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우 그는 누구인가?
박양우 그는 누구인가?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9.03.1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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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 등 문화계 활약, 참여정부 시절 문화부 차관 지내
박양우 문체부 장관 후보자

박양우(61)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사진)는 30년 이상 문화·예술·관광 분야 정책을 담당한 정통 관료 출신 행정가다.

원만한 성격에 리더십으로 문체부 안팎의 신망이 두터운 데다 정무 감각도 뛰어나 진작부터 문체부 장관 기용 가능성이 점쳐졌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6~2008년 문화관광부(현 문체부) 차관으로 발탁돼 주요 현안들을 무리 없이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양우 내정자는 1958년생으로 전남 광주 출신이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 행정학석사, 영국 시티대학교 예술행정학석사를 거쳐 한양대학교에서 관광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행정고시 23회로 공직에 입문하여 문화재, 예술진흥, 국제관광 등 문화정책 업무를 두루 거친 후 김대중정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실에 행정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문화관광부 공보관, 관광국장, 주뉴욕한국문화원 원장, 문화산업국장, 정책홍보관리실장을 거쳐 노무현정부의 마지막 문화관광부 차관으로 공직을 마쳤다. 2008년 3월 중앙대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강단에 서고 있으며, 부총장을 맡기도 했다.

예술경영을 학문으로 전하는 대학교수로서 연구와 강의 외에도 (사)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 (사)한국호텔외식관광경영학회 회장, (재)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평화한반도 문화인회의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정책과 예술행정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위원을 지내 전통분야에 대한 안목도 높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다.

퇴임 후 그는 학교에서 만이 아니라 문화계 현장을 떠나있지 않았다. 예술의 전당은 물론 심지어 인사동의 작은 음악회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광주비엔날레 대표를 맡은 것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의 미술작품을 마주하는 심미안과 작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이 녹아난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경비교도대 2기로 입대 사병 근무

박 후보자에게는 군대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고시 합격생에게 주어지는 특전인 장교를 마다하고 그는 일반 사병으로 군대를 자원했다.

그 스스로 ‘편한 길만을 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군대만은 졸병으로 끝마치고 싶어 경비교도대 2기로 입대, 김천감호소와 청송감호소, 성동구치소에서 근무했다. 그 덕분에 박 내정자는 ‘긴장과 엄격한 규율’을 배웠다고 한다. 모두가 열외를 희망했던 새벽 보초를 자임해 3년간 빠짐 없이 새벽 3시 반부터 5시까지 보초를 섰다. “생각해보면 극적 요소가 없는 인생인데, 그나마 군 시절이 다이내믹했던 것 같다”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자세가 이를 통해 잘 드러난다.

예술적 소양과 ‘경청의 달인’

그는 경청의 달인이다. 얼마전 노 화백께서 관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는 현역에 있지 않기에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노화백의 집을 찾아가 그의 억울한 사정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해 주어서 큰 위로와 위안이 됐었다고 그 분이 전해주었다.

어느날 사석에서 그와 저녁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저녁을 마치고 인사동의 어느 조그만 술집에서 잠깐 동안 종이에 그린 그림과 글씨를 보면서 그의 문화예술적 소양이 범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학창시절 그림을 잘 그려 입상을 하기도 여러번, 화가의 길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 꿈은 이내 접었다고.

박양우 장관 후보자가 행시 합격 이후 당시 ‘잘 나가는 부처’인 기획재정부나 다른 부처를 마다하고 문체부로 오기를 희망한 것은 그의 예술적 소양(자질)에서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날에야 '공무원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부처‘로 문체부가 꼽히지만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선호하는 부처가 아니었다. 30여 년 전에야 말해서 무엇하랴. 그럼에도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 소위 ’힘있는 부처‘가 아니라도 자신이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한 그의 행보가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다.

지난 1995년 5월 23일자에 실린 경향신문의 ‘문화정책 미래는 우리 손에서- 문체부 젊은 공무원들의 스터디 그룹 눈길’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그의 문화정책에 대한 열정을 익히 톺아볼 수 있다. 당시 3년전부터 문체부 과장급 이하의 젊은 공직자 스터디 모임인 ‘예술행정연구회 스터디’는 공무원을 물론 관련 예술가들과 업계 사람들도 가끔 참여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던 곳이었다. 그 공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한 리스트에 박 후보자도 들어가 있다. 그의 열정과 성실성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에 그는 최연소 차관까지 오르며 우리나라 문화정책 전문가로서, 퇴임 후 모교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여전히 그는 그 자신이 인접분야의 학문들을 연구해 접목해 문화예술계의 후학들이 미래를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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