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의 조명 이야기] 우리 어디서 만날까요?
[백지혜의 조명 이야기] 우리 어디서 만날까요?
  •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 승인 2019.08.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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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본 사람은 없는 영화 Love Affair (원작은 1930년, 1994년에 리메이크 되었다)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서로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를 본 후, 나에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부터 높아서 올려다 보아야하는, 세계 어디에 살던 누구나 아는 상징적인 장소여서 어디인지 몰라서 가지 못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고 도시를 공부하면서는 그것이 바로 도시의 랜드마크의 기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의를 하면서 랜드마크를 설명할 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는 예를 들어주면 뉴욕에 한번 가보지 않은 학생들도 금방 고개를 끄덕인다. 

내 기억 속에서 가끔 내용이 뒤섞이는 영화 Sleepleness In Seattle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주인공 샘과 애나도 여러 번의 엇갈림 끝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운명의 만남을 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 장난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며 그림인지 실제인지 모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야경이 나오는데 입면에 빨간 하트 모양 조명이 빛난다. 

Sleepleness In Seattle의 제작연도를 보면 1993년으로 아직 LED를 적극적인 조명광원으로 사용하던 때가 아니라서 컴퓨터 그래픽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화 제작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확신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샘과 애나가 만난 다음 빨간 불이 들어올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안타까운 엇갈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로맨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현실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그 조명의 색을 통하여 매일 도시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본래의 조명은 약간 푸른빛 마저 비치는 차가운 백색 (Ssigniture white)- 색온도 4500K ~ 5000K -이나 다른 색으로 변할 경우 그 색에 따라 메시지를 담는다. 

국가 공휴일이나 선거등 국가적인 행사가 있는 날은 성조기에 들어 있는 색, 빨강과 백색 그리고 파랑의 빛이 켜진다. 미국 최대의 참사 911테러 날에도 이 색의 불빛이 들어온다.   Sleepleness In Seattle의 마지막 장면에 본 조명은 2월14일 발렌타인데이에 볼 수 있고 플로렌스 허리케인 노스캐롤라이나를 강타했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9월18일에는 조명을 켜지 않기도 한다.

홈페이지의 lights calendar를 살펴보면 때때로 사적인 용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2018년 11월8일 속옷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날에는 핑크색을, 2018년 10월30일에는 뮤지컬Wicked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초록과 백색 조명을 그리고 아마존에서 HQ2를 공표하고 축하하던 날엔 오렌지색 조명이 1시간동안 반짝거리기도 하였다. 

요즈음 도시조명의 트렌드를 꼽아보자면 스마트, 친환경 그리고 소통이다. 광원과 조명제어기술의 발달로 색의 변화뿐만 아니라 점멸 속도 및 간격, 빛의 밝기 혹은 세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연출할 수 있도록 가능해지면서 도시 조명은 길이나 나무를 비추는 수동적인 기눙에서 움직임에 반응하고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동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스마트 라이팅 시스템이나 친환경적인 조명 계획도 가능해졌는데 빛에 의한 소통은 도시의 조명이 갖는 어떤 기능보다 도시 공간을 시민의 사적인 세계로 끌어들여 보다 친근하고 호감을 갖게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맨해튼의 밤거리를 걷거나 차를 타고 다닐 때 절대 놓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야경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조명에 따라 어떤 날은 애국심을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날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슬픈 일, 기쁜 일, 축하할 일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서울 어딘가에서 만날 약속을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시애틀에서 사는 사람도 쉽게 찾았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도 모두 아는 서울의 랜드마크는 어디일까? 그리고 그 곳에서 마지막 장면을 찍는다면 어떤 야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건 아직 서울이 내 마음에 들어온 사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서울의 야간경관을 기능을 우선해서 바라보고 있는 내 직업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