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도 영웅이 있었노라
조선에도 영웅이 있었노라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10.30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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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오 처단 100년된 저녁 ‘안중근’을 쓴다”

30년 전 여름 어느 날, 시골 장터에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장터 옆 강변에 굵은 나무기둥을 둥그렇게 여기저기 박아 흰 천을 둘러 막은 임시 극장이었다. 천막 한쪽에 마련된 개찰구만 통과하면 바로 강변 자갈 바닥에 퍼질러 앉아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무대도 스크린도 따로 없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정면 중앙 흰 천에 영상이 비치면 그게 영화스크린이었다. 지붕도 없었으므로 맑은 여름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과 영화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여름철 어느 날 예고 없이 장터 강변에 나타난 유랑단은 상영할 영화 포스터를 천막 주변과 인근 시골 동네 담벼락 여기저기에 붙인다. 그리고는 학생들이 하교할 시간이나 한가한 저녁 무렵 높은 장대에 메단 대형 확성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변사가 감정을 넣어 홍보작전을 펼친다. 영화 줄거리와 제목을 반복해서 웅변조 어투로 읊으며 선전에 나선다.

변사의 목소리는 반경 20리 내 시골동네 구석구석까지 들렸다. 여름날 오후 산에 소를 올려놓고 놀이에 빠진 시골 아이들은 변사의 우렁찬 확성기 목소리를 듣고는 도저히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유혹에 빠진다. 아이들뿐만 아니다. 시골 중고생 청소년들과 처녀총각들도 여름날 밤 가설극장에서의 영화 한 프로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3일 정도 선전한 뒤 드디어 영화가 상영되는 날 밤, 가설극장이 설치된 장터 강변은 인산인해다.

안중근 의사를 처음으로 만난 곳은 바로 그 가설극장에서다. 초등 3학년 때였다. 그날 선생님은 학교를 마치고 갈 종회시간에 일부러  안중근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상영되니 보러 갈 것을 권유하셨다.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특별히 할인, 20원만 주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접한 안중근은 소년에게 뭉클한 애국심을 심어줬다. 일본과 싸우자며 ‘단지 동맹’으로 손가락을 자르던 장면, 눈 덮인 만주벌판 산악 계곡에서 동지를 찾으며 사투를 벌이던 장면, 하얼빈 역에서 길고 흰 수염을 날리며 걸어오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장면, 뤼순 감옥에서 지내던 장면, 사형집행을 앞두고 가족을 만나던 장면, 눈에 검은 천을 두르고 형장으로 가던 장면….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안중근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적이 없건만 어린 시절 여름 밤, 그 가설극장에서 만난 안중근의 모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만큼 소년에게 준 영화의 감흥이 컸던 탓이었을까? 소년은 이후 이른바 ‘소년 민족주의자’ 또는 ‘소년 애국지사’가 되었다. 자라서 안중근 의사처럼 나라를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이 꼭 되리라 마음먹었다. 안중근은 소년이 청년이 될 때까지 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그는 소년의 우상이었고, 영웅이었다. 대학생이 된 소년은 안중근을 생각하며 열심히 데모대에 힘을 보탰다. 운동권 학생이 된 것이었다.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훌륭하게 싸우는 ‘민주투사’ ‘애국지사’가 그의 꿈이었다. 나라를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런 소년이 의거 100주년을 맞은 안중근을 다시 만난다. 1909년 10월 26일, 북만주 하얼빈 역에서 침략 원흉 이토오를 처단한 지 꼭 100년 되는 날 저녁에 그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일본 일각에선 그를 아직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우리 학계에선 그를 장군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투 맥락에서 이토오를 죽였으니, 그는 마땅히 의병장이란 것이다. 물론 일본에선 이토오가 영웅이다. 서로의 입장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에게 만약 안중근이 없었더라면 일본이 우리를 어찌 볼 것인가? 안중근이 있기에 일본은 조선에도 사람이 있음을, 영웅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토오가 그들의 영웅일지 몰라도 우리는 ‘안중근 장군’ 한 명을 이토오 10명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30여 년 전 영화 안중근을 보러 오라며 확성기 목소리를 높이던 시골 장터 변사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쟁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