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2)
[테마기획] 탑골공원, 홀대받는 서양음악의 산실(2)
  • 강인/문화예술평론가,한국경제문화연구원 전문위원
  • 승인 2019.02.1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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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서양음악 상설공연장

앞서 만수성절 경운궁에서의 연주회가 많은 외교사절들의 호평으로 황실군악대의 위상이 높아지자 고종은 탑골공원 내에 황실군악대 상설 야외공연장 건립에 대한 계획과 함께 연주무대로 사용될 ‘팔각정’이 세워지게 된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인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가 1903년 10월경 직접 촬영한 팔각정의 모습이 거의 완공단계였던 것으로 보아 완공 시기는 1904년 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가 1903년 촬영한 완성 전의 팔각정 모습

팔각정 완공 후 언제부터 공개연주회가 열렸는지, 또한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당시 군악대의 연주회는 황실전용으로 정부 관료들과 외국인들에게만 공개되었으나 1920년 6월 1일부터 열렸던 경성양악대의 연주는 모든 시민에게 공개하는 연주회로 열리게 되었다.

이렇듯 탑골공원에서 매주 열리는 서양음악연주회는 당시 일본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암울한 시민들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탑골공원에서 최초로 울려 퍼진 대한제국 애국가

▲ 1902년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표지

1902년 고종의 요청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라고 시작되는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가 작곡자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음악감독 하에 군악대장 백우용이 지휘하는 대한제국 황실군악대의 연주에 의해 울려 퍼지며 우방국들에게 배포되었다. 이에 대한 공로로 에케르트는 고종황제로부터 ‘태극 3등급 훈장’을 받게 된다.

이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몇 해 지나지 않아 1910년 한일합방으로 금지곡이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자국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곡을 계속 애국가로 불렀다.

아이러닉하게도 이 일본의 국가 역시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일본은 외국인이 작곡한 국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국인 ‘안창호’에 의해 작곡된 곡을 애국가로 지정하여 부르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로 여겨진다.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 외에도 <대한민국 행진곡>, <천동초목> 등의 작품을 남겨놓았다.

최초의 음향공학(音響工學)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인 ‘팔각정’

▲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팔각정 지붕 모습

 

▲ 지금의 팔각정 모습

1903년 탑골공원을 황실군악대의 상설공연장으로 결정한 후 ‘팔각정’을 연주무대로 지을 것을 황실로부터 제안 받고 당시 음향공학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건축가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은 그의 건축경험을 토대로 탑골공원 야외공연장에 걸맞는 건축양식으로 팔각정을 설계, 건축하였다.

그는 재래식 목조건축 양식과 서양식 석조건축 양식을 두루 연구한 당대 희유(稀有)의 건축가로서 이미 1886년 고종 황제로 부터 교명(校名)을 받은 서소문 소재 배재학당(培材學堂)의 동관, 서관, 강당건물을 서양식으로 건축하였고 독립문, 그리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를 건축한 장본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마이크나 확성기가 개발되기 이전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 건축시 넓은 공간에서 육성으로 내는 소리가 어떻게 퍼져나가야 하며, 어떤 울림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음향공학의 개척자였다.

음향효과란 단순히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얼마나 디테일(Detail)이 살아있는 양질의 울림을 전해주느냐가 관건이다. 1890년부터 1904년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일했던 러시아 출신의 건축 기사인 ‘사바틴(Ivanovich Sabatin)’으로부터 서양 건축양식에 대한 설계정보들을 수집한 심의석은 음향의 절대적인 효과는 팔(八)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음파에 있다는데 대한 연구에 깊이 몰입하였다.

그는 팔각정 지붕의 음향효과를 위한 목재로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사용했다. 즉 8면의 한 면마다 6개의 단단한 소나무 기둥으로 배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양질의 울림을 지닌 단풍나무를 배치한 것은 음을 반사해내는 음향판(音響板)으로 고안한 것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노의 향판이나, 현악기를 제작할 때, 주로 울림이 좋은 단풍나무를 사용하고 있다.

마이크나 확성기가 없었던 시기에 육성이나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이처럼 음향판 역할을 하는 지붕을 통해 팔방향으로 골고루 퍼져나가도록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무대가 탑골공원의 팔각정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탑골공원의 팔각정이 남산공원의 팔각정이나 세계 각국 도시 중심에 확성기를 통한 야외공연을 위해 세워놓은 팔각정과 같은 단순 한 건축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인지 정부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각정의 성격을 일반 정자(亭子)로 규정해놓고 있다.

이 팔각정은 할 일없는 노인들이 앉아 장기나 두며 소일하는 정자가 아니라 100여 년 전 음향공학을 도입해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음악무대로서, 민족슬기의 소중한 과학적 산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Ⅱ문화예술 공간으로의 역사적 재정립

그동안 탑골공원은 역사를 잃고 헤매왔다. 그러기에 이곳이 정권에 따라 특정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끌어내려졌고, 정문에 현판 휘호가 부착되었다가 떨어지며, 소중한 사적을 훼손하는 상업적 구조물이 들어섰다가 철거되는 등 볼썽사나운 ‘잡(雜)골‘의 모습을 보여 왔다.

이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맞추어 추진되는 재정비 계획도 탑골공원의 역사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사찰로 복귀할 것인가, 기생방이나 요정 등 유흥업소, 혹은 상권 활성화 지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3,1운동의 성지(聖地)로 국한시켜 보존할 것인가?

어찌 보면 탑골공원의 모든 과거가 항일역사에 매몰되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탑골공원의 재정비 계획도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맞추어 추진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명시되었듯이 상해임시정부 출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의거로 민족적 정기를 드높인 위대한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 후손들은 이 정신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탑골공원의 역사적 성격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발상이다.

최근 ‘ㅈ’일보 기사(2018년 8월 15일자)에 언급한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이나 관계기관 인사들의 조언 중에는 이곳을 3,1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공원 안에 “민족지도자 33인의 수를 상징하는 33개의 가변형(可變型) 의자 설치”, “과거 3,1운동에 참여한 모든 고을의 이름을 새겨 민족의 광범위한 참여 강조”나 심지어는 “일본이 과거사를 사과하는 이벤트로 일본의 유명 조각가가 위안부상을 제작해 기증하는 방법”이라는 비현실적 제안을 하는 분도 있다. 이는 한일관계를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하여 적대감만 키울 뿐이다.

과거 일제 36년간의 아픈 역사와 이에 항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민족정신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감정이 앞서거나, 더욱이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적 의도의 개입으로 현재와 미래의 국익을 위한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의 평화가 남북 간의 화해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글로벌 시대에 이웃국가, 세계 모든 국가와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계획서를 보면 “3,1운동의 정신은 평화적 공존과 상생의 모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탑골공원이 3,1운동에 관한 외형적 시설확충으로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보다는 음악적,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민족의 선진적 우월성을 국내외에 드러내고 일제의 암울한 삶속에서 서양음악 연주회를 통해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장소, 모여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과거 시절 문화예술의 장소로 되돌아가 그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소중한 무형의 역사를 재현함으로 평화를 위한 ‘역사문화예술공간’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Ⅲ새로운 변화를 위한 구체적 제안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교, 최초의 서양음악 상설 야외공연장, 최초로 음향공학에 의해 건축된 야외무대인 ‘팔각정’ 등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애국가가 서양 악기 연주에 의해 최초로 울려 퍼진 역사적 장소이다.

특히 100여 년 전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서양음악 연주회가 공개리에 열렸던 것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로 아시아 국가는 물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역사로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역사성을 회복하여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진다.

이를 위해 정부의 지원과 음악계와의 협력이 절실하며 이러한 공익적 사명을 이루려 함에 있어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기연주회 재현(再現)

탑골공원 주변은 젊은이(외국어 학원가), 노인(휴식처), 외국인 관광객(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음악인 및 음악애호가(낙원동 악기상가) 등 유동인구가 밀집된 곳으로 이곳에서의 과거 행해졌던 연주회의 재현은 각계각층의 시민이 동참하는 고상한 문화예술의 명소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횟수는 과거의 시행방식과 동일하게 주 1~2회로 하며 동절기를 제외한 4월부터 10월까지 실시한다.

공연내용은 기악(독주, 현악합주, 관악합주, 오케스트라 등), 성악(독창, 중창, 합창), 소극장용 오페라, 국악, 무용, 연극 등이다.

보조시설로는 보조무대와 조명, 음향보조시설 등과 평소 이를 보관할 창고 등의 설치가 요구된다.

프란츠 에케르트 동상 건립하고 ‘기념사업회’ 결성

이곳에 한국음악계의 은인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동상을 건립하여 음악계를 중심으로 음악애호가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프란츠 에케르트 기념사업회’를 결성,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이미 일본은 에케르트의 고향인 옛 프로이센 지방<현, 발덴부르크 노이로데>에 동상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한, 독 문화교류의 장소

이곳에서 매년 프란시스 에케르트 기일(忌日)에 주한독일대사관과 함께 경모(敬慕)대회를 실시하며 한독수교일에 양국의 음악인을 교환, 기념연주회를 개최하여 한독문화교류의 증진을 꾀한다.

일본인들의 관광의 장소

프란츠 에케르트는 일본 국가(國歌)인 ‘기미가요’의 작곡자이다. 기미가요는 그들의 국기(國旗)인 ‘히노마루(日章旗)’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양대 상징이었다. 한때 군국주의의 강화로 일본 지도자들 중에는 자국의 국가가 외국인에 의해 작곡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기미가요의 작곡자인 에케르트의 무덤이 이웃나라 한국에, 그것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것을 아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양화진에 소재한 에케르트의 무덤과 그의 동상이 세워진 탑골공원을 일본인에게 관광코스로 개발하는 것은 관광산업 측면이나 한일 우호증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우리나라 음악계의 단합과 발전의 중심지가 되기를.....

탑골공원은 우리 음악계의 본가(本家)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음악계는 시쳇말로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그야말로 죽은 음악인의 사회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 면에서 음악인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은 각자 모래와 같이 빛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는 문화예술의 햇살이 비칠 때뿐이다. 해가지면 그 빛을 잃는다. 지금과 같이 해가 져버린 시대에는 음악인이 단합해야 소생과 발전을 통해 음악계 본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탑골공원이 음악인을 하나로 묶는 시멘트 역할을 함으로 음악계의 단합과 발전의 콘크리트 같은 영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맺는 글

일찍이 영국의 ‘처칠’ 수상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산실인 탑골공원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이토록 홀대받고 있는 원인은 ‘역사를 잊은 것’이 아니라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거나 ‘음악 경시풍조에 의한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이는 ‘몰랐다’면 무지의 소치이고 ‘경시했다’면 문맹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나무도 뿌리가 튼실해야 잎이 무성하고, 꽃이 만발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뿌리가 되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실로 한 국가사회에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함을 감안할 때 이제라도 탑골공원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역사를 재정립하여 탑골공원이 팔각정을 중심으로 상설 야외연주회의 재현과 문화예술인 및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여 건전한 문화적 활동이 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탈바꿈 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기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탑골공원의 재정비 계획을 맡은 서울특별시와 종로구청, 문화재청 그리고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등 정부 관계기관에 의해 성숙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