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최승희의 딸, 자하로프의 제자 - 안성희(1932-미상)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최승희의 딸, 자하로프의 제자 - 안성희(1932-미상)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9.03.3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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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발레무용수는 대체로 두 종류로 구분이 된다. 클래식 무용수와 캐릭터무용수. 고전발레의 아카데믹한 전통에 따라 이상적인 신체의 비례와 테크닉의 정수를 겸비해야 클래식 무용수로 대성할 수 있다.

캐릭터무용수는 고전발레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민족무용을 무대화한 춤을 잘 추기 위해 개성과 연기력이 더 요구된다. 대부분의 발레작품에서는 클래식무용수와 캐릭터 무용수가 골고루 안배되어 나오고 있다. 한국근대무용사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클래식 발레무용가를 찾기 어렵지만, 캐릭터 무용수로 빛을 발한 무용가들은 꽤 발견할 수 있다. 안성희가 좋은 예다.

안성희(安聖姬,)는 집시춤을 무척 잘 추었다. 2000년 가을, 러시아 기치스 대학에서 안무법을 가르치던 올가 게오르기브나 타라소바(1927~ ) 교수에게 들은 말이다. 국제무용콩쿠르에서 집시춤으로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기록을 보았지만, 안성희의 춤을 직접 보고 증언을 하는 분을 만났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했다. 타라소바는 소련의 안무가 자하로프(1907-1984)의 제자다. 자하로프가 저술한 <무용 창작(1983)>에는 기치스대학 자하로프의 안무법 시간에 한복 연습복을 입고 진지한 태도로 수업을 듣는 안성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들어 있다. 1956년 모습이다.

자하로프는 <신데렐라>, <바흐치사라이의 샘> 등 러시아 발레 역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창조를 한 안무가다. 안성희는 21세인 53년 9월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 기치스(GITIS)대학 안무가 양성과에서 수학했다. 9세부터 18세까지 다닐 수 있는 볼쇼이 발레학교에서 수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발레교사와 안무가를 양성하는 최고고등교육기관인 기치스 대학에서 수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타라소바 교수에 의하면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근처에 위치한 기치스대학 무용 연습실로 최승희가 가끔 와서 딸 안성희의 수업 장면을 보고 가곤 했다고 한다. 최승희의 멋진 패션 감각과 우아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타라소바 교수는 모녀 소식을 오히려 내게 물어 왔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니 노교수는 잠시 말을 잊었다. 타라소바의 안무법 수업 첫 날, 그녀는 내게 북에서 왔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최승희와 안성희에 대한 오래된 추억을 간직하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자하로프 수업을 듣는 안성희와 기치스 졸업반 학생들

안성희(본명 안승자)는 한국근대문화예술계에서 절대적 위치와 명성을 지닌 최승희(1911-1969)의 딸이다.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의 역사에서 굴곡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최승희는 일찌감치 전 세계 무대로 나가 공연한 한류의 제1선 예술가였다. 카프문학을 하는 안막(본명 안필승, 1910- )과 결혼한 최승희는 1932년 만삭의 몸으로도 수원, 대구, 마산, 인천, 공주를 돌며 공연하였고 그 해 안승자를 낳았다. 1933년 어머니 최승희를 따라 일본에 간 안승자는 6세가 되던 1937년 최승희 도미기념 무용공연에 출연했다. 이미 조기무용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안승자는 어려서부터 최승희와 떨어져 살아야 했고 최승희의 첫 제자인 김민자가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최승희는 1938년 세계무용경연대회에 마리 비그만, 루돌프 폰 라반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는 등 국제적 명성을 쌓았고 해외공연에 여념이 없었다. 외할머니 손에 자라던 안승자는 1940년 구미순회공연 후 돌아 온 최승희와 만났지만, 해방 이후 월북한 안막을 따라 최승희도 북으로 가게 되면서 또 떨어져 살게 된다.  안승자도 결국 1946년 월북해 부모와 만나고 안성희로 개명을 했다. 성희라는 이름은 최승희가 주연배우로 출연한 <반도의 무희(1936)>의 주인공 백성희에서 따왔다고 한다.

안성희는 16세이던 1947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의 무용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받아 재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중국 베이징공연에 최승희 무용연구소 연구생 20명이 조선예술단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1950년 6월 초에는 대규모예술단이 소련에 파견되었다. 북한국립예술극장, 인민군 합주단, 최승희 무용연구소 25명이 가게 되었는데 안성희, 안제승(안막의 동생이자 김백봉의 남편, 무용이론가), 김백봉도 함께였다. 방소예술단장은 문화선전상 허정숙(1902-1991)이었고, 무용단은 북한 무용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최승희가 이끌었다. 2주간, 4차례 모스크바에서 가진 공연은 1부 음악 2부 무용으로 구성되었고 안성희의 <북춤>과 <검무>가 들어 있었다. 8월 평양으로 귀환한 뒤 선무공작대의 일원으로 안성희가 서울로 파견되었다.

최승희는 안성희에게 북으로 돌아 올 때 전통춤의 한영숙 선생을 모시고 오라는 책무를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한영숙의 거절로 계획은 무산되었고, 50년 말 귀로가 막힌 안성희는 걸어서 평양으로 귀환하게 된다. 1951년 5월 베이징공연에서는 <무지개춤> <동심>을 추었고 동베를린 제3회 세계청소년 학생축전에서 <장검무>로 금상을 수상한다.
 
안성희는 1956년 6월 소련유학 후 모란봉극장에서 귀국공연을 열어 자신이 안무한 작품 10여개를 선보였다. 또한 무용극 <옥란지의 전설>을 최승희 대본, 안성희 안무로 올렸는데 그 중집시춤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게 된다. 안막은 문화 선전상 으로 승진이 되어 최승희, 안막, 안성희 일가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57년 소련,북한 합작영화 <형제들>에서 최승희는 어머니역으로, 안성희는 아들의 연인으로 출연을 하였다.

모든 장면의 안무는 최승희가 맡았고 최승희 무용연구소 연구원들이 출연했다. 안성희는 캬바레의 댄서로 나와 중앙아시아 무희의 의상을 입고 요염하고 격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강변 야외무대에서는 독무로 장고춤을 춘다. 농악과 춤, 부채춤 군무도 보인다. 영화 <일리야 무로메츠>에서는 안성희가 단검을 양 손에 들고 추는 매혹적인 독무가 나오는데 캐릭터 댄스에 능했던 안성희의 매력적인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58년도에 안막은 숙청되고 59년 최승희도 물러난다. 1963년 평양무용극원 원장으로 안성희가 부임하지만 1967년 이후로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삼촌인 안제승. 김백봉 부부를 따라 부모를 버리고 남으로 왔었더라면 어땠을까? 막강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새로이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졌을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