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인터뷰] 강요배 작가 “샤갈ㆍ모네는 식상하다. 新사조 창조로 리드해야”
[Special-인터뷰] 강요배 작가 “샤갈ㆍ모네는 식상하다. 新사조 창조로 리드해야”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김지현 기자
  • 승인 2019.07.19 16: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유의 전통문화 찾아 현재화 ·한국미술사 새로운 정리 필요
“제주 바람은 역사의 바람...장고한 시간을 하염없이 존재”
팽나무와 강요배, 그리고 바람...거친 바람작업 끝나면 예전처럼 섬세하고 따뜻한 작품 보여줄 것

 맵찬 바람을 견뎌 온 나무와 같이 지난 역경을 나이테로 품어온 작가가 있다. ‘4.3 민주항쟁사를 널리 알린 작가’ㆍ‘제주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리는 강요배 작가다. 강요배는 1980년대 민중작가이자 1990년대 제주 4·3항쟁 연작으로 유명한 '제주 화가'다.

1952년 제주 삼양동에서 출생한 강요배 작가는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제주 4.3사건의 전개를 목도하지 못했다. 4.3 민주항쟁과 제주 4.3에 대해 강 작가의 부친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라고 답했지만 아름다운 제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은 어린 그에게도 아픔이자 슬픔으로 내재했을 것이다.

그런 강 작가가 '민중미술가'가 된 것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재학시절인 1981년 ‘현실과 발언’의 동인 활동을 하면서다. 현실과 시대, 역사와 미술문제를 고민하며 1981년 <인멸도>와 <정의도>, 1982년 <탐라도>, 1983년 <맥잡기>와 <장례명상도>, 1984년 <굳세어라 금순아> 를 발표하며 1980년대의 시대모습과 정신을 미학적으로 구현했다.

▲작업실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강요배 작가 모습

강 작가는 1980대 후반 한겨레신문에 소설가 현기영의 연재소설 <바람 타는 섬>의 삽화를 그린 일은 강 작가에게 ‘내 고향 제주’의 역사, 4·3 항쟁은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992년 강요배 작가는 <역사그림-제주민중항쟁사>展을 서울 학고재에 선보였다. 당시 전시 된 작품은 강 작가가 1년여 간 한겨레에 연재한 삽화를 바탕으로 했다. 작품은 제주 역사와 문화 전반의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거쳤다. 이는 제주 4·3사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전시는 제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을 알리는 동시에 작가 강요배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강 작가의 2000점 작품 중 4.3 사건 관련 작품은 67점으로 많지는 않지만 작품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이후 서울에서 제주로 귀향한 강 작가는 제주 자연을 탐구했다. 작가는 제주 역사를 알고 나니 아름다운 제주 자연에 눈길이 갔다. 바람ㆍ파도 등 풍광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작업을 25여 년 간 이어왔다. 

강 작가는 요사이 혁명을 꿈꾸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미술사에서 새로운 사조를 창조하고 리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의 아류에서 벗어난 우리 고유의 전통 요소를 찾아 현재화는 물론, 나아가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그는 회화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 회화는 아직도 천착해야할 미술의 근본이자 창조의 원천이라고 일갈한다. “회화의 범위는 넓고 가능성은 아직도 풍부하다”고.

강 작가는 작업실 마당에 있는 팽나무와의 대화에도 푹 빠져있다. 굴곡진 제주의 역사만큼이나, 강렬한 바람이 키워낸 팽나무다. 그는 팽나무를 분신처럼 여기며 건너편 흔들의자에 앉아 나부끼는 바람에게 말을 건넨다.
그를 만나러 지난 6월 제주를 찾았다. 공항에 한발 내딛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는 제주 바람을 따라 아틀리에 ‘귀덕화사’에서 강요배 작가를 만났다. 

<순이삼촌>의 현기영 선생과 제일동포 소설가이자 <화산도>를 쓴 김석범 선생이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제주 4.3 항쟁사를 알렸다. 미술작품으로는 강 선생이 처음이다. 현재 선생에게 제주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4.3 민주항쟁사를 널리 알린 작가’ㆍ‘제주를 대표하는 화가’ 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소회가 궁금하다

나는 제주 4.3 민중항쟁사를 최초로 알린 작가이기 전, 고향의 역사공부를 기본으로 했다. 그 부분은 예술가가 아니어도 기본일 것 이다. 예술가라면 내 고향 역사를 알고, 공부하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내 고향 역사를 모르면서 어떻게 예술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차원에서 제주 4.3 민중항쟁사 작업을 한 거다. 내 공부를 최우선 목적에 둬 공부 한 후 나온 결과가 대중에게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다른 작가들도(내 고향 역사를) 탐구하고 학습했으면 좋겠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게 필요하다.

화단에서 (나를)평가하는 부분은 잘 모르지만 미술계 일각의 이야기라 생각한다. 그림 그리며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제주 4.3민중항쟁사를 주제로 작업을 한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느끼기에 평범한 삶을 사는 거 같다.

▲강요배 작가의 ‘불인(不仁)’은 제주 4·3 비극 중 하나인 ‘북촌사건’을 표현한 작품이다(도판=국립현대미술관)

스스로 평범한 삶을 그동안 살아왔다고 했다. 4.3과 관련해 그 때를 살아내신 아버님의 교육이나 영향이 많이 있었는지

아니다. 부친이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1904년생 115세이다. 난 막내 중에도 한참 막내로 태어나 부친은 나를 가만 두셨다. 어린 나에게 지시ㆍ교육ㆍ명령 등을 하실 분이 아니었다. 아버님 보다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부친은)제주도의 아픔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아픔을 겪은 가족들조차 말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말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어서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가 입을 열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시 아픔은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말해서 좋은 점이 하나도 없어 서로 간에 그 부분은 봉합해 놓고 살았다. 그러다 민주화운동 이후 현대사 다시 보기가 시작 된 것이다.

역사를 다들 알지만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제주 4.3 민주 항쟁사를 작업에 끄집어 낸 것인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제주 4.3민주항쟁사와 과거가 연관되는 공부가 필요했다. 민주화운동의 뿌리는 동학농민운동에서 5.18 혁명으로 이어지니까 민족사를 다시 살핀 것이다. 민족사를 살피면서 민주화운동으로 표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다. 민족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나 역사를 바로 잡았고, 나는 (미술)작업을 통해 역사공부를 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 처음 4.3평화공원이 생겼고, 다큐영상이 제작되고 투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다. 사회 분위기가 변화고 있다. 최근 제주 4.3 항쟁을 재 조망하는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과거사를 푸는 과정은 진전이 필요하지만 모범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학술적으로나 기념하는 방식 등 과거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분열이 생기지 않아, 잘 풀려가는 상황으로 보인다.

제주 내에서 주민들 간 반목과 대립이 있어왔는데, 그 상황들은 많이 해소됐는지 궁금하다

제주 4.3항쟁 유족들은 반공유족과 그렇지 않은 유족으로 나눠져있다. 당시 압도적으로 많은 양민들이 희생된 점이 큰 점이 문제였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수록 가해자 측이 크게 말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피해 규모가 워낙 컸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 처참했다. 그래서 경찰ㆍ유족ㆍ양민 유족들이 해결책을 찾아왔다. 철저히 조사해 복수하자가 아닌 억울함을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역사를 정확히 짚고 치유하자는 것이다. 조상들에게 사죄하고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잘 풀고 있고, 유족회ㆍ언론ㆍ단체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업실인 제주 ‘귀덕화사’에서 기자와 만난 강요배 작가

그동안 4.3항쟁과 관련한 작품을 얼마나 했는지

내 전체 작품 2000점 중, 4.3 관련 작품은 67점 정도다. 작품 활동을 한지 30년이 됐다. (4.3 사건에 대해)내가 다룰 것은 그림으로 거의 다 다뤘기에, (이제) 뒷 배경으로 들어가면 좋겠다. 작품 밑바닥엔 있지만 전면으로 표면화 시키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마당 가운데 팽나무를 바라보며)팽나무는 제주도를 상징하는 나무다. 4.3항쟁과 관련된 팽나무는 강렬하게 마을 입구나 중심에 서 있다. 육지에 느티나무가 있듯 제주도에는 팽나무가 있다. 팽나무는 추위에 강한 나무다. 바람이 불면 나무의 ‘수염’이 휘어지지만 꺾이진 않는다. 기개를 나타내며 마을에 큰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정작 그 용도 외에는 목재로는 쓸모가 없다. ‘못 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하듯, 상징적 의미가 있는 나무다.

(‘세월호’의)팽목항을 말할 때 팽나무를 말하는데 아픔은 연결되는 것 같다. 팽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다. 나무 안쪽에 나이테가 있는데, 성장하는 역경을 품는 게 나이테이다. 지금은 현재지만 과거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과거를 나이테로 담고 있어, 나무를 보면 역경이 보이는 것 같다. 사연은 속에 들어가 있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묵묵히 지켜보며, 피부로 느끼는 듯 사연은 다 속 안에 있다. (그래서) 4.3항쟁은 안쪽에 넣어야 할 일이다.

팽나무와 선생을 동일시하는 것인가

맞다. 팽나무와 대화하느라 서울도 잘 안 간다. 오늘은 어떤 바람과 대화를 할까? 바람과 나무는 분리되지 않고 하이픈(hyphen)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바람 없이 나무 없고 나무 없이 바람이 없는 것이다. 나무에게 바람은 좋은 영향을 준다. 바람이 없는 나무는 못 살 것 같다. 바람은 나무를 키워주는 에너지이자 단련을 시키는 것이다. ‘약 바람’이라는 말이 있듯 말이다. 바람에 대한 부정적 의미도 많았지만, 지금은 바람을 막는 방법이 많아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팽나무와 강요배 작가 모습. 강요배 작가는 팽나무와 자신을 동일시 하며, 팽나무와 대화한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나, 작품 영감의 근원은

제주 바람은 역사의 바람이다. 장고한 세월을 불러오는 바람ㆍ시간을 관통해서 불어오는 바람ㆍ인간사는 인간사의 역사인데 자연사까지 포함해 장고한 시간 동안 하염없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이다.

나는 산들바람 보다 맵찬 바람ㆍ강렬한 바람ㆍ겨울바람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역사고 자연사긴 하지만 강렬한 시련을 의미한다. 시련과 같은 바람을 나무가 이기면 우리 삶도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인고를 주는 바람ㆍ맞음으로써 단련이 돼 강해지는 바람은 강인한 생명력을 준다. 그래서 바람이 없으면 심심하고ㆍ막막하고ㆍ후덥지근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바람이 확~와줘야 파도가 치고, 자연도 살아있는 맛이 나는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사람들이 공항에 도착 할 때 맨 처음 만나는 게 제주 바람일 것이다. 제주사람들은 바람을 맞으면 고향에 온 느낌을 받는다. 백이면 백이 그럴 것이다. 민물고기인 쏘가리는 물이 강한 곳에 살고 싶지, 여울 없는 곳엔 살지 못하는 이치다.

(바람은)생리적인 것이다. 사회나 역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람은 부드러움이지만 제주바람은 강렬한 힘이자 에너지가 무한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자유로운 바람이지만 바람을 잘 느끼는 게 팽나무다. 바람과 팽나무는 참 잘 어울린다. 바람의 이동 거리가 있어, 팽나무에 존재를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팽나무와 바람이 서로 대화한다고 본다.

▲겨울팽나무 2008 캔버스에 아크릴릭 80.3x116.7cm(도판=학고재)

바람 때문에 팽나무가 만들어 진거다. 팽나무가 없으면 바람의 존재를 몸으로 느낀 게 표시가 안 난다. 팽나무 뿐 아니고 땅과 구름에 결을 만들고 자연경관에 결을 만든다. 팽나무가 확장하면 섬이 되는 것이다. 팽나무는 바람이 머물고 스치면서 자기를 표시하는 이동하는 공간인 거다. 팽나무는 이동하지 않아도 제주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 같다.

종이를 끝에 매단 나무 붓으로 자연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방법을 구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그림을 그릴 때 표면을 만드는데, 붓 자국은 얌전하다. 기초 베이스는 붓을 사용하지만 표면 효과를 만들 때는 칡뿌리와 빗자루를 쓰고, 종이를 사용해 곁들이면 진한 느낌이 나 내 그림 표현에 알맞다고 생각한다. 그림 표면에 제주 바람같이 바람이 확 부는 한 표현은 움직이는 붓으론 안 된다. 거친바람을 ‘견딤’의 소재로 화면 앞에 둬 터치가 빨리, 넓게 이뤄져야 해서 보통 붓은 하나 씩 그려야 해서 불가능 하다. 잔털 붓으론 기분이 안 난다. 동양화가들이 쓰는, 획을 크게 표현하는 것은 붓으론 안 된다. 큰 화면에 거친 바람, 바람이 한번 쓸고 가고 소리까지 나야지만 작업이 완성된다. 작업과정에서  쏵쏵~소리가 나야한다.

요사이 대중들이 미술 작품들에 대한 관심들으로 예술에 눈을 많이 떴다. 일반인들의 관심도 늘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어디 있다 생각하나

요즘 한스 로슬링이 쓴 『팩트풀니스(factfulness)』, '사실 충실성'이란 책을 읽는 중인데, 우리나라는 소비적인 측면에서 상위에 있다. 그 책을 보면 4단계정도로 사회적으로 윤택해지는 단계를 나눠 보여주는데 우리나라는 4단계의 맨 위에 있고, 예술도 제일 위 쪽에 있다. 예술분야도 관심이 많아지고, 지원자 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거장ㆍ대가까진 아니라도 일상 속에 작은 규모로 예술적 역량이 커지고 있다. 제주도만 해도 그렇고, 내가 사는 작은 마을도 연주회 등 많은 문화예술 행사가 열린다. 할머니ㆍ해녀들도 그림을 그릴 정도다. 젊은 작가들이 작업들을 충분히 잘 해 와서, 국민 다수가 향유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국가 정책적 지원도 늘어나 즐길 수 있게 돼 특별히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필요 없을 거 같다.

언젠가 선생의 작품이 아카이빙 되고 미술사의 일부가 되겠지만, 어떠한 작가로 기억되고 불리길 바라나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 마음에 염두 해둔 것은 동서양 문제다. 근대 이후 1세대 (동양화)문화는 어쩔 수 없이 (서양화의)아류이다. 문화적인 자존심이 없었다고 본다. 동양미술의 자존심을 되찾는 일을 하고 싶은데, 새로운 (동양)전통 기법에 서양(화)에서 공부한 것의 장점을 가져와 새로운 지향점을 미술 속에서 만들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런 방향에 일조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국미술사, 이제 새로운 정리가 필요하다. 서양(미술)에서 틀을 가져와 맞춰 따라가는 건 지겨운 것이다. 문화와 삶이 다르고, 글로벌한 세상이지만 고유의 전통문화를 찾아 현재화 시켜야 한다. 샤갈ㆍ모네는 식상하다. 새로운 걸 해 보고 싶다. 개념미술을 하기 보단 회화를 기본으로 우리 입맛에 맞게 새롭게 만들면 어떨까? 젊은 사람들도 이런 방향을 원하고 앞으로 하는 게 맞다.

▲배추 2008 캔버스에 아크릴릭 72.8x90.9cm(도판=학고재)

대한민국 미술의 혁명가로 불리고 싶은 건가

그렇다.(웃음) 근ㆍ현대 미술은 서양미술의 사실ㆍ인상ㆍ추상주의 미술만을 그대로 답습했다. 김환기 선생도 그렇고, 인상주의는 오지호 선생, 사실주의는 국전, 그렇게 따라가야만 할까? 그럴 필요가 없다. 이중섭 선생이나 박수근 선생은 (서양화 기법을)따라가는 작가들이 아니다. 충분히 한국적 요소가 있는 작품이 이어졌고. 우리다운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업을 하며 (한국적 요소를 반영한) 이런 쪽으로 좀 더 깊게 연구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조를 찾고 싶다. 우리가 창조해 리드하는 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분화의 개념인데 나무 가지가 그냥 갈라지는 게 아닌 다른 성질로 가는 거다. 다른 꽃을 피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 그림의 질감표현, 터치와 획은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에서 온 것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이 잘 안 쓰기도 하고, 잘 할 줄도 모른다. 서양은 표면을 코팅하여 살리지 않는다. 원 재질에 감성이 뛰어난데 말이다. 획을 쓰는 것, 선을 칠하는 게 아닌 한 번에 그리는 방법은 중국이나 일본도 그렇지만 (동양화에서)중요한 요소다. 나는 그쪽으로 공부하고 있고,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잔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빗자루로 휙ㆍ휙ㆍ휙 해서 일필휘지의 맛, 일필의 붓 맛이야 말로 바람이 들어오는 기분이다.

작업에 추가하고 싶은 부분이나, 영감을 얻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지금까진 날씨이다. 날씨가 화창한 날, 새소리가 좋다. (날씨와 소리)이런 걸 작품에 표현하는 작업들을 하고 싶다. 현재하는 바람작업이 끝나면 시작하지 않을까? 나는 꽃도 좋아하고 새도 좋아한다. 부드러운 것들도 좋아한다. (이전 전시 도록을 보여주며)오이ㆍ감나무 재미있고, 큰 부담 없다. 거친 바람작업이 끝나면 따뜻한 마음이 나오면서 보호할 것, 부드러운 것들을 보여 줄 예정이다.

▲암중홍 2012 Acrylic on canvas 72.7x91cm(도판=학고재)

요 사이 미술계 흐름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보 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영상 작업(영상 기기이용 등)을 전혀 안한다. 특히 작업실에선 거의 안한다. 영상작업은 그림 그리는 감각과 맞지 않는 거 같다.자연과 같은 실제적 현상을 보고 영감을 얻어야 한다. 사진이나 영상 등을 내게 가지고 오면 질색을 하는데, 가공을 거친 것들의 느낌을 아주 안 좋아하고 과정자체도 마음에 안 든다. 결과물이 얄팍해지는 느낌이다.

앞으로 전시계획은

전시는 3년에 한번 전시한다. 작년에 한번 했으니까 2년 후에 할 것이다. 현재는 주제를 정해 작업하는 건 아니고,  하는 일이니까 꾸준히 해 나갈 예정이다.

애주가인 걸로 안다.(웃음) 마지막으로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조언은

주제에 집작해 ‘무엇을 그린다’에 빠지면 안 된다. 자기 요리방식에 대한 토론이 중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회화의 범위는 넓고 가능성은 아직도 풍부하다. 확장도 좋지만 회화자체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하는 건 아닌 거다. 매체확장 보다 그림 그리는데 충실하면 더 좋은 그림, 본질을 담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림 그리는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는 건 큰 일 나는 일이다. 영상이나 미디어아트로만 가는 것도 잘못 된 거다. 개념으로만 가는 것도 강박적인 것이다. 회화로 표현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해 요리를 잘하는 법을 잘 생각해 보라. 회화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