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작가에게 있어서 역사란 무엇인가?
[윤진섭의 비평프리즘]작가에게 있어서 역사란 무엇인가?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9.05.0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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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역사적 동물이기도 하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행적을 담은 인명사전들로 넘치고, 해마다 연말이면 타임지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이 그럴듯한 표제어로 주목받는 사람들을 선정해 발표한다. 이를테면 '미래를 이끌100인의 차세대 리더' 등등이 그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가 역시 사람인 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반대로 자기애가 유난히 강한 예술가들은 타분야의 그 누구보다도 더 공명심이 강하고 자기현시욕이 센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도모해 세간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른바 표절을 비롯하여 대작, 도용, 위조, 사기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뒤로 한 발 물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들은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예술가로서 그러한 일들은 애초부터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양심의 문제로서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 즉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 따위),  만일 알고도 그랬다면 반역사적인 자승자박의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스스로를 옭아맨 셈이 된다.

역사성과 관련시켜 볼 때 예술가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은 이른바 진취성이다.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정치적 아방가르드 의식이나 도전성, 저항의식, 비판정신 등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위험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한 니체의 경구는 실험적인 삶을 살라는 말에 다름아니며, 그런 점에서 평생 일관된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정신이 최고의 덕목으로 요구된다. 전위의 선구자가 되는 데에는 따라서 많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자니 자연 궁핍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세상의 외면과 몰이해, 편견, 소외, 심리적 불안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길은 스스로 택한 형극의 길이며, 미래에 찾아올지도 모를 물질적 보상조차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만이 택할 수 있는 운명의 길이다.

▲ 2018년 10월 13일 오후 4시에 앙화대교 남단 당산역 부근 다리밑에서 열린 <한강변의 타살> 재연장면 (사진=윤진섭 제공)

최근 몇년간 메이저급 갤러리들에서 초대를 받은 일부 작가들은 그런 점에서 볼 때 한 때 전위작가였었다는 측면에서 역사적 전위작가들일 뿐이며, 과거의 작품을 재탕,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몰가치적이며 반역사적이다(제프 쿤스와 같은 외국작가들도 이런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는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 돼 버렸다.) 그들은 옛날의 영화에 취해 지금은 고전으로 취급된 옛노래를 불러댈 뿐, 심금을 울리는 전위적 신곡을 발표할 의지와 열정도 없어보인다. 따라서 과거 열정의 결과가 가져다 준 금전에 취해 눈이 먼 상태다.

진정한 전위예술가들이 드문 게 오늘의 현실이다. 자본의 교활한 간계로부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거대한 힘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비판정신의 소유자가 가뭄에 콩나듯 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비엔날레는 본연의 소명감을 망각하고 표류 중에 있으며, 미술은 시장가치에 매몰되고 있다.
 

'불의 프로메테우스'와 '시지프스의 신화'를 신봉하는 전위주의자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본성(야성)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속악한 무소불위의 힘을 견제하고, 그럼으로써 굼뜨고 게으른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적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각성제를 주입하는 신성한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험의 국면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