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의 ‘책판’, 고국으로 돌아오다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의 ‘책판’, 고국으로 돌아오다
  • 허중학 기자
  • 승인 2019.04.11 1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개 높은 학자로 후진양성과 의병지휘, 유네스코 등재 유물 일부라 더 뜻깊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항일의병장 척암 선생의 유물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마침내 독립된 고국의 품에 안겼다.

▲항일의병장의 척암 김도화 선생의 책판.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을미의병 시 안동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한 척암 김도화(金道和,1825-1912)의 <척암선생문집책판(拓菴先生文集冊板)> 1장을 독일에서 지난 3월에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고 밝혔다.

이번 환수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까닭에 미처 포함되지 못했던 세계기록유산의 일부를 되찾아왔다는 점도 뜻 깊다.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책판.  (사진=문화재청)

이번에 돌아온 <척암선생문집책판>은 「척암선생문집」을 찍어낸 책판 1,000여 장 중 하나이며, 권9의 23~24장에 해당한다. 척암선생의 책판은 현재 20장만이 한국국학진흥원(이하 진흥원)에서 관리되고 있으며, 이번에 매입한 책판까지 합치면 총 21장이 전해지게 됐다. 진흥원에 소장된 <척암선생문집책판>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이기도 하다.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문집 책판과 인쇄본. (사진=문화재청)

「척암선생문집」은 척암이 생전에 남긴 글을 모아 그의 손자 김헌주(金獻周) 등이 1917년 편집·간행한 것으로, 본집 39권 19책, 속집 13권 6책으로 구성·인출된 문집은 현재 진흥원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하고 있다.

이번 <척암선생문집책판>은 지난 2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 사전점검(모니터링)을 통해 독일의 한 작은 경매에서 발견한 것으로, 당시 출품된 아시아 문화재 500여 건 중 유일한 한국문화재였다. 이 책판은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 전부터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재단은 유교책판을 전문적으로 연구·관리하고 있는 진흥원과 긴밀히 협의해 매입에 성공했다.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문집책판 인쇄본. (사진=문화재청)

척암 김도화는 영남에서 활동한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자 의병장이다. 한국 독립운동의 산실인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臨淸閣) 문중의 사위 가운데 한 명으로, 퇴계학통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촉발되자 안동통문(安東通文)을 각지로 보내고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의 결성을 결의했다. 같은 해 3월, 2차 안동의진에서는 71세의 나이에 2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지휘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 참여를 호소했다.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사진=문화재청)

1896년 9월 안동의진이 해산하고 을사늑약(1905년)을 거쳐 1910년 한일 강제병합에 이르자, 척암은 자택의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고 써 붙이고 상소를 올리는 등 글로서 일제의 부당함을 끊임없이 알렸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 1983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에, 1990년에는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사진=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