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스웨덴커넥션 II’에서 본 장혜림의 ‘제(祭)’
[이근수의 무용평론]‘스웨덴커넥션 II’에서 본 장혜림의 ‘제(祭)’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9.04.1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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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국제지적재산권기구(WIPO)가 발표하는 국가별 창의력순위에서 스웨덴은 스위스와 함께 매년 선두에 랭크된다. 창의성 평가요소들인 재능지수와 기술수준, 관용성 중에서 스웨덴은 특히 관용성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다.

타 인종과 종교 등에 대한 수용성과 여가시간에 대한 가치판단, 예상치 못한 변화 등에 대한 적응성을 포함하는 관용성은 예술적 창의성과도 직결되는 요소다. 10위권 밖에서 맴도는 한국의 창의성 순위가 특히 관용성 면에서 OECD 국가 중 최하위로 평가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2017년부터 진행해온 스웨덴 ‘스코네스 댄스시어터’와의 무용커넥션은 이런 면에서 의외지만 의미 있는 기획이다.

<스웨덴커넥션 II >(3.29~31, 자유소극장)에서 보여준 세 작품 중 ‘군중의 스냅 샷’(리디아 보스 안무)은 바로 관용성을 소재로 했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이상한 이미지와 낯선 캐릭터, 특이한 상황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여덟 명의 스웨덴 남녀무용수가 소통하며 적응해가는 상황을 그려낸 세계초연작이다. 페르난도 멜리가 안무하고 김민진을 비롯한 6명 한국무용수들이 출연한 두 번째 작품 ‘두 점 사이의 가장 긴 거리’는 작년 <스웨덴커넥션 I>(6.15~17, 자유소극장)에서 선 보였던 작품이다.

세 작품 중 마지막순서로 무대에 오른 장혜림의 ‘제(祭)’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다. 번제(燔祭)는 제물이 된 짐승을 불에 태워 그 냄새를 신에게 올리는 구약시대의 제사법이다. 장혜림은 노동자들이 작업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시간과 작업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번제에 비유한다. 노동의 소중함을 부각시키면서 노동의 시간 그 자체가 신에게 바쳐지는 경건한 소산물임을 일깨워주는 창의적인 텍스트가 돋보인다.

막이 열리면 무대 위에 검정색, 파랑색, 붉은색의 작업용 헬멧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작업 중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유품이다. ‘제(祭)’에는 일곱 명의 스웨덴 무용수가 출연한다. 출연자들이 헬멧을 하나 씩 들어 올려 무대 앞으로 나아온다. 주인의 이름을 부르고 사고현장에서 숨져간 사고를 기억한다. 마지막 한 개의 검정색 헬멧이 무대 가운데 놓여 있다. 스물아홉에 숨져간 젊은 노동자의 이름이 안타깝게 호명된다. 그들은 모두가 막장에서 일하는 탄광노동자들이다. 

의상은 초록색 티셔츠와 반바지로 통일되어 있다. 시원한 초록색이 시각적으로 노동의 강도를 완화시키고 노동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함축한다. 막장으로 내려가기 전 한 자리에 모여앉아 무릎 꿇고 드리는 정성스러운 기도로 그들의 일상이 시작된다.

머리엔 헤드랜턴이 장착된 무거운 헬멧을 쓰고 땀 흘려 일하는 시간 그들의 노역은 역동적인 춤사위로 변모하고 작업장에 필수적인 협동성은 군무로 표현된다. 흙을 파고 캐어낸 석탄을 도르래에 실어올리고 갱도를 따라 운반하는 힘든 작업이 온종일 계속된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시 한 절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탈출할 수만 있다면/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이 운명을 어절 수 없지.”

작업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린다. 힘들었던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 땀에 절어버린 의상, 시커먼 탄가루와 기름때로 온통 범벅이 된 팔다리지만 노동의 시간은 소중했다. 그들이 흘린 땀 냄새가 번제의 향기처럼 하늘에 닿고 노동이 쌓아올린 소산물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기억될 것이다. 출연자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한국식 큰 절을 올린다. 외국인 출연자들에 대한 장혜림의 장악력이 돋보인 장면이다.

‘심연’(2016)에서 종이배를 띄워 보내며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무했던 장혜림이 ‘제(祭)’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노동문제를 조명한 것은 의미가 크다. 사회현상에 대한 그녀의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탄탄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초록빛 의상과 상징적 소도구, 역동적 안무와 자연스러운 드라마트루기 능력을 확인시켜준 수작이었다.

노동이 고통스러운 투쟁이 아니라 그 시간을 자신과 하늘에 바치는 경건한 제사임을 일깨워준 것은 <스웨덴커넥션 II>가 관객들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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