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근현대 한국 춤 역사의 증인-김민자(金敏子,1913-2012)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근현대 한국 춤 역사의 증인-김민자(金敏子,1913-2012)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9.05.0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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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우연히 무용가 김민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40여 년간 서울 종암동의 한 암자에서 외롭게 지내다 99세를 일기로 동부시립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2까지 내가 살았던 곳이 바로 종암동이었고,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때도 그 시절이었다. 그것도 인연인지, 가까이에 살았던 무용가 김민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영산법화사 종암도량은 1967년에 개설되었고, 김민자는 아마도 1972년부터 그 곳에서 생활을 한 것 같다. 무용수 시절 조명에 각막을 다친 후유증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고, 나중에는 다른 눈도 거의 보이지 않아 거동이 몹시 불편했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클래식음악을 들으며 소일했다는 근현대 한국 춤 역사의 증인 김민자 선생의 말년이 눈에 아른거린다.

김민자는 신무용의 두 개척자라 불리우는 최승희와 조택원의 춤 파트너로 이름을 날린 전문무용수였다. 1930년 경기고녀(현 경기여고)에 재학 중이던 14세에 무용에 입문하며 최승희의 제자가 되었다. 최승희(1911-1969)가 다시금 동경으로 가던 1933년 김민자도 함께 떠났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모던댄스를 배웠고, 일본 발레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러시아 무용가 옐례나 파블로바(1899-1941)에게 발레를 직접 배웠다. 옐례나 파블로바는 1931년 7월 4~5일 경성 희락관(喜樂館)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본격적인 발레무용을 선보인 러시아 무용가다. 1920년 일본으로 귀화한 후, 많은 일본인 무용수들을 길러내며 조선 출신 백성규도 가르쳤다. 김민자는 최승희와 2인무 <청춘> <희망을 안고> <조선풍의 듀엣>, 조택원과의 2인무 <만종>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화려하게 등장은 했지만 최승희나 조택원의 그늘에 가려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연극평론가 유민영이 1986년 2월 객석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김민자가 최승희를 따라 일본에 갔으나 공연 기회를 갖지 못한 이유는 최승희 뒷바라지 때문이었다. 최승희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무용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민자 덕택이었다. 몇 년이 흘러도 최승희가 해외공연에서 돌아오지 않자 김민자는 조택원 귀국공연의 파트너 제안을 수락하여 공연하였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만난 최승희는 김민자를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용평론가 이동우는 조선춤을 세계에 알린 두 자유인으로 신여성 최승희와 모던보이 조택원을 거론하며 둘을 세기의 라이벌이라 표현했다. 자신의 제자이자 춤 파트너 김민자가 라이벌 조택원의 파트너로 출연한 사실을 안 최승희는 조택원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내고 배신행위(?)를 한 김민자에게 근신조치를 내렸다. 결혼을 핑계로 일본에서 돌아온 김민자는 이후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다.

김민자는 1939년 서울발레연구소를 설립해 후진양성을 시작했다. 모던댄스, 발레, 조선춤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배우고 춤추었던 예인 김민자는 1940년 일본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봄처녀> <금지의 춤> <초가삼간> <성모의 명상> <무지개> <장고춤> <검무>를 레파토리로 자신의 첫 번째 무용공연을 열었다.

이후 김민자는 무용수의 길을 포기하고 국내 최초의 악극단인 조선악극단의 안무자로 활약하였다. 1933년에 설립된 오케(Okeh)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음반발매 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1939년 조선악극단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 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악극단은 “OK가요댄싱팀” “OK그랜드 쇼단” “음악무용연구소” 팀을 합쳐서 창단된 매머드 단체로 일본 동경과 오사카, 중국 북경과 상해 등지를 순회공연하며 절찬을 받았다. 음악무용연구소에서는 무용수로는 강윤복, 최선희, 주리가 있었고 안무자로는 김민자와 홍청자가 있었다.

광복이 되고 6.25가 발발하면서 김민자는 검사였던 남편이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게 된다. 슬하에 자녀도 없었다. 전후 무용계에서는 김백봉, 송범, 주리, 조광, 이인범 등이 활약을 했고 일본에서 백성규의 제자였던 임성남의 등장으로 고전발레가 정립되기 시작하면서 김민자 등 이전 세대들은 밀려나게 되었다. 1962년 1월 13일~17일에는 예그린악단의 창립공연 “삼천만의 향연”이 올려졌다. 지휘에 김생려, 안무 김민자, 작편곡 김희조, 연출 이기하 등 예그린 합창단과 무용단, 관현악단이 총출동해 우리의 고전과 민속, 흘러간 유행가 등 32곡을 드라마틱하게 엮었다. 이후에도 봄잔치, 여름밤의 꿈 등 가무극 공연이 이어졌다가 다음해에 해체되었고 재창단된 해는 66년으로 작품 <살짜기 옵서예>가 만들어졌다. 당시 단장은 박용구로 작사에도 관여하였다. 제작비 300만원, 출연자 300명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나 68년 운영난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악극단에 이어 예그린악단의 안무자로 활동했던 김민자는 1966년 한국무용협회 공로상을 받은 뒤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마감하고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