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석의 동시대 음악이야기]BTS와 한국 대중음악 생태계
[장용석의 동시대 음악이야기]BTS와 한국 대중음악 생태계
  • 장용석 /문화기획자
  • 승인 2019.05.2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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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석 /문화기획자

오월은 항상 마음이 아린다. 그냥 아린게 아니라 시름시름 병을 앓는다. 나뿐 만 아니라 그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렇다. 5.18을 겪었던 세대로서 살아남았던 죄스러운 맘을 항상 마음 한켠에 담고 산다. 나는 앞서서 나간 사람도 아니었고 죽음과 공포를 무릅쓰고 분연히 싸웠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있었던 까까머리 촌놈 고 1학년생이었을 뿐이다. 그 때 이후로도 광주의 여느 동료들처럼 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5월을 기억하고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5.18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은 저마다 각각의 방식으로 그 하나하나가 모여 지금의 5.18이 된 것이다.” 오월은 세상이 가장 찬연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계절이지만 적어도 내겐 아직도 계절이 아닌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다.

이 아름답고 아픈 계절에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회자되고 있다. 그들의 경이적인 성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과연 그들의 음악엔 무엇이 있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까. 모든 사람들이 방탄소년단의 성과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한다. 세월호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부조리와 야만의 시간은 계속해서 따로 또 같이 시작되고 있다. 팔길이원칙은 그저 유명무실한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처벌받을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은 나라에 그 무슨 희망과 공정함이 있겠는가. 용서받지 못할 자가 누구인지 몰라 용서할 수 없게 된 이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음악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고 또 하곤 한다.

‘누군가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때론 음악은 표피적이며 공허하게만 들린다. 어쩌면 이런 시절에 살고 있기에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삶의 고단함을 핑계로 육신과 정신의 나태함을 애써 변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방탄소년단의 음악만이 대한민국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이른바 K-pop만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여기 이 땅에 그들의 음악 못지 않게 매력적인 다양한 음악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솔직히 BTS의 음악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음악은 음악보다 현상 그 자체로 이해해야 비로소 BTS음악의 실체를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쏟아내고 있는 텍스트와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팬덤을 도대체 어떻게 몇마디의 말로서 얘기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음악이 BTS 하나로만 회자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과 우려가 교차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자연 생태계에 생물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생태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장르, 어떤 분야이든, 자연적 독점이든 사회적 독점이든 결국은 그 생태계는 공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익숙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의 예술가 스스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쏟는 노력과 열정을 시장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려 있을 때 비록 주목받고 대우받지 못하는 예술일지라도 대중과 예술의 간극을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적어도 우리같은 사람들은 박수와 관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적인 측면에서도 공존을 위해서도 다양성은 반드시 지켜야할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음악 생태계에도 BTS 못지 않은 다양하고 건강한, 예술적이면서도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아티스트와 음악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정말 사랑스럽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문득 그리고 매일 매일 깨닫곤 한다.

최근 몇 년간 내게 있어 최고의 음악은 ‘최고은’의 음악이었다. 데뷔 1집인 EP(Extended Play, 싱글음반보다는 길고 보통의 앨범보다는 짧은 음악 CD)의 첫 곡을 들었을 때 ‘아 이것은 뭐지?’라는 호기심과 더불어 점점 빠져들게 하는 그 무엇의 매력이 최고은의 음악에는 들어 있었다. 그리고 2017년에 발표한 노마드 신드롬(Nomad Syndrom)은 최고은 이라는 뮤지션의 정체성을 확실히 대중에게 보여준 탁월한 노작이었다.

앨범 타이틀곡 '하이랜더(Highlander)'는  판소리를 수학했던 자신의 장점과 기량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걸작이다. 노랫말에 표현된 사회적 경험과 문제들은 이 노래를 단순히 트렌디한 노래 한곡으로 흘러 듣지 못하게 하는 긴강감을 불러 일으킨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최고은의 음악이 좋으냐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최고은의 음악보다 최고은이 걸어가는 뮤지션으로서의 가는 행보가 더 좋다. K-pop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이 된 이 시대에 인디뮤지션(이 표현이 적확한지는 모르겠다)으로서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적확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음악은 다양성이 침몰하고 있는 작금의 우리 대중음악씬에 어쿠스틱한 사운드적 실험정신을 기반으로 ‘음악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고 도전적으로 묻고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음악보다 더 신선하고 도전적인 음악을 근 몇 년동안 듣지 못했다. ‘예술이란 기술의 단순한 습득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해석하는 방식이며, 생각하는 방법을 확장하는 일종의 도구로서 기능한다’라는 말은 아마 최고은이라는 아티스트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현재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음악. 일년 전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음악 하나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노선택과 소울소스’가 판소리하는 소리꾼 ‘김율희’와 협연하는 ‘뺑덕’ 이었다. 노선택과 소울소스는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지만 음악하는 사람들에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레게-스카밴드로서 잘 알려져 있는 실력파 뮤지션이다. 하지만 노선택과 소울소스의 리더인 노선택이 내게 오래전 선물한 그들의 전작 앨범 두장은 최근에야 내 귀에 들려졌다.

사실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게 말이야 쉽지 그게 쉬운 것이 아닌 것을 다 안다. 그런데 이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개의 음악이 서로 만나 교묘한 화음을 내고 있다. 노선택과 소울소스의 레게는 그루브하면서도 시적인 느낌을 주는 레게가 아닌 듯 레게인듯한 레트로적인 사운드가 물씬 배어있는 독특한 음악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독특한 사운드가 소리꾼 김율희의 판소리를 만나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소리꾼 중에서 김율희의 판소리가 가장 소울풀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리에서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모습을 발견한다. 기실 판소리야말로 가장 소울적인 장르 아니던가.

 ‘창의성은 전통과 자유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과거의 규칙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과거와 과거의 규칙을 깨는 것도 필요하다’ 라는 알랭 드 보통 말은 BTS에게도 최고은과 노선택과 소울소스, 김율희의 음악에서 모두 똑 같이 적용되는 명제이다. 이땅에 예술이, 음악이 문화예술 생태계가 다양성을 가져야할 이유이자 대중이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음악에서 자유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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