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 명창, “내 소리에 울고 웃는 이들이 나의 힘, 존재 이유”
안숙선 명창, “내 소리에 울고 웃는 이들이 나의 힘, 존재 이유”
  • 이소영 기자
  • 승인 2009.10.1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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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 소리인생, 질곡의 세월·희로애락·못다 이룬 꿈 풀어낸 소리 통해 대중들과 소통

[연재] 이 시대의 대가를 만나다
“이순 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국내외의 크고 작은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국악계의 프리마돈나 안숙선(61) 명창. 작은 체구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질러대는 호소력 있는 소리와 부채를 펼친 고운 자태, 우아한 발림으로 무대를 장악하고 관중을 압도시켜, 같은 소리꾼에게도 안 명창은 경외의 대상이다. 가야금 명인인 강순영이 이모, 동편제의 거목 강도근이 외당숙,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기능보유자 강백천이 어머니의 사촌인 국악 집안에서 태어나 9살 때 소리를 시작, 어느덧 소리인생 50년을 넘겼다. 슬하의 2남1녀 중, 딸 최영훈 씨가 판소리하겠다는 것을 말려 현재 국립창극단에 거문고 산조를 연주하며 우리 전통 국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시대 최고의 명창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안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소리꾼을 타고난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안 명창도 다른 이들처럼 많은 시련과 고통, 아픔을 참고 견디며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이다. 그 힘은 오직 우리소리를 지키는 명창들의 노력과 마음이 헛되지 않도록 ‘판소리’를 이어가고자 하는 ‘전통’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리꾼으로서 자신의 소리를 찾기에 바빠 판소리를 체계화해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는 안 명창의 우리 국악 판소리와 소리에 녹아있는 삶의 이야기에 동행해보자.

지난 10월 10일 공연을 앞두고 강남구 세곡동 자택에서 만난 무대 밖의 안숙선 명창은 나지막하게 조근조근 말씀하시는 모습이 사랑에 빠진 18살 소녀같았다. 공연 전에는 체력을 비축하고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귀여운 손녀들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는데, 공연시간이 앞당겨져 시간이 촉박하자 그동안 해본적 없는 다이나믹한 인터뷰를 감행했다.

자택에서부터 시작해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공연장 근처 야외에서, 공연장에서 2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인터뷰에 지칠만도 한데 무대에 오르자,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려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선생님이 50년이 넘도록 판소리를 하게 만든 우리 전통 국악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판소리는 음악을 통해 긴 이야기를 극적으로 승화시킨 극소리다. 사람이 살아온 질곡의 세월과 희로애락을 소리로 통해 배우고 느낀다.

무엇보다 내가 하지 못한 것과 하고 싶은 꿈을 소리로 풀어내고,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기도 한다.(눈에 이슬 맺힘) 적벽가에 등장하는 장수나 영웅을 통해 그들의 세계를 알아가기도 한다. 이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 좋다. 음악, 소리라는 것으로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니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소리는 나의 친구이자 애인이다.

언제부터 그 매력을 알게 됐나.
소리를 처음 배울 때는 단순히 노래라고 생각했다. 20대 후반부터 ‘이것이 소리다.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를 내는구나’하는 느낌이 왔고 소리에 빠지게 됐다. 30대에 접어들어 소리 속에 숨어있는 많은 예술성을 알게 되면서 소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됐다.

배우는 선생님마다 한국적인 것을 모아서 자신의 인생의 오기와 색채를 담은 자신만의 소리를 일생동안 갈고 닦아 살아있는 소리를 내시더라. 이건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재(高才-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돌아가시면 이런 귀한 소리들이 완전히 없어질 것 같았고, 다섯마당을 다 떼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나하나 배웠다.

86년에 판소리를 완창하고 90년도에 다섯마당을 다 끝냈다. 주위분들이 “숙선이가 소리맛을 알았네”라고 말씀하셨고,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선생님은 “소리할 수 있는 음이 배였으니 이제부터 소리를 떼지 말고 일생을 소리와 함께 하라”고 하시며 늘 격려해주셨다.

사람들은 선생님이 소리꾼을 타고난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판소리라는 한 우물만 파기까지 노력도 상당했을 것이고 고비도 많았을텐데.
살다보면 사건이 많다. 소리는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언젠가 성대의 모세혈관이 터져서 출혈이 생겨 소리는 물론이고 한달이상 알도 하지말라고 하셨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너무 절망했지만 어떻게든 소리를 하려고 늘 이비인후과를 달고 살았다. 외부적인 요인도 굉장히 중요하다. 소리하는 사람들은 몸과 성대에 모든 것이 집중돼 있기 때문에 자극이나 충격이 생기면 소리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예술은 순수하고 좋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대낄 때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소리할 때 너무 행복하고,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참고 할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소리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주는 동호인들이 있다. 얼굴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 소리에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분들을 보면 헛으로 할 수 없더라. 그런 분들이 있어서 이 길을 가는 것이 힘이 난다.

인간문화재는 판소리가 아닌 가야금 산조 및 병창으로 받았다.
19살에 서울와서 공부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러 가지 배우는 와중에 박귀희 큰 선생님께 잡힌 것. 1963년 그 때는 법적으로 전수생 2명만 받을 수 있었고 전수생에게는 훈련비 같은 수당이 나왔다. 박귀희 선생님에게 먼저 온 제자 있었지만 나를 선택해주셨다.

선생님께 배우고 전수조교가 된 후 1989년 가야금 병창 준인간문화재가 됐고, 박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1997년 자연스럽게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홍보가, 적벽가)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마당은 무엇인가.
춘향가에서 춘향이가 매 맞으면서 자신의 소신을 말하던 십장가를 굉장히 좋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흥부가 박으로 부자가 되는 장면이 좋아지더라. 흥부처럼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전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국악에도 여러 가지 장단이 있다. 어떤 장단을 제일 좋아하는지.
어렵다. 욕심이 많아서 어떤 장단이든, 어떤 음악이든, 누가 부르든 다 좋아한다. 장단은 조와 어울려 소리의 분위기를 좌우하는데 그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 거기에 맞게 소리가 다 짜여져 있어 모두 매력이 있다.

급하지 않은 진양조, 우조, 화려하고 엄한 우조, 계면조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서러워 너무 가슴아픈 진계면조와 어울려 들었다 놨다 쥐었다 풀었다하는 자진모리 장단에 쉽게 빠져든다.

바깥 선생님이 외조를 잘한다고 들었다. 어떤 분인가.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 외조다.(웃음) 직물회사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다. 요즘 사람이 아니다. 선비처럼 착실하고 반듯하게 사는 사람이다. 말이 없는 편이라 예전에는 이 사람이 나에 대해 아는 건 뭘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했는데 평상시 내색하지 않고 묵묵하게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옆에서 한 마디씩 해준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조언을 많이 구한다.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
14살쯤 제일 가까운 진주에서 열리는 개천 예술제에 갔다가 그 사람이 나를 봤다. 당시 같이 다니던 강백천 선생님께 어디에 편지하면 받아볼 수 있냐고 물어서 내가 다니던 국립국악원 주소를 알려줬단다. 편지가 왔는데 나보다 4살 연상이고, 글씨도 반듯하게 잘 쓰고 자기소개도 잘하더라.

이듬해 예술제에 갔다가 그의 친구가 편지주인공 만나보라고 하고 궁금하기도 해 여관 뒤 촉석루에서 처음 봤다. 방자(그의 친구)가 훨씬 잘 생겼더라. 시원시원하니.(웃음) 이 사람은 말도 잘 못하고 부끄럼이 많았다.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께 배우고 싶어하고, 이미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제자를 받아들일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제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첫째 음악성이 있어야 한다. 조금 가르쳐보면 판가름 할 수 있다. 음악성이 없으면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서로 시간 낭비다.

첫째 음악성이 있어야 한다. 조금 가르쳐보면 판가름 할 수 있다. 음악성이 없으면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서로 시간 낭비다.

제자 중에는 김지숙이 가장 오래 배웠고, 정미정, 서정금, 김유경 등 많은 제자들이 있다. 오래도록 놓지 않고 열심히 하는 제자들이 사랑스럽다. 임현빈은 좀 늦게 들어왔지만 기대를 걸고 있고, 한승석은 늦게 시작해 내게서 4마당을 배웠고, 5마당을 제일 먼저 끝냈다. 느낌으로 받아들여 배우는 사람도 있지만 승석이는 체계적으로 배워서 소리를 하는 제자다.

제자들이나 국악을 하는 많은 학생들이 지금 당장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음악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한다는 자체가 행복하고, 특히 우리음악을 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면서 계속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

국악은 아직도 대중들에게는 어려운 장르인 거 같다. 요즘 젊은 국악인들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국악의 퓨전화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국악을 퓨전화하는 사람들의 기본 정신이 걱정이다.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서 원래의 것을 훼손시키지 않고 우리의 것에 녹아들게 하는 올바른 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 것보다 외래 음악이 주가 되는 음악을 만들어내면 결국은 우리 것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위험이 있다.

특히 우리의 것이 뚜렷하지 않은 음악을 어릴 때부터 잘못 듣고 따라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가락인 도라지, 아리랑이 전혀 다른 음악으로 만들어질까봐 걱정이다.

음악도 서두르면 안된다. 우리 전통 국악은 세계 어느 음악에 비해도 뒤질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의 기능적인 면보다 인간에게 가까운 정서적인 면이 강해 외국인도 우리 국악을 좋아한다.

 이러한 특징을 잘 살리면 국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것에 대해 정확히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국악인이라면 전통을 지키면서 대중들이 어렵게 느끼는 기존 국악을 쉽게 풀어내 누구나 부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우리 전통 국악을 쉽고 재미있게 느끼고 사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요즘처럼 속도가 굉장히 빠른 시대에 좀 여유롭고 인생의 깊이가 들어있는 우리 음악을 접하다보면 철학적인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국악이라는 음악으로도 어떤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TV에서 국악 방송이나 우리 음악이 나오면 외면하지 말고 한 번, 두 번 들어봐라.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네 소리에 대한 애정과 한에 대한 정서가 서려 있기 때문에 조그만 알아도 감흥은 배가 된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몸으로 가락을 받아들이고 느끼면 금방 국악 매니아가 되실꺼다.

학교 수업시간에 우리 전통 악기나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어릴 때 많이 접하면 어려워 하지 않고 관심가질 사람이 많을 텐데.
우리 때와 달리 요즘 어린이들은 유치원, 어린이집부터 다닌다. 그 곳에서 우리 국악을 의무교육화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별한 교습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접해 낯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 악기 하나 정도는 선택해서 다뤄 리듬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 장단이 낯설다고 하지만 느낌이나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외국음악에도 같은 장단이 많다. 덩더덕쿵덕과 딴따라라라처럼...

국악하는 사람들이 졸업하면 할 게 없는데 국악인들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유치원 선생에게 국악 교육을 시키거나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강사 등을 할 수 있으니까 여러모로 국악의 발전에 좋은 점이 많다. 국악을 배워도 쓰일 때가 없는데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나.

소리인생 50년. 그간의 활동을 돌아봤을 때 가장 큰 보람은 꼽는다면.
판소리라는 한 곳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여러 가지 환경에 감사드린다. 나이 들도록 계속 우리 음악을 이어가니까 주변에서 대단하게 봐주는 것도 감사하다. 좋은 선생님들을 뵙고 선생님들께 많은 것을 배운 것이 복이고 행운이다.(명인 주광덕, 김소희, 박봉술, 정광수, 성우향, 박귀희 등 명창급 소리꾼이 모두 그녀의 스승) 국악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순수해서 그런 분들과 함께 작업할 때는 스트레스가 없다. 너무 행복하다.

아쉬움이나 후회도 있을텐데. 이를 바탕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내 소리 하나 제대로 하기에도 벅차, 발성법 등 판소리에 대해 체계화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것들, 이론적인 것들은 더 공부해서 대중화를 위한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가고 후배들이 어떻게 가닥을 잡고 이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전수해줘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후손들이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환경 마련하는데 힘을 쏟고 싶다. 나아가 그렇게 배워서 실제 무대에서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앞장서는 것이 목표다. 국악을 체계화 시키는데 내 힘이 미치기를 희망한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음악이라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강과 체력을 유지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소리를 들려주고 함께 하고 싶다.

나는 소리를 하고 사람들은 내 소리를 들으면서 슬플 때 같이 울고 기쁠 때 같이 웃고... 그러기 위해서 영어를 일상화해서 쓰는 시대에 한문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판소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판소리 곡을 많이 만들려고 한다.

인터뷰 이은영 국장 young@sctoday.co.kr
정리 및 사진 이소영 기자 syl@sctoday.co.kr

안숙선 명창 약력

안숙선 명창이 걸어온 길

1949년 전북 남원 출생
1957년 강순영에게 가야금 산조 사사
1970년 김소희 문하 입문(흥보가, 춘향가 사사)
1973년 박귀희에게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사사
1979년 국립창극단 입단
1986년 판소리 완창, 다섯마당 공연
(박봉술-적벽가, 정광수-수궁가, 성우향-심청가 사사)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 준보유자, 1997년 보유자
1997~2000년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역임
1998년 용인대 국악과 대우교수
2000년~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
2004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수상경력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1987년 KBS 국악대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8년 프랑스문화부 예술문화훈장
1999년 옥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