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패왕별희’의 장국영에게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패왕별희’의 장국영에게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9.04.14 19: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를 보았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당신이 겹쳐지더군요.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당신이 떠난 날이 만우절이었죠, 그래서 그럴까요? 오래 숨었던 당신이, 다시 나타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분명 없겠죠.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많은 사람의 마음에 오래도록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패왕별희’를 보면서, 당신을 떠올리는 것처럼.

장국영씨. 중국의 전유물이라 할 ‘경극’을 한국의 국립창극단이 ‘창극’으로 공연을 했습니다. 당신이 출연했던 영화 ‘패왕별희’와 같은 소재이지요. 당신은 거기서 ‘데이’라는 청년이고, 작품 속에선 ‘우희’라는 여성이죠. 실제의 자신과 경극 속 배우를 혼돈하면서, 역사와 공연의 테두리 속에서 정체성에 고민하는 모습을 매우 잘 그려냈습니다. 물론 당신이 그려낸 우희는 매우 아름다웠지요.

이번 창극 ‘패왕별희’의 우희도 매우 돋보였습니다. 장국영씨. 왠지 당신은 시샘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시샘은 당신의 예술적 에너지가 되어주었을 것 같네요. 당신이 살아서, 당신이 맡았던 ‘우희’ 역할을 하는 김준수 배우를 보면 어땠을까요? 시샘을 하거나, 매우 극찬을 했을 겁니다. 국립창극단의 김준수는 벌써 세 번째 이런 역할을 맡았지요. ‘트로이의 여인들’, ‘내 이름은 사방지’에 이어서, ‘패왕별희’입니다. 김준수는 창극에서 이런 여장(女裝)의 역할을 하는 건 아니랍니다. ‘산불’과 같은 작품에서도, 남성성이 느껴지는 주인공을 맡아 호연을 한 바 있습니다. 당신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경극을 창극으로 만드는 작업에 대해선 긍정적이었지만, 과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답니다. 당신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는 첫 번째 시도로선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배우의 동작이나 연기에선 많은 부분을 ‘경극’에서 가져왔고, 배우들의 노래와 반주로 사용한 음악은 한국의 전통을 가능한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중국의 경극배우도 다재다능하겠지만, 한국의 창극배우가 이렇게 ‘전전후 아티스트’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죠.

창극과 경극, 저는 이리 구분합니다. ‘흘러가는’ 창극, ‘짚고 가는’ 경극이라구요. 창극은 소리와 연기가 매끈하게 잘 이어지는 것에 중점이 두지요. 반면 경극은 장면마다 ‘포인트’를 살리는 게 관건이지요. 대사와 동작을 통해서 포인트를 잘 살려주어야 하는데, 한국의 국립창극단은 그간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지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연출가(우싱궈)를 모시고, 경극의 이런 특징을 살려내면서 공연을 했습니다. 모든 창극배우가 다 출중했지만, 특히 젊은 배우들의 적응력에 놀랐습니다. 항우 역할을 맡은 정보권을 비롯해서, 박성우(창장)과 최용석(한신)은 소리꾼으로서의 자질뿐 아니라, 몸을 유연하면서도 강인하게 보이게 만드는 동작을 매우 잘 하더군요.

국립창극단은 대한민국에서 ‘인재의 보고’인 것 같습니다. 유방의 윤석안과 장량의 유태평양은 창극단의 대표적인 신구세대라 하겠는데, 두 사람의 조화도 돋보였습니다.

장국영씨. 당신도 이 작품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대한민국에서, 국립창극단만이 할 수 있는 공연입니다. 창극이기에 창극단만이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국립창극단의 대다수가 노래와 연기가 출중하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전임 김성녀 감독을 통해서 특히 계발된 것이고, 신임 유수정 감독 또한 그간 창극단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했으니, 앞으로의 창극단이 또한 어떤 새로운 작품을 통해서 창극의 지평을 넓혀줄까 기대가 됩니다. 물론 아주 전통적인 창극을 잘 만들어가면서 말이지요.

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창극 '패왕별희' 프레스콜에서 3장 전술과 전략을 세우다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사진=국립창극단)
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창극 '패왕별희' 프레스콜에서 3장 전술과 전략을 세우다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사진=국립창극단)

창극 ‘패왕별희’를 보면서, 모든 사람이 또한 인정하는 것이 맹인노파의 설정이고, 김금미 배우입니다. 원래 ‘패왕별희’에는 없는 설정이죠. ‘맹인노파’가 등장을 해서, 해설자 혹은 관조적인 제 3자의 입장을 그려내지요. 여기에 대비되는 것이 어린 항우(이우진)이구요. 이 작품은 이런 설정을 통해서, 사랑과 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작품과 더불어 우리네 각각의 인생사를 객관적인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게 해주더군요. 극본과 안무를 맡은 린 슈웨이(대만)와 조명디자인의 마선영은 특히 창극 ‘패왕별희’를 보다 더 깊게 바라보게 만들어줍니다.

아쉬움은 음악입니다. 작창(作唱)과 작곡(作曲)이 아쉽습니다. 작창을 맡은 이자람은  최고의 능력자인데, ‘패왕별희’에선 특별함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원작과 극본이 모두 한국인이 쓴 작품이 아니라서 그럴까요? 작품을 보고 나서, 장면과 함께 뚜렷이 기억할만한 노래가 제겐 없었습니다. 작곡을 맡은 손다혜는 ‘뮤지컬적인’ 음악을 잘 만드는 젊은 작곡가로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음악이 매우 도식적이며 효과적일 뿐이었습니다. 극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해주거나, 등장인물의 다층적인 심리를 음악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저의 바람은 애초 너무 무리였을까요?

2막의 첫 시작을 알리는 야경꾼 네 명의 등장은 매우 재밌었습니다. 사면초가라는 슬픈 내용을 일단 해학적으로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우리의 공연역사에서도 재담(才談)과 만담(漫談)이 사랑받아왔는데. 앞으로 우리의 창극에서도 이런 것을 더욱 세련되게 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영태, 남해웅, 김형철, 우지용, 네 분께 큰 기대를 해봅니다. 더욱더 많이 노력하신다면, 더 큰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장국영씨, 경극이 한국에 와서 멋진 창극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했네요. 나는 당신의 영화와 뮤직비디오를 꽤 많이 기억합니다. 그 중에도, 한국인에 의해서 또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할 것이 많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아시아적인 공통적 정서’를 또한 확인하겠지요. 과거 당신이 그런 역할을 톡톡히했구나 새삼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곳에서 편히 쉬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