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테마기획]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 강인/문화예술평론가, 한국경제문화연구원 전문위원
  • 승인 2019.02.1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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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음악학교, 한국 최초의 야외 상설 연주회장, 한국 최초로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무대 팔각정

<사진 1>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군악대에 의해 최초로 연주된 후 찍은 기념사진(앞줄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군악대장 ‘백우용‘, 그 옆에 중절모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에케르트‘이다)

1904년에 조성된 탑골공원(사적354호)은 한국 근,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다. 

이곳은 서울의 가장 중심지인 종로 3가에 위치한 1만 5천여 제곱미터의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등의 소중한 유형 문화재와 여러 무형의 문화유산을 소유한 보고(寶庫)다.

아마도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은 거의 모든 국민이 알고 있지만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국보 제2호인 것과, 그것이 탑골공원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탑골’이라는 명칭도 당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백탑(白塔)’이라 불렀던 원각사지 10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귀중한 사적지인 탑골공원이 수난과 오욕을 동반한 역사적 변천과,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그 빛을 잃은 채 홀대받는 ‘잡(雜)골’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본래 고려시대에 세운 ‘흥복사(興福寺)’를 조선시대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였고 그 후 연산군에 의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으로, 조선후기 한 때는 지식인이 모이던 장소로, 대한제국시대에는 고종황제의 명(命)으로 지정된 최초의 서양식 도심공원으로, 일제강점기인 기미년(1919년)에는 3,1운동의 발상지로, 또한 일본 총독부에 의해 ‘승리(勝利)’라는 이름의 요정(料亭)으로 사용되는 등 숱한 변천을 거듭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탑골공원은 각종 잡다한 변화들이 끊이지 않았다.

1956년에는 공원 안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4.19 혁명 이후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어 종로거리를 끌려 다니는 참상을 겪었으며,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3,1운동 기념탑’을 세우고 ‘삼일문’이라는 자신의 친필 현판을 남문(南門) 출입구 상단에 부착했으나 기념탑은 1979년 신군부에 의해, 현판은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에 의해 새벽녘에 기습적으로 철거되었다. 그 후 지금의 ‘삼일문’ 현판은 ‘독립선언서’ 원문에 쓰인 글씨체로 바꾸어 부착해 놓은 것이다.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원 담장의 절반을 헐어 북서쪽과 동쪽 일부지역을 둘러싼 말발굽 모양으로 2층의 상가건물을 건립하였는데, 이 상가가 이른바 ‘파고다아케이드’로서 탑골공원 주변은 종로 최대의 상업지구로 변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공원은 전체면적의 1/4이 도로확장으로 잘려나가고 동서남북 4문 중 동서북 3문이 폐쇄된 채 ‘남문’만 원래의 자리를 옮겨 개방됨으로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탑골공원은 흉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파고다아케이드는 1983년 사적지의 경관(景觀)과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 이후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탑골공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며 이곳은 노년층의 휴식 전유공간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일명 ‘박카스아줌마’가 활보하는 노인퇴폐의 온상으로서 젊은이들과 수준 있는 시민은 물론 인근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까지도 기피하는 부끄러운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産室)
 
앞서 탑골공원의 변천사를 요약해서 살펴보았다. 

탑골공원이 우리민족에게 소중한 무형의 정신적 유산인 것은 이곳이 3,1운동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탑골공원은 민족정기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탑골공원의 역사적 기억을 3,1운동의 발상지에 국한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도 이곳의 성격을 ‘독립유적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탑골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간과하는데서 오는 관념적 오류이다.

서양음악의 전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국민들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국보 제2호인 것과 그것이 탑골공원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듯이 아마도 탑골공원이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전래된 것은 1892년 고종황제를 통한 대한제국 군악대 설치령에 의해서이다. 당시 일본의 세력은 조선의 명성황후 시해 후 더욱 고종을 압박하였고 이에 대한 친러(親露) 세력의 반발로 결국 고종은 거처를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 파병 요청을 위해 러시아로 ‘충무공 민영환’ 특사 일행을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민영환은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를 보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을 제안, 허락을 받으므로 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59호’에 의해 역사적인 대한제국 군악대가 탄생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로 이 땅에 서양음악의 씨앗을 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잊을 수 없는 은인 ‘프란츠 에케르트’

<사진 2> 프란츠 에케르트

이에 따라 군악대를 이끌어갈 인물로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를 초빙하기로 결정, 당시 외무대신 ‘박제순’이 서울에 주재하던 독일영사 ‘하인리히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를 찾아가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에케르트는 1901년 2월 19일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도착, 같은 해 4월 5일 군악대 교사로 3년간 고용계약을 맺었다.

프로이센(Preussen) 왕립 악단장을 지낸 에케르트는 앞서 독일 해군 군악대 지휘자로 근무하던 시절인 1879년, 일본에 파견되어 서양음악을 전해주었다. 특히 일본 군악대와 황궁의 고전음악부를 위해 일했으며 도쿄의 황실 가족들을 위한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지도하였고 초등학교를 위한 음악도서들을 편찬했다. 

더욱이 특기할만한 것은 1880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작곡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시 대한제국에도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고종의 초청에 의해 가족과 함께 내한하면서 50인조의 군악대가 사용할 각종 관악기, 타악기들을 가지고 왔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악대 창설은 물론 한국인에게 서양음악을 전수함으로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1902년에는 고종의 요청으로 최초의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친북 작곡가 ‘윤이상’도 에케르트가 군악대원으로 선발하여 가르친 제자 중 한명인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으로부터 1933년부터 2년간 화성학, 대위법 등 음악이론을 배운바 있다.

만일 프란츠 에케르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음악계의 오늘날과 같은 발전과, 음악을 통해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을까? 

특히 1907년 군대해산에 따라 군악대도 해산 되었지만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민간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양악대를 만들어 지속적인 공연활동을 전개했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한국음악계를 위해 헌신하다가 위암으로 투병 중 1916년 8월 6일 타계, 평소 본인의 희망대로 한국 땅에 묻힌 우리 음악계의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악계은인(樂界恩人)의 장서(長逝)”라는 제하의 애도기사(1916년 8월 8일자)를 게재하기도 했다.

<사진 3> 당시 매일신보 기사(1916년 8월 8일자)

순종황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거금 100원을 하사했고 장례식은 그가 직접 조직하여 지도하던 악단의 연주 속에 명동성당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동양에서 최초로 활동했던 일본보다 한국을 특별히 사랑했던 프란츠 에케르트는 자신 뿐 아니라 딸의 가족과 손녀 까지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을 위해 그들의 삶을 바쳤다. 

딸 ‘아멜리에(Amelie Eckert)’와 결혼한 사위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은 당시 경성제대 프랑스어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그도 사후 에케르트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으며,  6,25전쟁 때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국제사회의 중재로 풀려난 외손녀 ’임마꿀라따(Immaculata Martel)’ 수녀는 독일로 귀환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대구 성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사역 중 81세 노환으로 1988년 12월 5일 선종하였다.

<사진 4> “한국에 바친 3대” 제하의 한국일보 기사(1968년 8월 10일자)

이렇듯 프란츠 에케르트는 3대에 걸쳐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서 우리 음악인은 물론 국민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다. 

국내 최초의 음악학교 개설

고종은 황실군악대 육성을 위해 탑골공원 서북쪽 부지에 별도의 건물을 짓도록 명(命)하고 그곳에서 에케르트로 하여금 서양음악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였다. 

에케르트는 여기서 당초 27명의 군악대원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전에는 음악이론과 악보 보는 법을 교육받았으며 오후에는 악기 연주법 습득을 위해 맹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군악대는 약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01년 9월 7일, 고종의 50회 생신인 만수성절(萬壽聖節)에 경운궁에서 연주함으로 외교사절들의 극찬가운데 서양음악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일한 영문 잡지인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는 “이번 축하연에는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였는데,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난 9월 7일 아침 궁정에 참석한 외국 손님에게 특히 기억될만한 순서는 새로 조직된 군악대의 첫 출연이었다. 이 악대는 에케르트 박사의 지도로 훈련을 받았으며 총 27명의 대원으로 단지 4개월 남짓의 연습으로 외국악기를 그렇게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 밖의 효과를 내었으며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박수갈채는 그칠 줄 몰랐으며 이대로만 간다면 머지않아 동양에서 경쟁할 다른 악대가 없을 것이다”라는 기사로 이날 연주에 대한 모습을 전했다.

더욱이 군악대의 당시 연주에 대한 평가는 영국 런던타임스의 ‘헐버트(H. B. Hulbert)’ 기자가 보도한 “조선은 음악천재”라는 제하의 “조선의 군악대는 설립된 지 불과 몇 해밖에 되지 않아 그 학습한 곡종(曲種)은 많지 않으나 주법(奏法)은 영국의 빅토리아 군악대나 미국의 수사군악대 보다 못하지 아니하다.”라는 호평의 기사(동아일보 1924년 3월 4일자)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사진 5> 당시 동아일보 기사 (1924년 3월 4일자)

또한 러일전쟁 직전 궁중 연회석상에서 일본 대리공사 ‘하야시’는 러시아의 ‘바울’ 공사에게 “조선사람과 일본사람을 비교하면 누가 음악적으로 우수한가? 라고 질문했을 때 바울 공사는 ”조선사람의 음악적 재질은 동양 제일이라 일본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당시의 평가를 감안할 때 현재 우리나라 음악인들의 세계무대 제패가 우연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1907년 8월 1일, 군악대는 해산되었지만 같은 해 9월 1일 악사 101명의 황실음악대로 재조직, 궁내부 장례원에 편입되었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에 의해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면서 장례원 소속 음악대는 이왕직(李王職)악대로 부속되었으나 고종이 사망한 해인 1919년 9월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양악대는 같은 해 10월, 부지휘자 격에 있었던 ‘백우용(白禹鏞)’을 중심으로 ‘경성양악대(京城洋樂隊)’라는 이름의 민간단체로 재탄생,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강당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가진 이후 1920년 6월 1일부터 시민을 위한 연주회가 탑골공원에서 매주 한 번씩 저녁시간에 열리게 되었다. 

이 경성양악대는 국내 최초의 민간오케스트라로서 우리나라 교향악단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려교향악단’(1945년 10월 창단)에 이어 3년 뒤인 1948년 말에 창단된 ‘서울시립교향악단(Seoul Philharmonic Orchestra)’의 모체인 것이다.

국내 최초의 서양음악 상설공연장

앞서 만수성절 경운궁에서의 연주회가 많은 외교사절들의 호평으로 황실군악대의 위상이 높아지자 고종은 탑골공원 내에 황실군악대 상설 야외공연장 건립에 대한 계획과 함께 연주무대로 사용될 ‘팔각정’이 세워지게 된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인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가 1903년 10월경 직접 촬영한 팔각정의 모습이 거의 완공단계였던 것으로 보아 완공 시기는 1904년 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6>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가 1903년 촬영한 완성 전의 팔각정 모습
 
팔각정 완공 후 언제부터 공개연주회가 열렸는지, 또한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당시 군악대의 연주회는 황실전용으로 정부 관료들과 외국인들에게만 공개되었으나 1920년 6월 1일부터 열렸던 경성양악대의 연주는 모든 시민에게 공개하는 연주회로 열리게 되었다. 이렇듯 탑골공원에서 매주 열리는 서양음악연주회는 당시 일본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암울한 시민들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탑골공원에서 최초로 울려 퍼진 대한제국 애국가

<사진 7> 1902년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표지

1902년 고종의 요청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라고 시작되는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가 작곡자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음악감독 하에 군악대장 백우용이 지휘하는 대한제국 황실군악대의 연주에 의해 울려 퍼지며 우방국들에게 배포되었다. 이에 대한 공로로 에케르트는 고종황제로부터 ‘태극 3등급 훈장’을 받게 된다. 

이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몇 해 지나지 않아 1910년 한일합방으로 금지곡이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자국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곡을 계속 애국가로 불렀다. 

아이러닉하게도 이 일본의 국가 역시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일본은 외국인이 작곡한 국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국인 ‘안창호’에 의해 작곡된 곡을 애국가로 지정하여 부르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로 여겨진다.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 외에도 <대한민국 행진곡>, <천동초목> 등의 작품을 남겨놓았다.

최초의 음향공학(音響工學)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인 ‘팔각정’

<사진 8> 지금의 팔각정 모습
<사진 9>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팔각정 지붕 모습

1903년 탑골공원을 황실군악대의 상설공연장으로 결정한 후 ‘팔각정’을 연주무대로 지을 것을 황실로부터 제안 받고 당시 음향공학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건축가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은 그의 건축경험을 토대로 탑골공원 야외공연장에 걸맞는 건축양식으로 팔각정을 설계, 건축하였다. 

그는 재래식 목조건축 양식과 서양식 석조건축 양식을 두루 연구한 당대 희유(稀有)의 건축가로서 이미 1886년 고종 황제로 부터 교명(校名)을 받은 서소문 소재 배재학당(培材學堂)의 동관, 서관, 강당건물을 서양식으로 건축하였고 독립문, 그리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를 건축한 장본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마이크나 확성기가 개발되기 이전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 건축시  넓은 공간에서 육성으로 내는 소리가 어떻게 퍼져나가야 하며, 어떤 울림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음향공학의 개척자였다.

음향효과란 단순히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얼마나 디테일(Detail)이 살아있는 양질의 울림을 전해주느냐가 관건이다. 1890년부터 1904년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일했던 러시아 출신의 건축 기사인 ‘사바틴(Ivanovich Sabatin)’으로부터 서양 건축양식에 대한 설계정보들을 수집한 심의석은 음향의 절대적인 효과는 팔(八)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음파에 있다는데 대한 연구에 깊이 몰입하였다. 

그는 팔각정 지붕의 음향효과를 위한 목재로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사용했다. 즉 8면의 한 면마다 6개의 단단한 소나무 기둥으로 배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양질의 울림을 지닌 단풍나무를 배치한 것은 음을 반사해내는 음향판(音響板)으로 고안한 것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노의 향판이나, 현악기를 제작할 때, 주로 울림이 좋은 단풍나무를 사용하고 있다. 

마이크나 확성기가 없었던 시기에 육성이나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이처럼 음향판 역할을 하는 지붕을 통해 팔방향으로 골고루 퍼져나가도록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무대가 탑골공원의 팔각정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탑골공원의 팔각정이 남산공원의 팔각정이나 세계 각국 도시 중심에 확성기를 통한 야외공연을 위해 세워놓은 팔각정과 같은 단순 한 건축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인지 정부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각정의 성격을 일반 정자(亭子)로 규정해놓고 있다. 

이 팔각정은 할 일없는 노인들이 앉아 장기나 두며 소일하는 정자가 아니라 100여 년 전 음향공학을 도입해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음악무대로서, 민족슬기의 소중한 과학적 산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Ⅱ문화예술 공간으로의 역사적 재정립

그동안 탑골공원은 역사를 잃고 헤매왔다. 그러기에 이곳이 정권에 따라 특정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끌어내려졌고, 정문에 현판 휘호가 부착되었다가 떨어지며, 소중한 사적을 훼손하는 상업적 구조물이 들어섰다가 철거되는 등 볼썽사나운 ‘잡(雜)골‘의 모습을 보여 왔다.

이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맞추어 추진되는 재정비 계획도 탑골공원의 역사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사찰로 복귀할 것인가, 기생방이나 요정 등 유흥업소, 혹은 상권 활성화 지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3,1운동의 성지(聖地)로 국한시켜 보존할 것인가?

어찌 보면 탑골공원의 모든 과거가 항일역사에 매몰되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탑골공원의 재정비 계획도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맞추어 추진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명시되었듯이 상해임시정부 출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의거로 민족적 정기를 드높인 위대한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 후손들은 이 정신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탑골공원의 역사적 성격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발상이다.

최근 ‘ㅈ’일보 기사(2018년 8월 15일자)에 언급한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이나 관계기관 인사들의 조언 중에는 이곳을 3,1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공원 안에 “민족지도자 33인의 수를 상징하는 33개의 가변형(可變型) 의자 설치”, “과거 3,1운동에 참여한 모든 고을의 이름을 새겨 민족의 광범위한 참여 강조”나 심지어는 “일본이 과거사를 사과하는 이벤트로 일본의 유명 조각가가 위안부상을 제작해 기증하는 방법”이라는 비현실적 제안을 하는 분도 있다. 이는 한일관계를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하여 적대감만 키울 뿐이다. 

과거 일제 36년간의 아픈 역사와 이에 항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민족정신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감정이 앞서거나, 더욱이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적 의도의 개입으로 현재와 미래의 국익을 위한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의 평화가 남북 간의 화해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글로벌 시대에 이웃국가, 세계 모든 국가와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계획서를 보면 “3,1운동의 정신은 평화적 공존과 상생의 모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탑골공원이 3,1운동에 관한 외형적 시설확충으로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보다는 음악적,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민족의 선진적 우월성을 국내외에 드러내고 일제의 암울한 삶속에서 서양음악 연주회를 통해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장소, 모여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과거 시절 문화예술의 장소로 되돌아가 그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소중한 무형의 역사를 재현함으로 평화를 위한 ‘역사문화예술공간’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Ⅲ새로운 변화를 위한 구체적 제안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 최초의 서양음악 상설 야외공연장, 최초로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인 ‘팔각정’ 등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애국가가 서양 악기 연주에 의해 최초로 울려 퍼진 역사적 장소이다.

특히 100여 년 전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서양음악 연주회가 공개리에 열렸던 것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로 아시아 국가는 물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역사로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역사성을 회복하여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진다.

이를 위해 정부의 지원과 음악계와의 협력이 절실하며 이러한 공익적 사명을 이루려 함에 있어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기연주회 재현(再現)

탑골공원 주변은 젊은이(외국어 학원가), 노인(휴식처), 외국인 관광객(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음악인 및 음악애호가(낙원동 악기상가) 등 유동인구가 밀집된 곳으로 이곳에서의 과거 행해졌던 연주회의 재현은 각계각층의 시민이 동참하는 고상한 문화예술의 명소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횟수는 과거의 시행방식과 동일하게 주 1~2회로 하며 동절기를 제외한 4월부터 10월까지 실시한다.

공연내용은 기악(독주, 현악합주, 관악합주, 오케스트라 등), 성악(독창, 중창, 합창), 소극장용 오페라, 국악, 무용, 연극 등이다.

보조시설로는 보조무대와 조명, 음향보조시설 등과 평소 이를 보관할 창고 등의 설치가 요구된다. 

프란츠 에케르트 동상 건립하고 ‘기념사업회’ 결성

이곳에 한국음악계의 은인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동상을 건립하여 음악계를 중심으로 음악애호가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프란츠 에케르트 기념사업회’를 결성,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이미 일본은 에케르트의 고향인 옛 프로이센 지방<현, 발덴부르크 노이로데>에 동상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한, 독 문화교류의 장소

이곳에서 매년 프란시스 에케르트 기일(忌日)에 주한독일대사관과 함께 경모(敬慕)대회를 실시하며 한독수교일에 양국의 음악인을 교환, 기념연주회를 개최하여 한독문화교류의 증진을 꾀한다.

일본인들의 관광의 장소

프란츠 에케르트는 일본 국가(國歌)인 ‘기미가요’의 작곡자이다. 기미가요는 그들의 국기(國旗)인 ‘히노마루(日章旗)’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양대 상징이었다. 한때 군국주의의 강화로 일본 지도자들 중에는 자국의 국가가 외국인에 의해 작곡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기미가요의 작곡자인 에케르트의 무덤이 이웃나라 한국에, 그것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것을 아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양화진에 소재한 에케르트의 무덤과 그의 동상이 세워진 탑골공원을 일본인에게 관광코스로 개발하는 것은 관광산업 측면이나 한일 우호증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단합과 발전의 중심지가 되기를...

탑골공원은 우리 음악계의 본가(本家)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음악계는 시쳇말로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그야말로 죽은 음악인의 사회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 면에서 음악인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은 각자 모래와 같이 빛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는 문화예술의 햇살이 비칠 때뿐이다. 해가지면 그 빛을 잃는다. 지금과 같이 해가 져버린 시대에는 음악인이 단합해야 소생과 발전을 통해 음악계 본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탑골공원이 음악인을 하나로 묶는 시멘트 역할을 함으로 음악계의 단합과 발전의 콘크리트 같은 영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맺는 글

일찍이 영국의 ‘처칠’ 수상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인 탑골공원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이토록 홀대받고 있는 원인은 ‘역사를 잊은 것’이 아니라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거나 ‘음악 경시풍조에 의한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이는 ‘몰랐다’면 무지의 소치이고 ‘경시했다’면 문맹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나무도 뿌리가 튼실해야 잎이 무성하고, 꽃이 만발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뿌리가 되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실로 한 국가사회에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함을 감안할 때 이제라도 탑골공원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역사를 재정립하여 탑골공원이 팔각정을 중심으로 상설 야외연주회의 재현과 문화예술인 및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여 건전한 문화적 활동이 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탈바꿈 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기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탑골공원의 재정비 계획을 맡은 서울특별시와 종로구청, 문화재청 그리고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등 정부 관계기관에 의해 성숙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