신세계 by 우제길로 나간다. 대한민국 기관장들 중 우제길 넥타이 안 맨 사람 없을 정도다. 지금은 명품으로 20점 정도만 생산한다.

우제길 화백에게 바라는 소망은

현재 진행형인 작가다. 이제부터 더 굉장한 작품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본인도 그렇게 말한다. 마지막이라 하면서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솔직한 그동안의 말을 하자면 우 화백에게 교수직 제의도 오고 시립미술관장직 제의도 왔지만 우 화백이 거절했다. 자신은 이제 그림쟁이라면서.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많이 섭섭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우 화백은 99프로 100프로 작가다. 우리의 소망이라 할 수 있는데..우제길을 잘 아는 사람은 '우카소'라고도 한다. 서울대 홍대도 아니고 광주의 조선대를 나온 것도 아닌데. 우제길을 더 훌륭한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 화백은 전업작가로서 보기힘든 성공한 케이스로 된 사람이다. 나는 살아서 내 영광을 누리고 싶다. 이 사투를 벌일 때는 살아서 영광 보고 싶다는 것.  우 화백은‘내 머리를 다 뽑아서 당신 신발 삼아줘도 그 공을 다 표현못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아들도 남편도 다 성공시켰고, 나도 미술관 지어 관장하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범사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