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3년 전 그날, 청와대 앞 태평무 명인의 절규
[성기숙의 문화읽기]3년 전 그날, 청와대 앞 태평무 명인의 절규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무용평론가
  • 승인 2019.03.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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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무용평론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1일, 100년 전 그날의 함성, 온 겨레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온 민족이 결기 있게 일어섰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한민국의 심장 광화문 한복판을 비롯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치뤘다.

지구촌 해외 동포들도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반추하는 다양한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올해는 대한민국의 기원을 상정한 건국 100주년과 맞물려 여러 행사들이 일년 내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춤으로 민족정신을 구현하려 애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이다.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은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다양한 예술활동을 펼친 전통예인으로 손색이 없다.

한성준은 조선의 춤과 음악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이른바 ‘문화독립투사’였다. 한성준의 문화독립투사로서의 기질은 태평무 창안 내력에서도 찾아진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상징하여 2인무 형식으로 창안된 태평무는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1930년대 말 민족문화말살정책이 자행되던 시절,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설정하여 춤을 창작코자 한 발상이 새삼 놀랍다.

그러나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체제에 놓여 졌던 당시 태평무를 온전히 춘다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복색을 착용하지 못하고 흰색 한복차림에 신라시대 관으로 대체하고 태평무를 추어야 하는 설움을 겪었다.

모름지기, 태평무는 한성준이 가장 아끼던 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태평무 의상으로 수의를 해달라고 할 정도로 이 춤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또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의상으로 복원하여 제대로 차려입고 태평무를 춰야 한다고 당부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알다시피, 태평무는 일제강점기 국권을 상실한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상징화한 춤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민족혼을 일깨운 태평무가 우리시대에 이르러 수난을 겪고 있음은 실로 아이로니컬하다. 오늘의 태평무는 어떤 모습인가? 태평무에 스며있는 민족의 혼과 얼이 망실되고 무용계의 혼란과 분열을 초래한 ‘천덕꾸러기’ 춤으로 전락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3년 전 그날이 떠올려진다. 2016년 3월 10일의 일이다. 유난히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의 진정한 계승자로 알려진 이현자 선생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팔순에 이른 원로무용가의 절박한 심정이 담대한 용기로 발현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제일 먼저 수습한 것은 청와대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꽃샘 추위에 노출된 고령의 원로무용가의 안위가 걱정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현자 선생은 태평무 제1대 보유자였던 고(故) 강선영의 1호 제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태평무 명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전수조교다. 전수조교에 앞서 태평무 ‘보유자후보’를 지낸 경력도 있다. 국가가 이미 절반은 태평무 보유자로 인정했던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현자 선생은 왜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나섰는가? 발단은 4년 전으로 소급된다. 문화재청은 2015년 12월 승무·살풀이춤·태평무 등 3종목에 대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심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태평무 1종목에서 단 1명이 보유자로 인정예고 됐다.

파장이 컸다. 무용계 비판은 예고된 것과 다름없었다. 심사위원 편파구성, 특정 학맥의 영향력 행사, 콩쿠르 심사방식 등 불공정 심사가 도마 위에 올랐다. 태평무 보유자 인정 예고자가 정통성과는 거리가 먼 신무용 계승자라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무용계에서 성명서가 발표됐고 미디어의 관심도 뜨거웠다. 약 100건에 달하는 언론 비판기사가 쏟아졌다.

2016년 3월 10일, 태평무의 정통성을 이어온 이현자 선생의 청와대 앞 1인 시위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조선시대 왕비의 복색으로 이루어진 태평무 의상을 입고 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머리에 ‘큰머리 장식’을 하고 화려한 꽃 수가 놓인 당의 차림으로 나타나 단연 눈에 띄었다. 한 편의 퍼포먼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시위에 나선 이현자 선생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피켓에 각인된 소리 없는 ‘문자의 외침’에서 100년 전 태평무를 향한 한성준의 간절했던 바람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민족의 혼, 태평무의 원형을 지켜온 64년 외길 춤인생!”, “문화재청의 부당한 행정으로 짓밟히다”. “서양춤의 변형인 신무용 계승자에 대한 태평무 보유자 지정을 철회하라”. “제척사유, 담합의혹 있는 조사위원·문화재위원에게 태평무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현 사태를 초래한 문화재청장은 책임지고 물러나라!”

그후 3년이 흘렀다. 태평무의 원형을 지켜온 이현자 선생의 64년 외길 춤인생은 3년을 더하여 67년이 됐다. 문화재청의 부당행정은 시정되지 않았고 지난 3년간 제도개선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해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서양춤의 변형인 신무용 계승자에 대한 태평무 보유자 지정은 철회되지 않았고 여전히 ‘보류결정’ 상태에서 3년이란 시간만 경과된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2018년 4월 새로 짜여진 무형문화재위원회는 편중된 인적구성, 전문성이 결여된 인사들이 대거 위촉되어 실망감을 안겨줬다. 특히, 박근혜 정부에서 태평무 보유자 인정예고 등 무형문화재 정책의 파탄을 초래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원로연극학자가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재임되고, 나아가 위원장을 맡은 것도 논란을 키웠다. 문화재청이 잘못된 무형문화재 정책을 개선할 의지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정부는 출범이후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을 국정 철학으로 내세웠다. 문재인 정부가 표방한 ‘평등·공정·정의’의 가치는 어느덧 우리시대를 관통하는 삶의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 아니 작동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문화재청은 과연 ‘평등·공정·정의’란 시대정신을 무형문화재 정책을 통해 구현할 의지가 있는가?

일제강점기 명무 한성준은 망국의 한(恨)을 가슴에 품고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태평무를 만들었다. 민족의 혼과 얼이 스며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평생 태평무 지킴이로 살아온 원로무용가의 소망은 증발된 채 국가의 책임만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