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이불뭉치 이야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이불뭉치 이야기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9.08.1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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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아래 사진 속의 물건은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서다 발견한 오브제이다. 이웃에 사는 빌라 주민이 버린 이 오브제는 미적인 의도가 전혀 없는 일상적 행위의 산물이다. 마르셀 뒤샹의 비 미적인 오브제 선택 행위보다 한 수 위처럼 보인다. 왜? 순도 백 퍼센트의 무의도성 때문에. 그는 모르긴 해도 미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일상적 행위로 이 이불을 포장했을 것이다. 나는 우연히 이 오브제를 발견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오브제를 보는 순간 미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쩌면 주술적인 느낌에 보다 가까운 것이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력에 마음이 끌렸으니까. 순간 나는 이 물체를 폭탄처럼 뒤샹의 변기를 향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수령 백살이 넘은 '샘(Fountain)'(1917~ ) 노인을 이제는 장례지내야 할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노인이 치매에 걸려 더 망령을 떨기 전에 그 화려한 일생을 기린 다음 장례를 치뤄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마침 올해는 이 노인의 부친인 뒤샹이 서거한지 50주년이 되는 해가 아니던가? 그래 어서 빨리 이 노인을 장사지내 백 년 동안 주술적 최면에 걸려 비몽사몽의 순간을 살고 있는 샘교의 신도들을 구원하자.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이 오브제를 봤으니 7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사이에 청소차가 가져갔으면 영원히 헤어지는 거다. 그게 운명이라는 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 오브제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대로 있었다. 7시간만의 해후였다. 길을 걸어오면서 나는 속으로 제발 청소차가 그 놈을 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그 놈은 그런 나를 비웃듯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것도 인연이니 같이 가자. 나는 단단히 포장한 검정색 테이프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들어올렸다. 가뿐했다. 또 어떤 스토리가 전개될 것인가? 순간 나의 머리는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 위에 걸린 괘종시계의 시침이 밤 12시를 가리키는데도 지족거사는 잠이 안 왔다. 저녁 때 집 근처 길에서 주워다 창고에 처박아둔 물건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남이 쓰다 버린 물건을 주워다 놓은 데서 오는 꺼림칙한 느낌도 일부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 물건의 존재감이랄까, 거기에 그렇게 있어야만 될 어떤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왜 그 물건은 청소차에 실려가 처리되지 않고 어두운 창고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가. 만일 지족거사가 그 물건을 못 본 척하고 지나쳤더라면 그놈은 몇 시간 후 청소차에 실려 어느 으슥한 매립지에 버려질 것이다. 그게 보통 쓰레기들이 처리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이놈은 지금 지족거사에 의해 매립지가 아닌 어둡고 습한 창고에 누워 있다. 자리에 누운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지족거사는 아무래도 창고에 가서 한 번 더 그놈을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 회청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철제문을 여니 그놈은 창고 안을 꽉 채운 잡동사니들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지족거사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화면을 보니 어둡게 나왔지만 물체를 식별할 정도는 되었다.

▲Very Funny G.P.S, 흐름, 2019

늦은 저녁을 먹고 서너 시간 정도 티브이를 보다 잠자리에 든 허무한 씨는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등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불현듯 어제 아침에 출근하다 본 이상한 물체가 떠올랐다. 흰 색의 부드러운 천에 싸인 그것은 검정색 비닐 테이프로 둘둘 말린 채 골목의 길거리 한편에 방치돼 있었다. 전봇대 옆에 놓인 쓰레기 봉지와 함께 있는 것으로 봐서 누군가가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빌라의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그 물체는 정황으로 미루어봐서 그 빌라에 사는 어떤 주민이 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아직 쓸 만한 이불이었다. 면으로 된 흰색의 홋청은 새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누가 이 멀쩡한 물건을 버렸을까? 허무한 씨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물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자세히 살펴봤다.

참 능숙한 솜씨로 테이프를 돌렸군. 정말 그랬다. 그냥 무심코 둘둘 만 것처럼 보였지만 테이프는 완벽할 정도로 철저히 물체를 결박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전문적인 포장공의 솜씨처럼 보였다. 그것은 분명 달인의 경지에 오른 솜씨였다. 순간, 허무한 씨는 왠지 모르지만 그 물체를 갖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 봤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그것을 집에 갖다 놓고 난 뒤 출근 시간에 맞추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지하철역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퇴근길에 갖고 가자고 생각하면서. 낮에는 청소차도 안 다닐 뿐더러 버린 물건을 갖고 가는 사람도 흔치 않다는 사실 또한 적이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허무한 씨가 퇴근길에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 물체는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검정색 테이프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문구 때문일까? 허무한 씨는 검정색 비닐 테이프에 금색으로 연속적으로 찍힌 'Attention'(주목)이란 글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불뭉치가 잠에서 깬 것은 갑자기 끼이익 하면서 금속성의 철문이 열리는 소음 때문이었다. 그저께 저녁에 좁은 골목 안 4층짜리 빌라의 벽에 피곤한 몸을 기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갑자기 허리춤에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번쩍 들어 올렸던 것이다. 이부자리는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발밑에서 저벅거리며 걷는 그 남자의 빠른 발걸음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체불명의 그 남자는 한 빌라의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저벅저벅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를 뒤에 남긴 채 한참이나 계단을 오른 그 남자는 옥상 위에 있는 창고의 철제문을 열고 나를 여러 잡동사니들이 엉켜있는 곳에 던져 넣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았다. 내가 미처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내는 암실 그 자체였다. 도대체 여긴 어딘가? 순간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인간들이란!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다.

한 일 년 전인가? 새하얀 솜과 흰색의 천이 만나 이불인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 거의 똑같이 생긴 내 형제들은( 한 만 명이나 될까?) 드르륵 드르륵 미싱이 돌아가는 소음과 미세한 보푸라기들이 난무하는 넓은 공장에서 태어났다. 완성된 누비이불은 회사의 로고와 상품명이 인쇄된 투명하고 질긴 대형 비닐주머니에 넣어진 뒤 트럭에 실려 매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 며칠 후 나는 이름을 알 수 없는(당연히 물건에 지나지 않는 나는 글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한 백화점의 매대에 진열된 신세가 되었다. 나의 형제 대부분은 백화점 안에 있는 창고에 갇혀 팔려나갈 때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나는 운 좋게도(이걸 과연 운이 좋다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조명이 휘황찬란한 백화점 매장을 구경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내가 그 곳에 있는 동안 보고 들은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신혼 부부로 보이는 남녀나 혹은 우아한 중년의 부인들이 낮은 목소리로 나눈 어떤 대화는 만일 내가 발설을 하면 다음날 아침 신문의 사회면 톱을 장식할 내용도 있다. ''얘, 조심해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단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키득거렸지만 바로 코 앞에 있는 내가 듣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젊고 매력적인 남자배우 K가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어떤 부유한 여자의 애인이란 사실을 알았다.사람들이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새나 쥐처럼 생물 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건을 특별히 대접해 준 아주 특이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인 1917년에 마르셀 뒤샹이란 괴짜가 <앙데팡당>이란 전시에 남자용 소변기를 출품한 사건이 있었다. 눈으로 보는 미술이 대세를 이룬 당시 미술계의 관행은 뒤샹이 '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남성용 소변기를 미술작품으로 인정하기에는 저어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뒤샹 자신이 심사위원회의 부위뭔장 자격으로 심사에 참여했지만 이 물건은 심사에서 떨어졌다. 얼마 후에 뒤샹은 이를 둘러싼 전말을 자신이 관여하는 ‘장님’이란 잡지를 통해 밝히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백화점 혼수용품 매장의 매대 위에 진열돼 있는 동안 나는 여러 사람의 손을 탔다. 고객들은 내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거나 꾹꾹 눌러서 내 몸이 얼마나 탄력이 있는지 테스트 하기도 했다. 주부로 보이는 어떤 여자는 천 사이로 삐져나온 솜의 작은 끝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하마트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건 정말이지 머리카락을 억지로 잡아당겨 모근이 빠질 때의 고통에 가까웠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며칠 동안이나 거기에 그렇게 있다가 샘플 상품을 싸게 처리하는 바람에 덥썩 산 어떤 고객의 집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내가 검정색 테이프에 둘둘 말려 차가운 날씨의 길거리에 나앉게 된 바로 그 빌라의 어느 집이었던 것이다.

그 집에서 보냈던 기간에 본 일도 생략하련다. 그것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이 스토리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처음 이 창고에 들어온 날, 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이 너무 무서웠다. 대체 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나는 허리 밑에서 몸을 찌르는 예리한 물건이 너무 신경이 쓰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을 뒤척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였다. 내 이름은 부러진 삽이야. 넌 누구니?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암실이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넌 날 볼 수 없어. 그저께 네가 여기 왔을 때 난 희미한 불빛 속에서 잠깐 네 모습을 본 적 있지. 넌 살이 통통하게 찌고 피부가 희지? 그런데 불쌍하게도 검정색 테이프로 칭칭 감겨있더구나. 그래 아프지는 않니? 응, 처음엔 아팠지만 이젠 견딜만 해. 뭐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운반하기 편하니까 그랬겠지. 아프고 고통스런 것도 체념하면 괜찮아.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거지 뭐. 응 그렇긴 해. 나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어떤 인부가 나를 화단에 버리는 바람에 흘러흘러 여기까지 오게 됐지. 그래? 그럼 잠도 안 오는데 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니? 그럴까? 말을 마친 부러진 삽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