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극단의 시대, 한국 춤의 向方
[성기숙의 문화읽기] 극단의 시대, 한국 춤의 向方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19.01.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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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무용평론가

기해년(己亥年) 새해가 밝았다. ‘세월이 쏜살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지 어느덧 3년째다. 知天命! ‘하늘의 뜻을 안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온다. 쉰 살에 하늘의 뜻을 깨우친 공자의 지혜가 집약된 문구여설까, 나 같은 범인도 지천명을 넘고 보니 인생의 희노애락을 ‘하늘의 뜻’으로 귀결 짓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쉰 길목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지천명’을 수없이 되뇌이곤 했다. 盡人事待天命! 매사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말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겪은 세찬 풍파를 이 문구를 좌우명삼아 돌파했다고나 할까. 내면 깊이 각인된 여섯 글자는 격랑 속 일상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으로 작동돼온 지 오래다. 
  
문득 무용계 중견세대 위치에 진입해 있음에 놀란다. 이른바 ‘허리’에 해당하는 위치이다. 사회적, 공적(公的) 책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학자로서, 평론가로서 신념에 찬 사회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 이유다. 다시 새해 벽두다. 지난 100년 한국(춤)의 역사를 반추해 본다. 

알다시피, 근대이후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 초고속 압축성장을 이뤘다.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일본지배를 벗어나 해방과 6·25 전쟁, 그리고 산업화·민주화시대를 관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질곡의 역사를 견디며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했고 경제적 풍요로움을 일궜으며 문화강국의 토대를 닦았다. 훌륭한 선조들이 애국심으로 헌신한 덕분이다.

대한민국이 성취한 지난 100년의 영광은 이름이 있든, 무명씨(無名氏)든 이 땅에서 낳고 자란 모든 선조들의 이른바 ‘영웅적’ 삶의 소산이리라.  

한국무용사의 지난 100년은 어떤 모습일까? 20세기 초반 문화계는 이른바 ‘서구적 충격’에 휩싸였다. 서구적 충격은 신무용(新舞踊)의 등장을 촉진했고, 본격 예술춤의 탄생을 예고한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는 ‘이상한 배를 타고 온, 이른바 ‘양(洋) 춤’의 전령사로서 이 땅에 신무용의 씨앗을 뿌렸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천재 무용가가 나타나 서구적 근대로의 편입을 주도한다. 타고난 재능과 빼어난 신체미를 자랑하는 최승희·조택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이시이 바쿠 문하에 입문,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다.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여 한국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지구촌 곳곳에 널리 알렸다. 한마디로 한류 열풍의 선두주자로 손색이 없다. 이로써 한국의 춤은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비로소 세계 보편사적 지형에 놓여지게 되었다.    

8·15 해방을 맞았으나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한국사회는 양분되기에 이른다. 극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조택원은 국내 무용계를 떠나게 된다. 당시 적지 않은 무용가들이 월북하자 무용계는 공백기에 처한다.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새 한국무용 건설을 위한 청년무용가들의 치열한 활동이 전개된다. 

척박한 토양에서 새로운 ‘공적(公的) 제도화’가 창출된다. 6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예컨대,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해 전통문화의 보전 전승의 길이 열렸다. 이화여대 무용과 창설을 기점으로 춤아카데미즘이 도래한다. 국립무용단 창단은 춤의 직업화를 앞당겼고 본격 극장예술춤으로 진화해가는 값진 발판이 되었다.

70년대 중반 한국무용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신무용이 퇴조하고 ‘한국창작춤’이라는 새로움 춤사조가 등장한다. 월간 『춤』지 창간으로 호사가적 취미에 머물던 무용비평이 독자적 영역으로 확립되고 창작과 비평의 긴장관계가 조성된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무용교류가 활성화되고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으로 춤의 창조성이 더 한층 화려하게 꽃피운다. 

90년대 초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개원은 문화계의 빅뉴스였다. 기존의 삼분법(한국무용·발레·현대무용)적 교육시스템을 탈피, 새로운 교육체계를 표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눈부신 성장세를 과시한다. 무용원 출신의 우수한 인적자원은 한국무용사의 지형변화를 견인하는 주역으로 우뚝 섰다. 희망을 품은 쾌속열차가 아닐까?

이러한 희망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춤의 향방을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극단으로 치닫는 형국이 안개 자욱한 모습이다.

역사학자 홉스 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 명명했다. 20세기 대한민국은 이웃나라에 의한 식민착취와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부(富)의 양극화 그리고 냉전이데올로기체제의 대리전이 된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프레임에 오래 동안 갇혀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촛불혁명으로 탄생된 문재인 정부가 어느덧 3년차의 길목에 서 있다. 지난 1년 6개월을 반추하건대, 아쉽게도 여전히 ‘극단의 시대’ 그 연장선상인 듯 싶다.

2년 전 겨울,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국정농단에 분노하여 무용계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상 초유의 블랙리스트 사건, 무형문화재 무용분야 보유자 인정예고와 연관된 불공정행정, 문예진흥기금 운용의 불합리한 집행 등 국가예술행정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를 우려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정부는 뭔가 다를 것이라 믿었다. 문화예술 행정의 전면 재검토와 혁명적 재설계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사건은 예술계를 만족시키지 못한 채 봉합되어 실망감을 안겨줬다.

무형문화재 무용분야 보유자 인정심사는 시험을 치른 지 4년이 경과한 현재까지도 결과 발표를 미룬 채 표류하고 있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행정 역시 눈에 띄는 변화는 특별히 감지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무용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첨예해지는 인상이다. 예컨대, 국립국악원무용단은 지도부의 갑질 논란으로 장기간 파열음을 내고 있다. 피해를 입었다는 단원들은 촛불혁명의 성지 광화문 광장으로 달려가 호소문을 냈고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국감에서도 다뤄졌다.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간주되는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소득 없이 무용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최근 이매방 삼고무 논란도 무용의 사회적 위상을 약화시키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이매방 유족 측이 작년 초 삼고무, 오고무, 대감놀이, 장검무 등 4종목의 춤을 저작권으로 등록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를 반대하는 제자들로 구성된 우봉이매방춤보존회 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어 광화문 광장 시위, 기자회견 등을 감행하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수습은커녕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양상이다. 

새해 벽두에 목도하는 무용사회의 난맥상은 철학자 하버마스가 지적한 시계 제로의 상황처럼 한국무용계의 가시거리를 대폭 축소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춤의 향방(向方)을 예단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