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능욕당했다”(1)
“명성황후는 능욕당했다”(1)
  • 이수경(일본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09.10.0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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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심 야마베 겐타로와 암살지휘자 미우라 고로의 수기 속에 감춰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이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시해’사건이 아니라 ‘살해’사건이 정확한 표현이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시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사건을 모의하고 현장을 지휘했던 인물은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6∼1926)로 돼 있다. 하지만 미우라 고로의 수기를 보면 당시 일본 내각의 핵심 인물들이 이 만행을 기획하고 책임자를 조선에 파견했던 과정이 드러나 있다.
또한 당시 살해 현장에 있었던 20대의 젊은 낭인인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는 ‘명성황후 살해사건’ 후 보고서를 그의 직속상관인 미우라 고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일본에 있는 이전 상관에게 보냈다.
바로 이 점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주모자가 당시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사실인데, 이 〈에이조 보고서〉는 70여 년 동안 철저히 숨겨져 있다가 마침내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1905∼1977)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를 밝히는 데 큰 몫을 한 두 사람의 글을 이수경 교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내용을 1편과 2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이수경 교수
야마베 켄타로는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대해 새로운 자료를 내놓았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 관료나 수비대들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낭인패들이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그 방에서 나온 물건을 약탈하고선 전리품이라고 자랑이나 늘어놓는 부랑배(고로츠키)였다고 그들의 야만적 행위를 힐책하며 조소했다. 바로 ‘명성황후 능욕설’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한 것이 야마베 켄타로인 것이다.

야마베는 비록 초등학교의 학력이 전부였지만, 철저한 1차 자료에 근거한 증거 자료 우선의 역사를 어느 사학자보다도 깊이 있고 폭 넓게 연구한 연구자의 귀감이었고, 한ㆍ일 근대사와 관련하여 자국의 수치스런 행위를 폭로시켜서 자성한 일본인의 대표적 양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쿠슈인 대학 내 동양문화연구센터 야마베 검색화면

명성황후와 관련된 그의 강연 테이프를 들을 기회를 확보하려고 애쓰던 중 지난 9월 18일, 가쿠슈인 대학교 동양문화센터에 소장된 [을미사건(민비사건)에 관한 신 자료에 대해서]라는 자료를 빌릴 수 있었다. 1962년 6월 6일(수)에 개최된, 근대사료연구회 제199회에서 발표한 야마베의 육성 테이프를 4시간 이상 꼼짝도 않고 들어봤다.

그는 당시 교토에서 입수한 육군성 자료를 보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명성황후 사건을 국제적으로 무마시키기 위한 형식적 민간 재판을 히로시마에서 여는 동시에 별도 군법 재판을 행하지만, 모든 게 사건 은폐와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을 별 조사 없이 무죄로 처분하려는 움직임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빨리 석방시킨 뒷 배경에는 당시 일본 군법의 결함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처음부터 무죄석방이 될 수밖에 없는 계획 하에서 이뤄진 황궁 습격이었다는 점, 그리고 파견된 하루타 가게요시(헌병제도 창정) 헌병사병관이 히로시마 민간 재판과 보조를 맞추려고 마츠시타 소장과 기타가와 검사의 의견을 들으면서 재판 상황을 조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독재자 대원군을 명성황후 살해범으로 지목한, 10월 13일 파리 발 기사를 게재한 1895년 10월 16일자 <NewYork Weekly Tribune>지(왼쪽), 10월 23일자에 명성황후 시체가 발견됐다는 같은 신문의 기사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 소장>

이것은 하루타 헌병사령관이 히로시마에 가서 조사를 하고 온 복명서와 외교문서의 부속자료 등을 통해 입수한 내용인데, 시해사건 조사를 맡은 하루타가 경복궁에서 저지른 만행 관련자들의 진술을 접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행각을 벌였는지를 누구보다 더 잘 느꼈을 거라는 해석도 덧붙여져 있다.

물론 한 나라의 황후를 살해하고 황궁을 습격했으니 우쭐한 영웅심리나 무용담으로 부풀려 허풍을 떨고 자아도취하여 자랑하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은 이미 기존의 연구자들이 지적해 왔다. 그러나 육군의 획책 수준이 아닌 내각의 묵인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야마베는 어릴 적부터 같은 고향 출신으로 동고동락해 온 당시 최대의 권력가들인 그들만의 절대적인 ‘암시적 명령’을 놓치지 않고 있다. 굳이 명확한 증거물을 남기지 않고도 확실하게 일을 치를 수 있는 이 암시적 명령이야말로, 사무라이정신 속에서 뿌리 깊게 향유해 왔던 그들의 미의식이고, 당시의 시대 상황과 주변 여건을 분석하면 내각 수상인 이토의 묵인이 있었던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쵸슈한(야마구치) 정군계 실세들의 정책운영과, 침략정책의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 암살 사건의 지휘대장으로 파견된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인 미우라 고로였다. 미우라 고로는 육군 중장의 퇴역 후 승려로 아타미 온천을 즐기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적은 수기는 비교적 담담하게 그때의 상황을 적고 있다.

미우라는 1887년에 불교와 승려복 등을 적은 첫 글 <승복개정(여)론>(일본 국회도서관 마이크로 필름) 외에 관수장군 호쾌록ㆍ회고록ㆍ종횡담ㆍ영웅론ㆍ메이지 반골 중장 일대기 등 총 다섯 권의 수기를 통해 자신의 행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관수장군 호쾌록>(1918)년 이후 계속 비슷한 내용으로 수기를 내다가, 사후에 <회고록>과 <종횡담>을 알기 쉬운 현대 용어로 풀어서 발행한 <메이지 반골 중장 일대기>(1981)가 발행되었는데, 그 속에서는 기존의 수기에 보완되어 야마베가 지적한 암시적 명령의 내용이 의외로 더 알기 쉽게 적혀져 있다.(아래 사진 참조)

특히 조선사건은 스기무라 후카시의 계획이라고 밝히며(위 사진 참조), 자신이 인천에 도착했을 때 마중나왔던 스기무라는 일본 외무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우라가 뭔가를 저지를 듯한 예감이 들어서 조선에 남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수기의 중요 부분을 인용하면, 미우라는 외교를 일절 모르기에 거절하며 조선 정책에 대한 질문을 세 가지 했으나 사태가 중대사인 만큼 일단 먼저 조선에 건너가라고 했고, 미우라는 정부의 무방침 상태를 자유롭게 일처리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의 대장대신이 자신의 조선 정책에 대한 요구 제시에 대해 모른다는 부분에서,이토 내각의 시급한 과제를 몇 몇 신뢰하는 쵸슈한 요인들로 구성하여 비밀리에 거행했던 계획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미 정부측과 강한 연결이 되어있던 이노우에의 보고에 의해 이토 정부는 왕비 제거를 대담히 할 수 있는 행동대장으로 미우라를 지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아래 사진)

10월 8일, 대원군을 이용하여 왕비 암살(개혁)을 행하기 위해 대원군을 병력 없이 궁중으로 불러들이는 구실을 만든다. 메이지 천황 생일이기에 행사를 가질 건데 그 자리에 페인트 칠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못 들어온다고 명분을 내세우자고, 미우라와 통역과 스기무라가 밀약을 행하는 수기도 있다. 아군조차도 모두 속이며 계획을 세우는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미우라와 통역 스기무라는 포도주를 마시며 연회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궁내 시종이 사건 보고를 하려고 왔을 때 전혀 모르는 척 사건 현장으로 가서 고종은 물론 대원군을 처음 만나게 된다.(아래 사진 참조)

미우라는 나중에 히로시마에서 도쿄로 와서 요네다 시종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 요네다는 메이지 천황에게 암살 보고를 하자 “할 때는 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왕비 살해 후 대원군에게 ‘원래 약속이 되어 있으니 정치적 참견은 말라’고 미우라가 압박을 가하자 대원군은 “이씨 가문을 구해 준다면 무엇보다도 고맙다. 결코 정치적 참견은 안 할 테니 안심하라”고 하자 일언반구도 불평이 없었다고 요네다 시종에게 보고하고 있다.(아래 사진 참조)

이 수기에서 이미 이노우에가 파견되었을 때 정치적 간섭을 일절 말라고 명성황후와 대원군과의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암살사건에서도 대원군이 반군을 일으켜 명성황후 암살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우라의 감방 생활은 넓은 독방에서 하루 두 번 운동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비스킷이나 찐고구마, 과자 등의 사식을 받으며 시간을 즐기는 것 외에는 없었다고 적고 있다. 이미 준비된 사건이었음은 명백하다.

미우라 나이 49세. 육군 중장 퇴역 후 조용히 살던 그에게 갑자기 고향 선배이자 일본제국군(육군) 창설자인 야마가타가 조선행을 강요하자 거절한다. 하지만 무조건 가라 해서 떠밀려 ‘정부 무방침의 상태로’(회고록 320쪽) 가게 되었기에 본인은 임기응변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조선에 가기 직전 (이토를 포함한) 내각 대신들이 총 출동하여 제국호텔에서 대대적인 송별회를 열어준 것이다. 이것은 전대미문으로 처음 있는 일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제국호텔은 지금도 일본 왕의 딸이 결혼식을 하는 등, 일본 왕족이 행사를 자주 여는 어용호텔로 유명하다. 그리고 육군 중장을 지낸 거물이라곤 하지만 조선의 공사로 떠나는 사람을 내각 대신들이 전부 출석하여 송별회를 해준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다. 이노우에가 갈 때도 그렇게 대접해서 보냈던가? 전대미문의 처음 열린 대 송별회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미우라가 특수한 임무를 맡지 않았다면 그렇게 화려하게 그를 대접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게다가 ‘정부의 무방침’이란 바로 ‘정부의 명을 받고 가는 것’이란 말이 된다.

그만큼 정부가 응원할 정도의 거사를 치르러 가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명성황후 암살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나 더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을 경우, 모두 미우라 개인에게 책임을 덮어씌울 각오로 보내기에, 정부로서는 미우라의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는 조선행을 융숭히 대접하여 그의 사기를 돋워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미우라 자신도 군 장성 출신으로서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이토 내각과 일본을 위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미우라를 위한 송별회가 전대미문의, 모든 내각 대신이 참석한 대 환송회였음을 적고 있는 미우라의 수기. 관수장군 회고록, 1925년, 320쪽. 미우라의 조선공사 시절의 사진

▲ 미우라 고로가 쓴 자서전 다섯 권.

▲야마구치 하기의 아부가와 강 옆에 있는 미우라 고로의 생가 터(왼쪽), 야마구치시 유다 온천에 있는 이오우에 가오루의 생가 터

야마구치 현립대학에 첫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여 야마구치라는 지역과 밀접한 생활을 해왔던 필자는 훈훈한 인정도 많이 느꼈지만, 쵸슈한(야마구치)에 대한 자존심과 보수성, 다른 지역보다 끈끈한 학연ㆍ지연ㆍ혈연을 피부로 느낀 적이 많다. 지금도 야마구치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 근대사의 거물들인 이토ㆍ야마가타ㆍ이노우에ㆍ미우라ㆍ초대총독 데라우치 등은 바로 한반도 근대사의 수난을 지휘했던 사람들이며, 일본의 수상을 8명씩이나 배출한 일본 정치와 깊은 관계의 지역이다.

특히 수완가에다 극단적인 성격의 이노우에 가오루는 단순하며 저돌적인 성격의 미우라 고로를 움직이기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미우라의 조선행을 적극 권유하였다. 야마가타와 미우라는 젊을 때부터 쵸슈군 기병대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었으나 미우라와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고,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에 일본 총리가 되는 등, 육군 원수로서 일본 정군계의 거물인 데다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쇼카손쥬쿠(松下村塾) 출신으로, 이토와 호흡을 같이하며 근대 일본을 세운 영웅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같은 쇼카손쥬쿠를 담당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가르쳤던 메이린칸(明倫館) 학교의 선후배 관계이다.

▲메이린칸 학교 내의 요시다 쇼인을 기리는 기념비와 팻말

즉, 근대개혁에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며 고이즈미 전 일본 수상이 일부러 방문을 한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쥬쿠와 메이린칸은 인구 3만 명 정도의 하기 시에 위치하며, 요시다 쇼인을 통해 철저한 지연ㆍ학연 관계를 맺는다. 동향의 인간 관계가 거대한 지역 파벌로 힘을 발휘하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1885년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총리대신으로 만들며, 각료로서 이토와 동고동락을 해왔던 사람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노우에 가오루이다. 이들 근대 일본의 정군계를 장악하고 있던 쵸슈파의 막연한 사이에서의 행동이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이자 행동과 직결하는 것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된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