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문웅 박사(전 호서대 교수)“내 유일한 낙은 문화예술 사랑하는 것, 예술로 행복해지는 문화주사 맞아라”
[인터뷰]문웅 박사(전 호서대 교수)“내 유일한 낙은 문화예술 사랑하는 것, 예술로 행복해지는 문화주사 맞아라”
  • 인터뷰·정리/이은영· 임동현 기자
  • 승인 2019.03.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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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표 부자 아닌, 보다 더 나은 삶 추구”

“27일부터 <봄, 북한 미술을 다시 봄>전시, 단절된 북한미술 아름다움 보여주고 싶어 기획
뛰어난 작품 감상으로 민족 동질감 회복 도움 되길”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인영아트센터. 이 곳에서 의미있는 두 전시가 열렸고 열린다. 서예가 일속 오명섭의 작품을 통해 서예의 멋을 전하는 ‘오명섭 서예전’이 열렸고, 27일부터는 월북 납북 화가들의 작품 100여점이 선보이는 <봄, 북한 미술을 다시 봄> 전시가 열린다.

이 두 전시의 기획을 맡은 문웅 박사는 (주)인영기업, 인영물류, 인영아트센터를 창업하여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1천 점이 넘는 미술 작품을 컬렉션한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컬렉터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해왔다.

▲문웅 박사. 전 호서대· 중앙대 교수. (주)인영기업, 인영물류, 인영건설, 인영아트센터를 창업하여 대표이사로 있다

그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문학을 좋아했지만 국문과를 ‘굶는 학과’로 여기는 어른들의 말에 경영학을 전공했고 뒤늦게 다시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국문과에 편입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다.

경영학, 마케팅, 국어국문학, 미학, 미술사, 예술경영학, 공연예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를 역임하고, 지난해 호서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다. 그가 서울의 예술명문대학인 중앙대를 떠나 지방대로 간 것은 보통은 잘 납득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우연히 특강을 갔다가 그 학교로부터 부름을 받고 과감히 지방대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도 공부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열정을 쏟아 부으며 단 한 번도 결강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했기 때문이다.

학생 때 서예를 배우면서 미술 작품을 사 모으는 취미를 가지게 됐고 서예의 재능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건설사업으로 연결됐다. 그리고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은 그에게 예술경영을 공부하게 만들었고 결국 대학교수로, 인영아트센터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천여 점의 그림과 7,8천권의 장서를 통해 그는 인문학과 예술, 문사철에 천착하게 된다.

▲7,8천권의 장서로 빼곡이 둘러싸여 있는 문웅 박사의 서재.

건설업을 하면 흔히 술과 골프는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요소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 교수는 술 담배는 커녕 골프채 한번 잡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문화강국’을 함께 꿈꾸며 후학들을 가르쳐 왔다.

그는 그림을 사는 것에만 돈을 쓰지 않았다.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을 기꺼이 내줬고 이웃에게 기부했다.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 시민단체에 40 여 평의 사무실을 선뜻 내주었고, 제3세계인 미얀마의 작가를 발굴해 그 작가의 전시를 열어주고 작품 전체를 다 매입해주었다. 그 작가는 현재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정을 받아 지난해 yes24문화재단 초청으로 인사아트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아내에게 결혼반지 대신 그림을 선물할 정도로 그림을 사랑했던 문웅 교수. 그 열정은 가족에게로 이어졌다. 가족이 모두 미술 애호가이며 딸은 학예연구사, 아들은 서양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7회의 수술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건강을 유지한 것은 바로 그 열정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여러 번의 인터뷰 요청을 해서야 겨우 성사됐다. 그를 꼭 인터뷰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개인으로서 드물게 1천여점이 넘는 작품을 콜렉션하고 있다을 뿐만아니라 해외 작가를 비롯해 국내의 내로라 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날에 강연균 선생의 작품을 수 십 점 사들이기도 했다. 한 작가에 대한 후원의 결과가 된 것이다. 그 외 아들인 문호 작가의 졸업작품전에서 딱한 사정을 듣게 된 한 학우의 작품을 슬며시 사주기 시작한 이후로, 신진작가들을 위한 <인영미술상>을 16년째 시상해 오고 있다. 그는 1년에 여러 곳에 도네이션을 하고 있지만 외부에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자 하는 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다.

‘문화의 힘’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 그림을 팔고사는 것보다 그림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예술가들과 더불어 함께 하기를 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 문웅 박사를 만났다.

인영아트센터 건물 외관을 감상하고 들어왔다. 옥상의 대형 조각품인 곰 두 마리가 인상적이다.

구상조각회장을 역임하신 고정수 교수 작품이다. 인사동이 침체되어 가고 있어 하나의 랜드마크화 시키기 위해서 제작했다. 브론즈 무게만도 2톤 가까이 되는 가로 5미터 높이 5미터 폭2미터 대작이다.

지난 일속 오명섭 서예전과 곧 열리는 북한미술 전시를 직접 기획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박사님이 갤러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신경 안쓰고 있는데(웃음). 이번 오명섭 서예전과 다음 북한미술 전시만 내가 맡았을 뿐이고 그 외에는 한 달에 한 번도 놀러 안간다(웃음). 우리 딸이 전문학예사이자 관장으로 잘 하고 있으니까 믿고 맡기고 있다. 아들이 서양화가인데 아들에게도 ‘너희 놀이터로 삼으라’고 말하기도 한다(웃음).

▲인사동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해 설치한 인영아트센터 옥상의 곰조각상. 고정수 교수의 작품.

이번 두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오명섭 서예전은 50년전 서예를 함께 시작한 인연과 관련이 있다. 오명섭 선생은 학정 이돈흥 선생님 문하에서 같이 서예를 배운 친구다. 아주 과묵하고 잘 생긴 친구였는데 연습량도 대단하지만 특히 그의 붓끝은 감히 내가 흉내를 낼 수가 없었다. 늘 주눅이 들 정도였다(웃음).
이후에 사업과 공부로 선생님 곁을 떠나 학문의 길을 걷고 지난해 교수 정년퇴임을 했는데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바로 학정 선생님 곁에서 한 생을 같이 하고 있는 오명섭 선생이다. 존경하는 스승님 가까이에서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이 내겐 참으로 감동적이면서도 부러운 부분이다. 마침 또 늦었지만 다시 서예진흥법이 제정되어서 정말 반가웠는데 이번 기회에 오명섭 선생의 서예를 통해 서예의 멋을 전하려했다.

북한미술 전시는 1971년부터 모은 1천여점의 그림들 중에서 엄선한 월북, 납북 작가의 작품 중 많은 희귀본을 포함 100여점을 선보이는 것이다. 볼 거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북한 포스터 ㆍ지폐ㆍ도록ㆍ조선미술가편람 등도 전시할 계획이다.

▲김관호, 누드 110x89cm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1916년 동우 김관호가 그의 고향 근처 능라도의 대동강가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그린 <해질녘(夕暮)>이라는 작품이, 문부성미술전람회 특선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지만, 정작 우리나라 신문은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을 게재치 못함”이라는 문구와 함께 다른 도판으로 처리되어버리는, 그런 작가의 <누드>를 비롯해, 1938년 오지호와 함께 <오지호. 김주경 이인화집>이라는 최초의 원색 호화판 화집을 출간한 김주경의 작품들, 그리고 리쾌대, 정종여, 김만형, 리석호, 길진섭, 문학수, 최재덕, 김기만, 정창모, 정영만, 선우영, 변월룡, 림군홍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변월용, 러시아미녀 58x90cm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이 전시는 어떤 목적의식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북한예술이 도외시됐는데 이번 해빙 무드를 맞아 월북 납북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며 ‘북한미술도 이렇게 좋구나’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기획했다.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나는 예술품을 보여주는 사람이지 사상가가 아니지 않나.

▲북한 포스터, '민속놀이를 적극 장려하자!'라는 구호가 흥미롭다.

지난해 교수직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대학에서 전시기획, 공연예술을 다 가르쳤는데 지난해 정년퇴임한 후에는 대학원 강의만 하고 있다. 내 서재를 보면 책들이 수 천 권인데 그야말로 잡학이다(웃음). 보는 사람마다 전공이 뭐냐고 물어본다.
어렸을 때는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는데 어른들이 국문학과를 '굶는 학과'라고 해서(웃음) 결국 권유로 경영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꿈을 접을 수가 없어서 40이 넘은 나이에 국문과에 학사 편입을 했고 그러다가 중동 건설 붐의 영향으로 건설회사를 차려 사업을 했다.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가진 후 꾸준히 컬렉션을 해오면서 미술관을 설립하려고 예술경영학을 공부했다.

 “전시는 그림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여주는 것”

지금 어떻게 보면 미술계의 큰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컬렉션은 어떻게 하게 됐나.

대학 때부터 서예를 하면서 표구점과 갤러리를 다니게 됐는데 그때 내게 그림을 권면하는 표구점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의 추천으로 처음 산 게 의제 허백련 화백의 병풍이었다. 1973년도로 기억한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니 1977년 허 화백이 돌아가셨다. 소개를 한 분이 그 그림을 팔라고 해서 팔았는데 산 가격의 10배를 받았다. 내 평생 처음 판 그림이었다. 그런데 반년정도 지나니까 그 그림이 절반 가까이 또 뛰었다. ‘미쳤다. 왜 팔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때부터 앞으로는 돈 벌어서 그림 사면 단 한 점도 내손에 들어온 것은 팔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지금도 그림을 팔아본 적이 없다. 내가 산 그림을 판다는 것은 내 몸 일부를 떼어 주는 듯한, 돈벌려고 자식을 파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팔면 또 다른 작품을 사야한다. 왜 그것을 팔아야하나?라고 반문하게 된다.
인영갤러리 개관전 때  많은 소장 작품을 전시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팔라고 하는 작품이 많았다. 소장작품이라 팔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럼 왜 전시를 하냐’ 라는 물음이 나오더라. 전시는 단순히 그림을 팔려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전시는 미술문화예술 활동의 일환이다. 많은 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지 절대 돈을 벌려고 하면 안 된다. 지금처럼 이렇게 안 팔고 있는 것이 잘한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건설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예술대학 교수가 됐는지

20대부터 해마다 연하장을 보낼 때 남들은 연하장을 사서 하지만 나는 화선지를 A4용지 크기로 잘라 한 해 동안 모토로 할 글을 써서 보냈다. 지금도 지인들에게 서예로 연하장을 보낸다. 그런데 어느 날 누님 친구분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을 만나보라는 것이다. 만났는데 대뜸 ‘뭘 원하나?’라고 물어봤다. 쌩뚱맞은 질문에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는데, 그 분이 장래에 뭘 할 거냐고 하면서 ‘건설업 해 볼 생각 없나?’라고 묻더라. 의아한 얼굴로 건설은 전혀 모르는 분야라 고 하니, 지금부터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면 사업을 해봐야지’라면서 건설업을 하도록 권면했다. 알고 보니 이분이 당시 모 도의 건설국장이었는데 아내의 서랍에서 내가 보낸 서예 연하장들을 보고 범상치 않아 나를 불렀다고 한다. 서예 작품(?)으로 만든 그 연하장이 결국 나를 건설업으로 이끈 것이다.

그렇게 30대 후반까지 건설업을 하면서 골동품을 모았는데 사는 것마다 가짜요, 졸작이었다. 그때부터 좋은 작품을 사기 위해 공부를 했다. 당시만 해도 교수가 된다는 건 생각한 적도 없었다. 공부도 하고 사업도 좋아져서 미술관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선배가 ‘미술관은 일반 사업과는 다르다. 예술경영을 공부하라’고 조언하더라. 뒤늦게 깊은 학문을 하니 재미가 있었고 그렇게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교수가 됐다. 어떻게 보면 순리대로, 물 흐르는 대로 한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사업을 했다면 망했을 지도 모른다. 워낙에 변화가 심하잖나(웃음).

학생 시절부터 그림을 사기 시작했고 졸업하자마자 바로 건설업을 했다고 하면 집안이 부유했을 것 같은데(웃음).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10원 한 장 도움받지 않았다. 내 힘으로 학교를 다니고 사업도 시작했다. 내가 상고를 졸업했는데 학생 때부터 작품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세무기장 아르바이트 덕분이었다. 여러 회사에서 하면서 한 달 월급에 가까운 돈을 벌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사업하면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게 탈세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보면 다른 곳에 기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국가에 내야할 돈을 내지 않고 있다. 세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국가에 도음이 되는 돈이라고 생각해보라. 그 국가에 도움을 주지 않고 탈세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정식으로 당당하게 낼 돈을 왜 아깝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다. 누구에게도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기에 당당堂堂하다. 

나는 인생의 목표가 부자는 아니다. 하지만 부자의 목표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인생의 목표가 부자면 수전노와 같다. 그 차원이 아니다. 내 부자의 목표는 내 생활의 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다. 위험한 것을 해결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돈이 있어야한다. 어려울 때 해결할 무기이기에 돈은 벌어야 한다. 그렇게 돈은 필요할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컬렉션을 하다보면 그림을 사야한다는 의무감이 생기지 않을까?

난 술이나 담배, 골프, 화투 등을 해 본 적이 없고 할 줄도 모른다. 내 유일한 낙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좋은 것을 안하고 어떻게 사나. 골프 좋아하는 사람에게 골프하지 말라고 하면 병나지 않나. 나는 컬렉터이기에 그림을 사지 않으면 미친다(웃음). 점잖게 미친 것이지. 절제가 되지 않는다. 원하는 그림을 사면 정말 밥을 2,3일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중독성이지만 좋은 중독성이다.

‘그 많은 작품을 가지고 뭐할거냐’라고 묻는데 내 대답은 단 하나다. ‘그건 그대들이 걱정할 것이 아니다’. 간혹 외국 미술시장에서 작품을 샀다고 하면 ‘외화 낭비’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데 혜안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사서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것은 오히려 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무덤에 작품을 가지고 가지 않는 한 작품은 어딘가에 남는다. 그리고 그 작품의 가격이 세월이 지나 다시 오르면 그만큼 우리에게 외화가 들어오는 셈이 되는 거다.

거창하게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걸 계속하다보니 컬렉터가 됐고 이렇게 작은 건물이라도 마련하게 됐고 미술관을 하게 됐다. 큰 미술관은 그만의 역할이 있고 우리는 우리만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미술품을 컬렉션 하는 자세는 많은 작품들을 보고 연구조사 하고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작품을 사랑하게 되면 깊이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기게 되니 그러고 나면 그냥 모으기만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좋아하던 걸 계속 하다 보니 컬텍터 됐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 가장 기쁘게 생각

예술경영을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예술경영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꼽는다면

뭐니뭐니해도 취미와 적성이 맞아야한다. 적성에 맞으면 더 관심이 쏠리고 그러면 찾게 된다. 취미에 안 맞으면 안간다. 공연장이나 미술 전시장을 많이 가는 것도 좋지만 학생들에게 전시기획을 많이 강조한다. 전시가 왜 좋은가? 공연예술의 경우 관객이 없으면 막을 내려야한다. 보상도 없다. 하지만 전시기획은 한 번 안 팔려도 창고에 작품이 남아있다. 그 작가가 나중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초등학교 때 그린 그림까지도 팔린다.

일전에 내가 어느 개인전에서 작가의 작품을 산 적이 있는데 내가 산 작품 외에는 아무것도 안 팔렸다. 그런데 내가 사니까 나를 아는 어느 부부가 두 작품을 따라서 샀다. 한때 그림이 안 팔려 생활이 곤궁했던 작가였는데 나중에 지방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는 그림이 다 팔렸다고 기뻐서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 이렇게 전시기획은 시간이 지나도 기회가 많다. 기획을 하면 많이 팔리면 50%의 이익이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작품이 그대로 남지 않으냐. 그것을 노리라고 말한다.

그림 중에서는 평면 회화를 사라고 말한다. 지금 국립현대박물관에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있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브라운관이 수명이 다해 절반 이상이 꺼졌다. 여기서 딜레마가 나온다. 원형을 지켜야하는가 보수를 해야하는가? 1003개의 브라운관을 어디에 보관해야하는가? 보수를 한 것이 과연 백남준의 원형인가?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이건 전문가들의 판단의 문제이긴 하지만...

강의나 특강에서 김구 선생의 '문화강국'을 설파하고 있는데 그것이 박사님의 문화관인지?

내가 <백범일지>를 여러 권 가지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씀하신 혜안이 놀랍다.  전 역사를 통틀어서 남아있는 것은 문화 외엔 없다. 정치나 경제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추구해야하는 것이 문화예술이다. 지금 한류, K-POP이 엄청 잘 되고 있는데 우리가 먼저 이들의 음악을 듣고 음반을 샀기 때문에 세계로 퍼진 것이지 어느 특정 엔터테인먼트사가 한 것이 아니다. 온 국민이 먼저 좋아하고 즐기고 힘을 합쳤기에 지금의 열풍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이 자양분이 된 것이다.

▲문웅 박사의 핸드폰에 빼곡히 들어있는 여러 작품들.

좀 전에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도 판본별로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희귀본 원본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핸드폰을 보여주며) 이게 뭔지 아나? 서포 김만중 선생의 <구운몽九雲夢> 필사본 원본이다. 1725년 이전본인 노존본老尊本이다. 구운몽의 권위자이신 고려대학교 정규복 교수님이 감정을 하시고, 논문에 <문웅본>이라고 쓰셨다. 내 핸드폰 안에도 여러 가지 원본들이 들어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서재로 한 번 초대해서 직접 보여주고 싶다. 내가 가장 애장하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지금까지 써온 내 일기장들이다.

▲문웅 박사가 은행 금고에 맡겨 놓을 정도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구운몽九雲夢>필사본 원본.

좋은 작품을 고르는 심미안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작품을 사보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내가 그 작가의 작품을 사면 그 작가가 내 팬이 되고 내가 그 작가의 팬이 된다. 그러면서 서로가 홍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작가가 실력이 떨어지면 그게 안 된다.

지금 ‘인영미술상’을 16년째 주고 있는데 공명심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신진작가들에게 상을 주고 있는데 우리 아들 때문에 시작하게 됐다. 그 그림들을 내가 사고 그 작가가 커서 중견작가가 될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5년 정도 지나면 상을 받은 이 중 한 명 정도가 그림을 그리고 나머지는 미술학원 강사나 아예 다른 직업을 갖는다. 그림으로 밥먹기 어려우니까 젊은 작가들이 그림을 안 그린다. 예술이라고 하는 작품을 못 만든다.

그래서 한 번은 수상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5년 후에 보겠다. 형편없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산 작품을 다 찢어버리겠다’고 했다. 한번은 그 이야기를 어느 인터뷰에서 했는데 그 기자가 제목을 ‘돈 안되는 예술은 필요없다’고 달았다. 오해도 많이 받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 제목 하나 때문에(웃음).

안타까움이 묻어나는데 이 자리를 빌어 예술가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작품을 많이 하길 바란다. 다작 속에서 수작이 나오기 마련이다. 작품 하나로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은 정말 아니다. 마가렛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한 편만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됐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고 드물다. 작품을 많이 해야 수작이 나온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그 댓가는 반드시 나온다. 수염만 기른다고 예술가가 아니다. 붓이 몇 개가 닳아졌나 물감을 몇 박스나 다 썼나 그게 예술가의 기준이다.

끝으로 좌우명이 있다면?

‘Cool head, but Warm heart’(냉철한 판단력을 가지되, 따뜻한 인간미가 있어라)다. 그리고 ‘내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내게 필요 없음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어진다’ 이것도 내가 항상 마음에 두는 말이다.

문웅 박사는 1952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경영학, 마케팅, 국어국문학, 미학, 미술사, 예술경영학, 공연예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다. 아호 인영(忍迎).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를 역임하고,  호서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했다.(2018). 현재 (주)인영기업, 인영물류, 인영건설, 인영아트센터를 창업하여 대표이사로 있다.

鶴亭 李敦興 선생을 師事하여 서예를 시작하고(1971), <文藝思潮>를 통해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그동안 저서로 <再起하는 기업인>, <오직 한 사람>, <미술품 컬렉션>,<미술품은 두 마리 토끼>.<인생을 예술처럼>. 번역서로는 <인생을 사는 기술>.<기업 이벤트 프로젝트 관리>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 소년이었으나 국문학과는 굶은 학과라 하여 어른들의 권유로 경영학을 전공하였고, 문학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사십이 넘어서 국어국문학과에 학사 편입을 했다. 1977년 중동 건설 붐의 영향으로 건설 회사를 창업하여 사업을 시작하였고, 일찍이 미술품수집에 관심을 가져 컬렉션을 해 오면서, 미술관인 ’인영아트랜드‘를 설립하기 위해 예술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 신협, 한국박물관회, 한국기독실업인회, 한국청년회의소(JC),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등 의 사회활동.
. 경영지도사 자격 취득(상공자원부)  . 문예사조에“신인상”을 받아 문단에 등단.
. 저서 : 재기하는 기업인, 오직한 사람, 미술품컬렉션, 미술품은 두 마리 토끼, 인생을 사는 기술,  (번역서):기업 이벤트 프로젝트 관리(O. W Tool 저서).

. 논문 : 주5일제 근무제에 따른 문화수용방안, 문화예술활동의 재원조성연구. 메세나 활성화 방안 연구 .  공공 공연장의 운영 개선방안 연구-박사논문.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