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암스테르담의 문화통정(通情)
러시아와 암스테르담의 문화통정(通情)
  • 이강원(서울시박물관협의회장, 시인)
  • 승인 2009.10.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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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원(서울시박물관협의회장, 시인)

1996년 겨울, 암스테르담의 양로원 건물 정원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나이가 있었다. 러시아 에르미타쥬박물관의 피오트로프스키(Piotrovsky)관장과 암스테르담 뉴 커크 박물관의 빈(Veen)관장이다.

“당신이 서 계신 이 건물은 지난 300여 년 동안 양로원이었던 곳으로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더욱이 암스테르담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정경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을 러시아의 에르미타쥬 분관으로 변신시켰으면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제안을 받은 러시아 관장은, “하, 좀 황당한 아이디어지만 기발하고 재미있네요. 어디 한번 해봅시다.”

이들은 단숨에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13년 뒤, 지난 6월 19일 밤 그들이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네덜란드의 베아트리체 여왕과 러시아의 메르데프 대통령을 세우고 <에르미타쥬 암스테르담>의 개관식을 가졌다. 이렇게 암스테르담은 또 하나의 커다란 문화 아이콘을 갖게 되었다.

오페라하우스와 렘브란트 박물관 그리고 암스텔 강과 운하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개관과 동시에 거대한 인파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전차 9번과 14번은 항상 넉넉했었는데 이제는 박물관 방문객으로 인해 초만원 전차로 변했다. 정거장에 내려서는 안내표지판을 볼 필요도 없다. 그저 인파를 따라가면 바로 박물관 정문이다. 당연히 매표소 앞에 줄도 길었다. 입장권(15유로)을 사기 위해 평일에는 30분, 주말에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정도다. 

내년 1월까지 계속되는 개관 특별전은 19세기 제정러시아의 궁정 유물 2천 점으로 꾸몄다. 제1 전시실에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와 그 가족의 의상을 입은 30개의 마네킹이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광경을 연출하고 2층 전시실에는 회화·장신구·구두·부채·모자·우산·성화 등을 전시, 마치 제정러시아 궁의 한 부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하다.

전시물 모두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 화려해서 극에 달했던 제정러시아의 사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무도회장을 연출한 제2 전시실을 가기 위해서는 백여 미터의 긴 회랑을 지나야 하는데 그 길목에 박물관의 전신이었던 양로원을 그대로 살려 놓았다. 유물과 함께 1946년에는 처칠 수상이 방문해서 양노원의 노인들과 점심을 함께하기도 했다는 기록 등 백여 점의 사진을 전시했고 부엌이 있었던 지하에는 수백 명 분의 음식을 준비하던 대형 솥과 냄비, 메뉴 외에 거주자였던 할머니들의 음성과 웃음소리까지 들려주는 색다른 체험도 선사한다.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성 페테스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3백만 점의 방대한 유물을 소장, 평소에는 3%인 6만5천 점 정도밖에 전시하지 못한다. 이제 이 암스테르담 분관이 탄생함으로써 오랜동안 수장고에 갇혀 있었던 유물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고 암스테르담은 자체 소장품 없이도 새로운 문화블럭버스터를 갖게 되었다. 실로 절묘하기 그지없는 문화통정이다.

일부에서는 왜 막대한 금액(6천만 달러)을 들여서 러시아박물관 분관을 세우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이 계획을 지원했다. 이들은 오랜 체험에서 이 박물관이 문화효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박물관·미술관을 통한 국제적 문화아이콘이 절실하면서도 소장품 결여라는 만성적 문제점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러시아와 암스테르담의 융합은 바람직한 벤치마킹의 한 방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