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충무로야사]-1960년대 충무로와 영화계-
[연재-충무로야사]-1960년대 충무로와 영화계-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09.10.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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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대중가요 ‘서울야곡’ 중에서)

특유의 저음과 빠른 템포의 음색으로 ‘서울야곡’을 불러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수 현인의 노랫소리가 메아리치던 당시의 충무로는 한마디로 풍성했고 활기가 넘쳤다.

영화사들과 극장이 여기저기 밀집해 있던 충무로와 퇴계로, 명동 등에는 언제나 영화인들이 북적거렸다. 특히 충무로3가 주변은 수많은 다방과 까페, 대포집,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영화배우 지망생, 감독, 시나리오작가, 제작자, 지방 흥행사 등 전국 각지에서 마치 장꾼들처럼 모여들었다.

나운규·윤봉춘·최인규·이규환 등 1세대 감독들의 뒤를 이은 신상옥·유현목·김기영·홍성기· 이강천·이병일 등의 2세대 감독들이 쉴 새 없이 수많은 작품을 겹치기 연출을 했고, 이들의 조감독을 거친 3세대 감독들이 새롭게 합류했다. 김수용·이만희·정진우·임권택·강대진 등의 영화감독 데뷔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 영화감독뿐만 아니라 다른 스태프를 비롯한 캐스팅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우 신성일
신성일·신영균·문정숙·김지미·최은희·이민자·양미희·도금봉 등 뉴스타들이 대거 등장했고, 시나리오 작가군도 최금동·오영진·한운사·유두연 등의 뒤를 이어 신봉승·김지헌·이형우·임하·윤삼육·허진·유동훈·김하림 등이 새로운 콘셉트로 신선하고 이채로운 시나리오를 들고 나왔다.

이렇듯 시대 조류상 자연스럽게 신세대가 합류하고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다른 분야도 새로운 인력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 군상들은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현상은 한때 명동과 동대문 등 서울 주요 상권이나 번화가 등에서 활동하던 주먹패들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으로 인해 조직이 와해되면서 근거를 잃고 대거 영화가로 몰려들었다. 그런 현상은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어 지방 흥행사들의 연고를 타고 부산·대구·마산·광주·목포·인천 등에서 주먹으로 풍미하던 수많은 어깨들이 상경해 충무로로 몰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충무로가 전국 주먹패의 본산지인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상황이 상황이었고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남이가?’하는 경상도식 단합구호처럼 자연스럽게 서로 결속하고 동화했다. 이들이 맡은 역할은 대부분 제작부장이나 연기자의 매니저, 당좌수표나 약속어음할인업자 등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여러 대학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다가 제적당하거나 당국에 의해 지명수배를 받던 소위 ‘도바리(당국의 수배를 피해 다니는 운동권학생을 지칭함)’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학사주점사건이나 청맥잡지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필자는 그 당시 대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무성영화 시대부터 대학생 때인 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는 물론 외국 영화까지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보았을 만큼 영화 마니아적 측면은 있었으나 필자는 결코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갈림길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배우 김지미
필자는 고교를 졸업한 후 이 대학 저 대학을 기웃거리다가 당시 유일한 예술대학이었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기로 했다. 이유인즉 그 대학엔 문단의 거목이었던 소설가 김동리·이범선 등과 박목월·서정주와 같은 저명한 시인들이 교수진들로 망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나 소설가가 꿈이었던 필자는 당시 중학생 잡지인 ‘새벗’과 고교생 잡지인 ‘학원’ 등에 시와 산문 등을 투고해 뽑힌 적이 있어 기고만장해 있었다. 입학시험을 치른 결과 뜻밖에도 수석이라는 예상치 않은 통보가 날아왔다. 아마도 실기시험과 새벗·학원 등 잡지에 뽑힌 작품들이 큰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필자가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점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문예창작과에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김하림 군을 만났던 것이다. 김하림 군은 후일 백여 편 이상의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KBS-TV문학관’과 ‘MBC베스트셀러극장’은 물론 각 방송국 TV연속극만도 수십 편을 쓴 영화계와 방송계에서도 저명한 작가가 된다.

내가 대학에서 이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었거나 교수님의 권유에 따라 대학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김하림 군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생의 큰 변화를 준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가 작고할 때까지 영화처럼 숱한 에피소드를 남기며 지겹도록(?) 동고동락했으니까….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