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베니스의 상인', 시대는 지났지만 인간 본성은 남았다
[공연리뷰] '베니스의 상인', 시대는 지났지만 인간 본성은 남았다
  • 조두림 기자
  • 승인 2019.05.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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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성 다룬 작품 … 고전이 여전히 현대와 소통할 수 있는 이유
지난 28일부터 내달 1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

“증서대로!” 
원한을 품은 한 남자의 절규가 법정을 가득 메운다. 16세기 이탈리아 수상도시 베니스의 이방인, 유대인 고리대금업자가 법에 호소한다. 사회적, 종교적 차별로 악에 받친 남자의 호소에 대응해 “자비를 베풀라”는 재판관과 법정에 자리한 내국인들의 서늘한 반응은 대치점에 서 있다. 증서대로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1파운드 살’을 외치며 매섭게 칼을 가는 남자와 법적으로 정당한 요구라는 피고 측 변호인의 인정(?)으로 피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재판은 끝을 향해 가고 극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돈다. 피고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이유는 무엇인가.

▲ 서울시뮤지컬단 '베니스의 상인' 에서 샤일록(왼쪽)과 안토니오(오른쪽)의 재판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 서울시뮤지컬단 '베니스의 상인' 에서 샤일록(왼쪽)과 안토니오(오른쪽)의 재판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밧사니오’는 벨몬트에 사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상속녀 ‘포샤’에게 구혼하기로 한다. 하지만 분에 넘치는 화려한 생활로 이미 빚더미에 나앉은 밧사니오는 절친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거액인 3천 더컷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선박은 모두 출항 중이고 수중에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했다.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던 안토니오는 평소 멸시와 천대를 일삼았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기로 한다. 그간의 모욕감과 수치심에도 사회적지위상 참을 수밖에 없었던 샤일록은 돈은 빌려줄 수 있지만, 조건 하나를 반드시 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한 내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안토니오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의 1파운드 살을 지불할 것”이라는 담보. 멈칫하는 밧사니오와 달리 안토니오는 곧 출항했던 배들이 부를 쌓아 돌아온다며 오히려 친구를 안심시킨다.

인간의 확신이란 예기치 못한 사고 앞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풍랑으로 안토니오의 배가 모두 좌초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말해 안토니오는 샤일록에게 1파운드 살을 떼어주게 된 상황에 내몰렸다. 한편 금, 은, 납 함 중에 포샤의 초상화가 담긴 함을 열어야만 결혼할 수 있는 운명의 함 선택과 포샤의 마음까지 얻어 행복감에 젖어있던 밧사니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오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극은 몇 차례 분위기가 반전되는데 여기서도 사랑으로 물든 분위기가 또 한 번 위기감으로 바뀐다. 포샤가 지원해준 자금으로 안토니오를 구하기 위해 떠난 것은 밧사니오만이 아니었다. 밧사니오의 뒤를 따른 것은 포샤였다.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씬에 이르러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변호인으로 위장한 포샤는 안토니오를 위한 변론을 펼친다. 하지만 어째 좀 이상하다. 베니스 법에 따르면 샤일록은 증서대로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생명을 내어주는 듯한 변론을 이어간다. 하지만 샤일록이 말 그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승소의 지점에 도달하기 직전 또 한 번 극적 반전이 펼쳐진다. 1파운드의 살을 떼되 피는 절대 흘려서는 안 된다. 그것이 샤일록이 그토록 강조한 ‘증서대로’이기 때문이다.

▲ 서울시뮤지컬단 '베니스의 상인'에서 김수용이 샤일록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사진=세종문화회관)
▲ 서울시뮤지컬단 '베니스의 상인'에서 김수용이 샤일록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사진=세종문화회관)

샤일록은 좌초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극의 결론에서 재산, 재판, 딸을 잃은 샤일록과 전복한 줄 알았던 배 모두 무사하며 우정과 재산 등 모든 것을 되찾은 안토니오는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내 이 모든 소동을 불러일으킨 거센 소용돌이 바람이 인물 간 얽히고설킨 사랑, 우정, 원한, 증오, 기쁨, 행복, 애통 등 모든 감정도 풀어내 환기 시키며 막을 내린다.

서울시뮤지컬단이 선보이는 <베니스의 상인>은 몇 가지 관람 포인트가 있다. 먼저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특히 샤일록을 맡은 김수용의 열연이 눈에 띈다. 최근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에서 애절한 사랑과 함께 광기에 물드는 최대치 역으로 관객들의 극찬을 받은 바 있는 김수용은 이번에도 높은 연기 집중력와 몰입도를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숨을 죽이게 하는 연기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과 좋은 호흡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무대디자인도 주목할 만하다. 극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법정씬의 무대연출도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관람객들에게 극의 장면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데 한몫 톡톡히 한다. 이번 무대디자인은 <지킬 앤 하이드>부터 <웃는 남자>까지 호평을 받은 무대디자이너 오필영이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욕망이 성취될 때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는 고전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극복하고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16세기 셰익스피어의 위트가 올여름 서울을 찾았다. 원작의 시대는 지났지만 희로애락 및 사랑과 우정, 원한과 탐욕 타인에 대한 적개심 등 나약한 인간의 본성과 감정은 그대로이기에 고전의 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도 어디선가 들끓고 있는 감정들이 극에 녹아져 있기에 21세기 우리에게도 <베니스의 상인>은 살아 움직인다. 

박근형 연출은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에 대한 영국인들의 시선이 스며든, 16세기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번 뮤지컬은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고 질문하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라며, “탐욕과 악의 상징인 샤일록은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결국 인간 보편성의 상징이다. 돈에 대한 욕망은 우리 모두에게도 남아있다. 한편 악을 징벌하고자 하는 인간의 선의지는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이런 이중성을 지닌 인간에게 자비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고 작품방향을 설명했다.
 
<베니스 상인>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내달 16일까지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