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 인터뷰] 전통과 현대 잇는 유승현 도예가, “삶은 열정적 연주이며 무대 사라질 때까지 노래 불러야’
[서울문화투데이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 인터뷰] 전통과 현대 잇는 유승현 도예가, “삶은 열정적 연주이며 무대 사라질 때까지 노래 불러야’
  • 인터뷰 ·정리/이은영 발행인·김지현 기자
  • 승인 2019.06.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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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기법 고수하는 왕실도예 장인들 꺾였던 꿈 이어주고 싶어”

순간의 ‘반짝거림’ 보다, 매 순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온 도예가가 있다. 유승현 도예가다. 그러나 유 작가를 ‘도예가’로만 한정하기엔 그의 다층적 예술 활동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한마디로 멀티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5살 때 피아노를 처음 만났고, 비올라 등 다양한 악기들을 다뤘다. 현재는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하고 유럽 종탑에서 고안한 악기인 핸드벨(handbell) 지휘자로도 활동한다.

유승현 작가는 1996년 도예에 입문하고 부친으로부터 조선왕실도자기를 승계한 전업 도예가지만 그만의 독창적인 컨템퍼러리로 자신의 작업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학창시절 피아노를 전공하며 음악인의 길을 준비했다. 유 작가의 도자에 표출된 자유로운 조형성과 율동감 있는 그림은 그가 음악을 전공했기에 나올 수 있는 조형성이다. 그의 도자에는 몰디브(Maldives) 해변의 싱그러운 색채가 자유롭게 넘실거린다. 그런가 하면 투박한 금관악기를연상시키는 작품에서는 금방이라도 호쾌한멜로디가 흘러나올 것같다. 음악과 미술이 콜라보 한 독특한 개성의 발현이다.

그럼에도 유 작가는 20여 년간 부친이 내어준 경기도 하남(과거 광주)작업실을 지키며, 왕실도자의 집대성과 도약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왕실도자를 배운 도자장인 2세들과 손잡고 ‘전통도예 전시’를 기획하는 동시에, 전통도예 노하우의 아카이빙을 계획하고 있다.

▲ 유승현 작가가 '축복의 종' 작품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유 작가는 전시기획과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사람은 평생공부해야한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배움을 은은하게 유지하며, 주변의 전파에도 힘쓴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도자교실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글쓰기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독려한다. 그가 자녀들을 통해 확인받은 결과물을 공유하는 것이다. 유 작가는 여러 매체에 글을 청탁을 받기도 하며 책을 낼 정도로 글쓰기에도 뛰어나다. 이는 넛할아버지(부친의 외삼촌)인 소설가 김유정의 문학적 자질을 물려 받은 덕분이리라. 그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김유정의 문학정신을 알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최근에 그는 5명의 여성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책을 펴냈다. 책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에너지를 활용해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았다.

유 작가는 ‘암 선고를 받고 지구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리에 위치했고, 아프고 난 뒤에야 여유가 생겼다’고 담담히 말하면서 ‘삶은 열정적 연주이며 무대가 사라질 때까지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희망을 메시지를 전한다. 고통 속에서도 삶을 대하는 긍정적 태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 유승현 작가가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유승현 작가를 다재다능한 예술인으로서만 표현하기에는 그가 가진 아름다운 품성이 가려질 것 같다. 그는 병마와 싸우는 가운데서도 공감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 절망을 희망의 아이콘으로 바꿔놓는 그를 기꺼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여름의 초입에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10회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인 유승현 작가를 그의 아뜰리에에서 만났다.

먼저 본지의 10회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 수상 다시 한 번 축하드린다. 상을 받은 후 소회를 밝힌다면.

지난 1월 달에 상을 받았는데 현재 6월이니까 반년이 지났다. (상을 받은)이후 왕성한 활동을 했다. 상 받은 것이 꼭 동기가 된 건 아닌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약속을 한 거다. 그 약속을 지키고자 이미 마음에 새싹이 돋았나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나의 이름이 돋보이는 일 보다 다 같이하는 작업을 했다. 차근차근 준비해 (5인의 작가가 함께한)책도 마무리 했다. 인생을 오래 살지 않았지만, 상을 타고, 책 마무리를 통해 내 인생이 정리가 된 기분 이다. 내가 왜 이 작업을 했는지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ㆍ필연적인 것으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부분에 각오가 생겼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

지난 1월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으로 “저 말고도 한길을 가는 장인들이 많다. 도예가들을 대표해 주시는 상이라 생각하고 한국 도예의 과거와 현재, 앞으로의 미래를 잇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

아버지가 전통을 이어가는 도예가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힘들게 사는 도자기 장인들을 많이봤다. 그래서 나는 절대 도예는 안할 꺼라 결심했었다.(웃음)

그러나 (도예가가 된 내가)이제와 할 수 있는 일은 전통과 현대 도예를 잇는 전시를 구상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동료들은 전통을 잇고 있지만, 맥은 점차 끊어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것에 손을 안 대기도 하지만, 도자(공예)자체를 많이 안한다. 특히, (아버지의 도예작업을)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2세들조차 관심이 없다. 주변에 가업을 이어가는 2세들이 좀 있는데, 그들과 손을 잡고 어르신들과 젊은 사람들이 교류하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

두 번째는 도예 기법(노하우)를 전수자료(아카이빙)로 남기는 것이다. 구체적인 구상은 아니지만, 장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통도예 기법을 담은 책을 만들고, 책을 활용해 2세들이 현대에 연결하는 실험을 시도하고 싶다. 그런 계획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고 싶다.

▲ 유승현 작가가 수상 당시를 회상하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경기도)광주는 왕실도자기가 유명한데, (나의 작업실)바로 옆이 남한산성이다. 이 동네는 도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마터만 10여 개다. 왕실에 진상하는 도자를 만들던 장소로, (전통도예)도공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왕실에 진상하는 도자는 기품이 있어야 하기에, 아무렇게나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도예 노하우를 지키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나는 아버지 덕분에 하남에 위치한 이 작업실을 20년 넘게 마음놓고 쓰고 있다. (작업실은)내 놀이터가 아니라 (전통)도자 장인들의 꺾였던 꿈들을 이어주고 싶은 욕심이 담긴 공간이다. ‘하남도예가협회’ 도예전시를 활성화 시키고 싶다. 내 작품과 별개로(전통 도예가)그들의 도자를 집대성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욕심이겠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하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젊고 매력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공모전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아버지 부분이 컸다. 나에게(그 길을) 권해주지 않았다. 나는 학부 때 음악을 전공했지만, 도자기 유약 성질을 더 깊이 있게 배우고 싶어 대학원에 들어갔다. 아버지께선 ‘네가 가진(유약)색이 굉장히 독특한데 (유약 공부를 정석대로 하면)이점이 퇴색 될 것 같으니 학교를 다니지 말라’고 권하셨다.

차라리 엉뚱한 공부를 더 하라며. 그런 아버지가 도자기 선생님이고, 교수님인데 거슬리면서 까지, 단지 ‘반짝거리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 점검은 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그동안 개인전을 10회 이상 했다. 불러주는 데도 다가지는 않았고, 개인전 교육전시 기획은 10회 이상했다. 어떤 기획사에서 소속작가가 돼, ‘정기적으로 전시 하자’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정말로 제대로 된 도자 교육을 받은 건 , 아버지 작업실에 많던 문하생들을 통해서 이다. 문하생들이 10명이면 각각 10명의 스타일을 (가서)보며 저 분은 요기에서 요걸 더 붙이면 좋을 텐데, 저 분은 이걸 더 하면 좋을 텐데 등 혼자 상상을 한 일이 몇 년이 지났다. 살아있는 교육 이었던 거 같다. 아버지를 보며 도예수업의 참 교육을 받은 거다. 참 다행이라고 본다. 거의 40년이 가까이를 본거니까,

아버님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님은 어떤 작가인가.

아버지는 1971~2년 경 흙 가마를 직접 지으신 분이다. 그때 어떻게 만들었냐면, 아버지가 살던 동네에 故 한창문 선생님이 계셨다. 분청사기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재현하신 분이다. (아버지는)그분의 영향을 받고 도자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 흙 가마를 짓기 시작했다. 분청자기부터 시작해, 도예기법 이것저것을 섭렵해 나갔다.

이후, 뜻하지 않은 주변의 난관에 부딪힌 아버지는 광부로 한 4~5년 독일을 갔다 온 다음에, 사업을 하셨다. 안정적으로 사업을 이어오다 어느 날 갑자기 일을 접고 ‘나는 도자기를 할 거야’ 라고 선언하셨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아버지 마음에서 도자기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 일이 30년 전쯤 이야기다. 아버지가 도예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런 소망을 품었다는 걸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 이 작업실(하남) 전부터 아버지는 다른 쪽에 작업실을 짓고, 가마가 생기고 난리가 난거다. 밤마다 아버지는 가마를 떠나지 않으셨다. 가마불을 때고, 몇 날 며칠을 (도자기)실험에 매진했다. 워낙 큰 작업을 해서 가마에 큰 도자만 하나 들어 갈 정도였다. 그동안 당신이 참고, 못 했던 것을 (도예그 안에 다 쏟아 부었다.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서 가마로 가지고 갈 정도였다. 그렇게 한 몇 년을 보냈다. 일 년에 한차례 씩 가마와 굴뚝이 늘어났다.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을 하셨다.

아버지가 추구했던 건 ‘전통도자’였다. 그것도 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고, 오리지널 ‘청화백자’로 말이다.)

아버지는 나와 같은 공통점은 ‘반짝거리게’ 무언가를 어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그러셔서 나는 전통도자기를 하시는 분들은 모두가 다 저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더라. 도자 명인이 될 수 있는 제도도 마련돼 있어 (도전)하면 좋은데, 안하겠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도예)노하우를 나도 전수받고 싶다. 열심히 배우겠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할 자신도 없고, 따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한다고 (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예술혼을 내가 가진 정서에 자유롭게 불사르고 싶다. 아버지는 ‘사람은 평생 공부해야한다’는 주의다. 우리가 딸이 셋인데 아버지는 ‘대학을 4년 안에 졸업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간에 휴학해서 다른 공부를 많이 하면서 그 다음 공부를 하면 더 깊이가 생긴다’고 늘 강조하셨다. 아버지의 교육법은 정말 책으로 엮고 싶을 정도다. 명언들이 정말 많다. 순간순간 예를 많이 들어 주신다. 근데 이런 점은 아버지의 어머니도 그랬다고 한다. 즉. 소설가 김유정님의 누나께서 그런 교육을 하신 거다. 아버지가 나에게 교육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유산으로 물려주신 거 같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데 쉽지가 않다.

음악을 전공을 했고 아버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DNA가 발현돼 도예작가로 작업을 하고 있어서인지 작품에는 음악적 요소가 넘쳐난다.

도자를 만들 때 율동 감을 추구한다. 만지면 딸랑딸랑 소리가 날 것 같은, 율동감이나 리듬감이 드러나는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그런 점이 어린 시절부터 전해 온 것 같다. 작업하면서도 굉장히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서 슬프다. 이런 행복이 내일 똑같이 올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 순간이 행복하고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는 게 정말 좋다.

20년을 이 아뜰리에에서 작업하고 나서야 내 작업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이제야 내 작업실을 개방한다. 내가 행복했던 공간에서 다른 분들이 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금씩 개방하는 편이다.

▲ 안료를 연구한 도자 파편을 모아두었다. 도예 작업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이 스며있다

‘축복의 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작품을 하게 된 계기와 그간 작업 내용들이 궁금하다.

전시회를 할 때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고 전시했는데, 유독 ‘종’ 밑에서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걸 보았다. 정말 행복해 하고, 작품 안에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느낌마저 받았다. 종을 만든 계기는 (눈이 안 보이는 장애우)아이들을 위한 시작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한 마음을 주는 작업이 되었다. 작품제작 동기는 정말 잊을 수 없다. 처음 아이들에게 흙덩이를 주었을 때는 ‘선생님 이게 뭐가 되는 거예요?’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종’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 친구들은 ‘종’의 색조차도 판별할 수 없는데, 종소리를 느끼는 모습에 굉장한 전율을 느꼈다.

다음 전시 때는 종을 조금 더 돋보이게 하고, 전시 때 올만한 분들과 한 달 동안 나와 소통했던 분들의 이름을 넣어, ‘~~을 위하여’를 ‘종’에 적어 전달했다. 반응은 폭발 적이었다.

의미를 부여한 작품 하나하나에 행복해 하더라. 관람객들의 행복한 모습에 내가 더 흡족했다. 크기와 모양을 달리하고, 유약을 다양한 종류로 쓰는 등의 변화를 주니까 이 작업들이 더 재미있더라. 그러다 어느날 보니 ‘종 작가’ 가 돼 있었다.(웃음)

작품들은 ‘김유정문학촌’ㆍ‘대명교회박물관’ㆍ‘명성교회 새벽기도 전시관ㆍ역사박물관’과 사람들이 오가는 축복의 통로에 설치돼 있다. 개인들도 많이 주문해갔다. ‘종’ 인기가 좀 좋은 편이다.(웃음)

김유정 유족으로서 춘천 김유정문학관에서 후원자들을 위한 전시를 열기도 했는데.

‘김유정문학관’에서 처음 유족 전시를 했다. 감사하게도 ‘김유정문학관’에 거의 300분 이상이 정기후원을 한다. 감사의 보답으로 ‘그분들의 이름을 다적어서 전시를 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했다. 이 전시는 많이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서로 도움을 주고 축복하고, 여러 손길들이 모이는 부분에서 그렇다.

▲명성교회 새벽기도전시관에 Blessings BELL이 전시되고 있는 모습

도예작가로 주로 활동하지만 전공한 음악을 살려서 지금도 합창단과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핸드벨(handbell) 연주단을 지휘하고 있다. 벨 지휘는 종 작업을 하면서 종에 관심이 생긴 이후 어느날 연주회 초대를 받고 갔다가 악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단원으로 들어갔다가 7년 지난 후 내게 지휘를 맡겨서 하고 있다. 종의 크기에 따라 음역이 다르고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소리가 나서 마음이 평안해 진다.

김유정의 피가 흘러서인지 문학적 재능도 음악, 미술까지 모두 뛰어나게 잘 해 내는 그 재능과 능력이 부럽기도 하다.

나는 정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천재도 아니고 재능이 없어서 99%의 노력으로 하는 거다. 음악도ㆍ글도 그렇고 도자기도 그렇다. 관심이 있었던걸 포기하지 않으니까 이 자리에 온것 같다. 재능이 없어서 열심히 하고 노력하다 보니 조금 자신감이 붙은 것 뿐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못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해서 그게 전공이 된 것이다. 운도 좋았고ㆍ배경도 좋았고ㆍ천운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부터 감사함을 갖고 정말 아끼고 최선을 다하니까 또 다른 것이 생기더라. 또 가지게 된 것을 예쁘게 가꾸니까 또 다른 게 생기고. 그래서 젊은 친구들한테 너무 뭘 특별히 잘 하려고 애쓰지 말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잘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아이들도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다. 얼마 전 둘째 아들인 요한 군이 여행기를 펴내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까, 좋은 정서를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님의 마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상상력을 많이 길러 주셨다.

어느 날은 빈 사과나무에 사과와 바나나가 열린 것처럼 밤사이 걸어 두셨다. 당시 그것이 실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소중하게 따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 우리 집이 형편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우리가 공부하면서 사용하는 영어사전 속에 초코렛 얇은 거를 하나 씩 넣어 둔다. 다른 거는 잘해 주신 기억이 많이 없는데, 그런 건 참 잘해 주셨다.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초콜렛이 나온다. 공부를 안 하면 생전 못 먹는 거다.(웃음) 아마도 아버지는 정서적 교류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나 보다. 요즘말로 ‘소확행’이었다.

▲유승현 작가가 도자에 문양을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띄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에게 매일 일기를 썼다. 아이들이 3~4살 때부터는 매일 그림일기를, 글을 쓰기 시작 할 때부터는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쓰게 했다. 자기의 정서를 글로 표현하고 남기는 거ㆍ반성을 하든 좋은 점을 쓰든ㆍ자기 글로 표현하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을 해왔다. 그런데 그게 글로만 쓰는 일기가 아니라 어느 날은 그림으로, 만화로, 포스터처럼 그리고ㆍ어느 날은 끝말잇기로도 표현하더라. 글에 대한 어려움이나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됐다.

지금도 어버이날 편지를 안가지고 오면 그냥 둘 다 집밖으로 내쫒는다. 편지를 써야만 집에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편지 쓴 걸 가지고 오면 칭찬하고 잘 보이는데 딱 붙여둔다나도 특별한 날 양가 부모님께 봉투를 준비하면서 항상 편지를 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예를 통한 부모교육을 좀 많이 가는 편인데 (글쓰기)이야기를 제일 많이 한다. 일기를 쓰는 건 정말 좋은 거 같다.

얼마 전 5명의 예술하는 여성들이 책을 펴냈다. 서로가 예술이라는 공감대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동병상련도 함께했다. 책의 의미를 말한다면

책 이름이 ‘13월의 작업실’이다. 이유는 1년은 12월까지지만, 보통 사람들이 있는 것을 넘어선 색다른 감정(병마를 이긴)을 느낀 데서 온 것이다. 즉 자기 삶을 창조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꼭 미술만이 아니라 가정주부가 될 수도 있고 주어진 24시간 12개월 그런 정해진 영역을 벗어난 다른 영역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13월의 작업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가 살고 있고 모든 시간과 공간이 작업실인 거다.

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는 지구상에서 가장 겸손해 질 수 밖 게 없고, 낮은 자리로 가게 된다. 얼마나 삶의 질이 틀려지는지... 그런 경험을 하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다른 에너지를 사용했다고 표현하는 거다. 그런 색 다른경험을 담담히 표현해 펴낸 점이 의미가 있는 책 같다. 책을 쓰면서 정말 좋았다.

지난 번 출판기념회 때 부군을 두고 본인의 ‘최대 악플러“(읏음)라고 했다. 하하. 이 자리를 빌어 한 마디 해 주시라.

정말 악플러가 맞다.(웃음) 좋은 거는 그냥 가만히 있고, 흡족해한다. 그러나 본인 생각했을 때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반드시 이야기를 해주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비평가다. 처음엔 지적에 기분이 좋지않았다. 좋은 점은 내가 가는 길을 인정해 주는 부분이다. 사실 많이 고맙고 참 따뜻한 사람이다. 누가 ‘너는 복이 참 많다. 아빠도 그렇게 지켜주고, 남편도 밀어주니 참 복도 많다’라고 말 하더라. 그러면 ‘그 복을 이렇게 복으로 만드려고 내가 얼마나 참는 줄 아냐고!’라고 말한다.(웃음) 이를 악물고 믿어준 그들한테 누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열심히 달려왔다. 그건 아무도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또 다른 계획은

글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썼을 때 내 삶을 표현하기보다 나만 의 노하우를 심층적으로 담아내는 내용이다, 도자교육을 조금 더 쉽게 접하고 모든 이가 보았을 때 도자에 관심을 가지는 내용으로, 누구나 쉽게 넘기면서 배울 수 있는 책들...교재를 하나 만들고 싶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이들 양육하면서, 어떻게 정서적인 교육을 방법 등 내 부모님이 전수한 것과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한 교육법 등을 예술 적으로 풀어내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여러 가지 교육적 부분을 주제로 이전에 서울문화투데이에 실렸던 <예술가가 보는 창>연재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아무나 봐도 끄떡 끄떡하며 맞아! 하면서 정서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는 작게 시작해도 김유정의 숨결이 있는 하남에 김유정을 조명하고 싶다. 이 동네에 김유정에 관한 모든 콘텐츠가 있고, 그와 관련된 인터뷰도 하러온다. 어른들 말씀이 폐결핵으로 죽기 3년전까지 여기 살았다고 한다. 돌아가셔서 그 집을 다 태워서 터만 남고 유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유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많은 작품이 이 동네가 모티브가 되었다. 이제는 조금 때가 온 거 같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시사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씩 생기지 않을까 싶다.

오늘 못다한 말이 있다면?
예술가들이 많이 힘들다.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많이 힘든 걸 느끼기 때문에 그렇다. 새로운 걸 창작을 해야 하는 예술가는 얼마나 힘이 들겠나? 그런데 다들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자기 만에 독창적인 세계를 고집하니까 자기 외에 다른 걸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점이 많이 안타깝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 다른 장르에도 나만큼 다 잘하고 있는 예술가는 많다.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너무 이기적인 사람보다는 이타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 다른 세계의 삶도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무조건 겸손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도 귀를 기우려 주고, 내가 다른 사람 작품을 살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래야 내 작품도 팔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돈을 벌면 진짜 작품을 많이 사고 싶다.(웃음)

유승현 도예가는 1996년 도예에 입문한 후 8회의 개인전과 수백회의 초대전을 통해 현대 도자의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축복의 종' 설치 작품은 명성교회 역사박물관, 전시관, 김유정 문학관, 교육청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한국 왕실도자기를 주로 작업한 도자장인의 2세로 부친에게 전수받은 전통 도자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컨템포러리 예술의 특징을 살려 독특한 설치도자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희 그의 '종'은 많은 이들에게 따스한 축복의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