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장은정의 ‘매스?게임!’이 은유하는 무용세계
[이근수의 무용평론] 장은정의 ‘매스?게임!’이 은유하는 무용세계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3.15 17: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매스?게임!’(1,26~27, 아르코예술 대극장)은 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공연예술창작산실 무용부문 아홉 개 신작 중 하나다. 이에 앞서 본 네 작품은 ‘댕기풀이’(이경옥), ‘Hidden Dimension'(이나현), ’Nutcrusher'(허성임), ‘개미’(김성민)였다. 

무용가들이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시대 속에서 혹사당하며 살아온 내 몸에 대한 반성”, 장은정이 서술한 작품의 주제다.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이 땅, 이 시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이제 나는 혹사당했던 나의 몸에게 움직임의 허락을 구한다. 이번 작업은 그 시절에 대한 반성과 순수한 몸을 둘러싼 환경을 되짚어보는데서 출발하였다.”고 그녀는 부연한다.  

막이 열리기전부터 무대 위에선 푸른색 진자가 시계추처럼 좌우 회전운동을 반복한다. 시간의 흐름이다. 막이 열리면 12개씩 4줄로 배열된 전등이 무대 뒷면에서 가지런히 빛을 발하고 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Stars and Stripes forever)', 행진곡풍의 경쾌한 경음악연주에 맞춰 무용수들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검정색 치맛단을 한손으로 들어 올린 채 무대를 가로지르며 가볍게 걷는 모습이 경기장 안 투우사들의 행진을 보는듯하다.

암전하며 막이 바뀌면 한쪽 구석에 무용수들의 몸이 엉켜 있다. 소리는 사라지고 몸짓만이 어두움 속에서 뭉쳤다 떨어졌다 다시 뭉치고를 반복한다. 

몸들이 흩어지며 허리에 둘렀던 치마를 벗어 둘둘 말아 머리에 쓰고 무용수들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 몸짓은 아마도 원초적인 춤의 모습들일 것이다. 기계음과 같은 북소리가 이어지고 무대 위에 거대한 물체가 등장한다.

플라스틱상자를 쌓아놓은 직육면체들이 연결되며 거대한 벽을 형성한다. 그 벽은 무너뜨릴 수 없는 제도이고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며 제도권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자연스러웠던 몸짓이 훈련받은 제도적 몸으로 바뀌고 대열에선 이탈자가 발생한다. 벽 앞에 선 그들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 무대는 급속히 냉각된다. 다른 쪽에서 또 하나의 벽이 등장하고 ㅅ자를 형성한 거대한 두 벽에 의해 무대는 더욱 축소된다.

엄습하는 공포감 속에서 출구를 찾는 무용수들의 방황이 가속화된다. 기진맥진 지쳐서 쓰러진 몸 사이로 육중한 몸매의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거대한 시스템 위에서 무대를 감시하던 설계자이고 막강한 힘을 가진 컨트롤러이기도 하다.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검정색 치마를 뒤집으면 빨강색이 드러나며 온 몸에 둘러쓸 수 있는 망토가 된다.

붉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서 춤추는 어릿광대들, 자유로운 몸들이 도태된 곳에서 제도권에 안주하며 순치된 예술가들이라고 이들을 부를 수 있을까. 

민천홍이 디자인한 의상은 특색이 있다. 남녀공용이고 안팎도 공용이다. 겹쳐서 허리에 두르면 치마가 되고 접어서 머리에 올리면 두건이 된다. 치마를 뒤집어 펼치면 붉은색 망토가 되고 검정색과 붉은 색이 두 개의 세계를 가르는 표지가 되기도 한다.

이는 또한 의상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콘셉트이기도 할 것이다. 양악과 국악이 경계 없이 뒤섞이고 중간 중간 침묵의 시간이 적절히 삽입되면서 장은정의 은유적인 스토리텔링은 완성되어간다. 

‘매스?게임!’은 멋모르고 춤 춰온 자신의 몸에 대한 성숙한 무용가의 새로운 발견을 표현한다. 그러나 단순히 무용가의 몸에 관한 이야기뿐일까. ‘매스(mass)'를 우리가 사는 세상, ’게임(game)'을 그 속에서 생존해야하는 예술가의 삶으로 해석해본다면 이 작품은 또한 무용가의 몸에 빗댄 이 시대 한국의 예술풍토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하나의 작품 속에 이러한 복합적 의미를 심어놓는 것이 안무가의 역량이라면 이를 발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또한 비평의 역할이기도 하다. 내가 이 작품을 두 번 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푸른색 진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되고 미래는 소리 없이 다가온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 나만큼 꼭 그만큼 남도 소중하다. 이 마음을 나누고 싶다.” 50대 중진무용가로서 장은정이 체험한 춤 세계가 이러한 희망으로 더욱 깊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