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그래, 이게 바로 창극이야 “내 이름은 사방지”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그래, 이게 바로 창극이야 “내 이름은 사방지”
  •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 승인 2019.03.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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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연출가

‘내 이름은 사방지’(이하 ‘사방지’)를 보았습니다. 이틀간 공연했고, 이틀을 봤습니다. 이틀만 공연하는 게 매우 아쉽습니다. 앞으로 여러 날 공연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창극이야.’ 작품을 보면서 여러 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평론계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성구 작가와 주호종 연출을 그간 중요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에 반성도 하게 됐습니다.

‘사방지’는 창극입니다. 창극은 판소리를 기본으로 해서 전개해가는 음악극이죠. 그런데 그간 판소리를 간과한 창극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대본도 문제고, 연출도 문제였습니다. 그간 자신이 활동했던 분야에서 익숙했던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의 방식을 그래도 가져와서, 거기에 그저 판소리가 입혀지는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얘기일까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습니다. 타 분야에서 주목받은 연출가의 이름 덕분에, 평소에 관심이 없던 관객들을 창극을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주었지요. 하지만 이젠 그들이 만든 그런 창극에 좀 지치고야 말았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작품은 ‘창극이라 부를 없는 창극’입니다.

비록 작가와 연출이 창극을 몰랐다손 치더라도, 국립창극단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창극 혹은 새로운 창극에 접근하고자 했던 작품도 없진 않았습니다. 창극단 단원과 새로운 연출이 예술적 협력관계로서 조화로운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보이는 창극도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외부연출가와 국립창극단이 서로 ‘윈–윈’한 결과였지요.

국립창극단의 김성녀 예술감독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 겁니다. 예술감독의 안목으로, 창극의 외연을 넓힌 작품이 많아진 것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젠 많은 사람이 ‘창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창극’이 앞으로 더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판소리의 ‘소리’을 알고, 창극의 ‘판’을 아는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창극이 만들어져야 할 시점입니다.

‘사방지’는 ‘창극다운 창극’이었습니다. 여기서 제 말이 참 어폐(語弊)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창극다운 창극’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건, 그간 이런 작품이 꽤 많았기 때문이지요. ‘사방지’는 그간의 창극을 보면서 느낀 아쉬움을 해소하고, 앞으로 창극이 갈 한 방향의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통의 창극을 알고, 미래의 창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이 보였습니다.

이 창극이 앞으로 꼭 다시 공연될 것을 확신하면서, 평론가로서의 더 세세한 작품분석은 그 때로 미루려 합니다. 여기서는 이 작품의 가치와 가능성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실존했다는 ‘사방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죠? 사방지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죠. 1988년, 송경식 감독의 작품입니다. 창극 ‘사방지’는 접근방법을 달리합니다. 한국사회가 비교적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면서, 차이와 차별에 관한 구분은 이제 일상적으로 듣게 됩니다. 사성구의 대본은, 이것을 넘어서서 ‘차이’를 ‘차별’로 만들게 하는 ‘권력’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사성구 작가님! 사방지를 보면서, 사방지를 읽어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구요? 사방지라는 공연을 보면서, 마치 조선시대의 고전문학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비유컨대, 김만중의 구운몽처럼, 사성구의 사방지가 이미 있었던 것처럼 다가왔습니다. 매우 흥미진진했습니다. 사성구는 한 시대를 바라보는 안목이 있고, 또 다른 시대에서 해결해야 할 혜안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방지’를 읽어내려가는 기쁨과 흥분을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부족한 글솜씨로는 그저 중언부언하게 되네요. 마치 우리보다 이전 시대에 ‘시대를 앞선’ 어느 출중한 문사(文士)가 붓글씨로 정성스럽게 채워간 소설집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신분은 숨기고, 청계천으로 나아가는 전기수에게 은밀하게 적어준 필사본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판소리의 존재 양상 중의 하나가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것인데, 사성구의 대본은 우리나‘판소리계 소설’의 계보를 당당하게 잇는 작품이었습니다.

주호종연출님! 이렇게 극본 얘기만을 하면, 연출이 섭섭할까요? 그건 더욱 아닙니다. 주호종 연출은 창극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연출이었습니다. 실제 오랫동안 판소리를 배우고 학습했고,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경험과 외부에서 많은 창극을 연출하면서 쌓아온 역량이 이 작품에 녹아있었습니다.

이 연출가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극을 만드는 요소가 ‘대본’과 ‘소리’에 근거해서 연출된다는 점입니다. 이게 참 다른 연출가 다릅니다. 그간의 몇몇 연출들은 이미 자신의 머리에 있거나, 이미 해왔던 스타일을 판소리와 창극에 적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색하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던 것이죠. 주호종 연출과 여려 연출가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음악극이 그렇듯이, 기획 대본 연출 배우 무대 의상 음악 조명 등이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이 작품은 제가 근년에 본 여러 음악극 중에서, 이런 극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매우 조화롭게 살아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모든 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소리’를 기본에 두고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주호종 연출과 다른 연출을 ‘차이’를 얘기할 수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판소리계 소설과 같은 ‘대본’과 창극의 흐름을 잘 아는 ‘연출’이 합력하여 만든 작품이, 이렇게 무대 위 배우의 연기와 소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덕택에 객석에 앉아서 관람하는 우리는 작품의 ‘내용적 깊이’와 함께 ‘무대적 구현’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새삼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창(唱)을 통해서, 극(劇)이 완성된다!” 창극은 이래야 당연한 게 아닙니까?

한승석의 작창(作唱)도 좋았습니다. 김준수, 유태평양, 박애리는 이 분야의 스타이자 베테랑인데, 경기민요에서 활약했던 전영랑이 합쳐지면서 음악적으로 스펙트럼을 넓힌 점도 이 작품에서 주목할만한 성과입니다. 앞으로 국립창극단과 같은 무대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 예전에도 경기민요가 창극에서 들어왔다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렇게 ‘삽입가요’처럼 놓이판의 한 장면에 들어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판소리라는 남도음악의 어법과 경기민요의 어법(語法)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음악극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드립니다.

사성구 극본과 주호종 연출의 ‘내 이름의 사방지’, 꼭 다시 무대에 올려야 합니다. 또한 이런 극본과 이런 연출, 곧 ‘창극다운 창극’을 만들어내는 분들의 작품을 국립창극단 무대에서도 곡 보게 되길 희망합니다. 

● 창극 ‘내 이름은 사방지’ 2. 16 ~2. 17.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