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몇 송이면 충분한 삶"
"국화꽃 몇 송이면 충분한 삶"
  • 양문석 기자
  • 승인 2009.10.27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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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대모(大母) ‘정이가네’ 정복남 사장, 힘들수록 주위를 먼저 둘러 봐야...

오후 5시, 마로니에 공원에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찾아 든다. 젊음과 낭만, 추억이 하나되는 거리 대학로. 1985년 5월 종로 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 지역특성을 살려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 개방되기 시작하면서 '대학로'란 이름을 얻게 된다. 그 대학로를 20년간 지켜온 ‘대학로의 대모(大母)’가 있다. 주위 사람에게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며 대학로 거리의 문화행사와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해 발로 뛰고 있는 ‘정이가네’ 정복남 사장(54세,여,사진)이 그 주인공이다.

대학로를 짝사랑한 여인

정복남 사장은 대학로문화발전위원회 이사장직을 8여 년간 엮임했을 정도로 대학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고,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대학로 유명인사인건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하다. 대학로에서 그의 밥을 안 먹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감싸왔다. 가히 대학로의 터줏대감이자, 대모라 불릴만한 이유다.

▲대학로의 대모(大母)라 불리는 '정이가네' 정복남 사장

하지만 정사장은 최근 운영 중인 식당을 대폭 정리하는 등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80년대 초부터 대학로에 터를 잡았는데, 지금처럼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애요. 인사동, 청계천, 삼청동 등 인근 상권의 발달로 인해 대학로 상권이 많이 죽었습니다.

게다가 문화지구 지정으로 인해 상권 활성화가 쉽지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현재 대학로 문화 발전 보다는 거리 미관에 오히려 많은 자금이 투입되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이는 문화와 예술의 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의미의 대학로 발전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게 주변 분들의 말씀이세요”

그는 대학로를 걷다 보면 붐비는 인파들로 인해 어깨를 부딪히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면서 서울 문화예술의 중심으로서 시절을 풍미했던 먼 옛날의 대학로를 잠시 추억해 보기도 한다.

정 사장은 대학로의 토박이는 아니다. 포항의 유복한 선주의 맏딸로 태어나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집안에 어려움이 닥친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의 고깃배가 풍랑으로 파산한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선원들을 위해 집마저 다팔아 보상해 준 덕(?)에 정 사장은 14살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시골에 남겨 둔 다섯 명의 어린 동생과 부모를 위해 밤잠을 설치며 일하기도 했다.

“일자리가 없다고 방황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볼때면 힘든 일은 피하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경기불황으로 급여가 많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달 월급으로 쌀 한가마니는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정 사장은 한달 내내 밤새 일하고도 쌀 한가마니 사기 힘들었던 배고픈 시절을 돌이켜 볼 때, 요즘 젊은 친구들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반드시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포은 정몽주의 16대손답게 “항상 정직하고, 한우물을 파고, 한 주인을 섬겨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한 명의 사장을 30년간 모시기도 했다. 그곳에서 연간 15억의 순익을 낼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훗날 사장이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높이사, 경영권을 넘겨주기에 이른다.

한번 믿으면 그만이죠

정 사장은 한 번 고용한 사람을 이제껏 한 번도 내보낸 일이 없다. 대학로 ‘낙산가든’ 시절 한글을 모르는 직원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직업 특성상 손님들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간관리자가 해고를 건의했지만, 그는 “내보내고 싶으면 네가 글을 가르쳐서 내보내라” 며 호통을 쳤던 일화도 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채용했지만 이미 내 식구가 된 사람을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그냥 내 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 직원에게 글을 가르쳤고,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직원은 가장 친절한 직원이 됐다고 한다. 어떤 위치든 사람을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는 자세, 정사장이 오늘날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을 수 있었던 삶의 철학이다.

이런 진실성은 사업영역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사실 정 사장이 지금껏 번 돈을 남들처럼 부동산이나 주식 등에 투자했더라면 분명 그는 갑부가 되어 있거나 쫄딱 망했을 것이다.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하기에 그의 하루는 짧기만 했다. 돈이 모일 때마다 늘 새로운 음식점을 만들어 고용을 창출해 부를 나누는 길을 선택해 왔다.

사업상 일본을 가끔 오가던 그가 일본의 장관들이 25평짜리 아파트에 산다는 말에 감명 받은 뒤 택한 길이었다.

정 사장은 “혼자 10억짜리 아파트에 살면 뭐 하겠는가? 그 돈을 깔고 앉아 있느니 일거리를 만들어 인테리어업자부터 종업원들까지 여러사람들이 함께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며 지금까지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한다.

경기불황 및 대학로의 쇠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로서 하기 쉬운 말은 분명 아니다.

열망이란 이름의 무지개

정 사장은 많이 배우지 못했다. 아니 배울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만큼은 일곱 빛깔 무지개로 세상을 수 놓았다.

▲정 사장이 그동안 여러 학교로부터 장학금 기부를 통해 받은 증서

환갑을 눈 앞에 둔 그는 영어는 물론 일어, 한자까지도 줄줄줄이다. 초등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더 이상 진학을 못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의 페이지는 접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이 모든 것을 해냈다. 이후 그가 장학사업에도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인지 모른다. 그동안 방통대, 동성고, 성균관대, 서울의대 등 대학로 인근 여러 학교에 장학금을 주며 남다른 선행을 해왔다.

▲활발한 장학금 지원 활동을 통해 정 사장은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고 있다. 장학금 협정서(사진)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지나가다 인사할 때의 눈망울과 편지를 통한 감사의 마음을 받았을 때 한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은 대학로 경기가 예전만큼 좋지 않아 어렵사리 한두 군데로 축소시켰다. 정 사장은 이점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 한다. 형편이 나아지면 장학사업은 더 확대해야 한다는게 그의 소신이다.

사랑, 희생... 대학로가 살아나는 길

정 이사장은 식당 경영 뿐 아니라 대학로의 문화발전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학로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세계적인 명소로 발전시키고 가꾸어 나가는 것에 열정을 쏟아 왔다.

한때 ‘대학로 문화발전협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으로 ‘협회를 위원회’로 법인화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 후 정경균 박사가 맡았다가 다시 3대 이사장으로 복귀했고 정 사장은 ‘대학로 문화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연극계를 지원하기도 했다.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인사동이 전통문화지구가 됐듯이 연극으로 문화지구가 된 대학로에서는 연극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대학로 '정이가네' 전경

경기악화로 인해 스스로를 희생해서 대학로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장기적인 경기악화는 물론 대학로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허가 문제 등 상권 확대에 제약이 많아진 이후로 다들 자기 앞가림 하기도 힘든 상황이더군요. 게다가 청계천 복원이 된 후부터 대학로 사정은 상대적으로 안좋아졌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만 대학로는 변할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의 난국을 벗어 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대학로로 통하는 길을 일방적으로 길을 막아버린 것을 크게 아쉬워하고 있다. 대학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뜻을 모으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학로 문화발전에 관한 그의 생각은 매우 개방적이다.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 당구장, DVD방, PC방, 노래방 등을 퇴폐적으로만 규정하고, 규제만 하려 든다면 젊은이들이 와서 끼를 분출할 수 있는 해방구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오픈마인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청계천 복원 이후 창경궁 쪽으로 돌아가는 버스들을 대학로로 올 수 있도록 한다면 줄어든 대학로의 유동 인구수를 늘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밖에도 음식점 주인들이 앞장서서 연극 포스터도 가게 내에 붙여주며 서로를 홍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만 대학로는 살아납니다. 대학로 소극장이 100여 개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안내 지도조차 없다는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벽에 한계를 느낀 그는 현재 음식점 경영에만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면 언제든 대학로 발전을 위해 직접 앞에서진 않을지라도 묵묵히 뒷받침할 수 있는 마음은 가슴 한켠에 고이 담아 두고 있다.

이외에도 전철역 1,4번 출구 앞에 ‘스크린 터치’를 통한 대학로 안내도를 만들어 극장과 음식점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연극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지하주차장도 건립, 자전거 도로를 활성화 등 대학로의 발전을 위해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꾸준히 제시해 왔다.

국화 꽃 몇 송이면 더할 나위 없는 삶...

정 사장은 최근 ‘내가 죽었을 때 무덤에 국화꽃을 가져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과연 올바른 삶이란 무엇일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까?’에 대한 고민을 종종 하게 되네요. 다른 모든 분들처럼 삶에 대한 애착 내지는 의지를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다는데 스스로 감사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매사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좋게 생각하고 어려울 때를 생각하며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국화꽃 몇 송이는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웃음)

그는 생을 정리할 시점이 온다면 그동안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감사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찾아와 국화꽃 몇 송이 올려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만족스런 삶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정 이사장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 ‘작은거인’이다. 인정 많고 포용력 넓은 여장부다. 어둠이 내리 깔리고 비로소 제 생기를 분출하기 시작하는 대학로의 길목에서 커다란 꿈을 꾸는 대학로의 대모는 그렇게 환히 웃고 있었다.(☎ 정이가네 02-745-5020)

서울문화투데이 양문석 기자 msy@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