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최승희와 한국 ‘모던댄스’의 기원
[성기숙의 문화읽기] 최승희와 한국 ‘모던댄스’의 기원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19.08.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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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최근 한일 관계가 냉각기에 빠져있다. 우리 정부가 이른바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더욱 악화되는 형국이다. 한일 갈등이 고조되면서 양국의 문화예술 교류도 차질을 빚고 있다. 공연계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관련 공연들이 잇따라 취소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반일(反日), 반한(反韓) 기류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며칠 전, 지난 2014년 연낙재가 일본을 통해 발굴한 신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의 무용영상을 재음미하는 기회를 가졌다. 1926년 3월 최승희가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도쿄로 향한 후, 그해 10월 데뷔 무대를 촬영한 무용작품 ‘그로테스크’ 영상이다. 

최승희는 데뷔 첫 해 ‘그로테스크’ 공연 후 그 이듬해 ‘세레나데’를 통해 전문 댄서로 활동을 본격화한다. ‘세레나데’는 유럽 표현주의 춤미학이 표상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최승희의 데뷔작 ‘그로테스크’는 유럽 표현주의 현대무용의 한국적 수용과정과 그 미적 기원을 탐색할 수 있는 긴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우선 최승희는 어떤 배경에서 무용가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최승희가 세계적 무용가로 성장하기까지엔 오빠 최승일의 후광이 컸다. 최승일은 당대 최고의 명문사학 배제중학을 수학하고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1930년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인으로서 문학계급운동에도 열정적으로 가담했다. 또 경성방송국의 연예분야 프로듀서를 지내는 등 최승일은 당시 문화계에서 실력자로 통했다.

1926년 3월 21일 숙명여고 재학중이던 최승희는 오빠의 손에 이끌려 이시이 바쿠 공연이 열린 경성공화당을 찾는다. 이시이 바쿠의 ‘사로잡힌 영혼’에서 발현된 유럽 표현주의 계열의 모던무용에서 풍기는 강렬한 미감은 최승희에게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날 공연에 매료된 최승희는 성악가의 꿈을 접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26년 3월 도쿄에 도착한 최승희는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하루 11시간씩 할애하는 맹훈련을 통해 독보적 기량을 쌓아간다. 심신을 춤에 올인한 최승희는 입문한지 얼마 안되어 이시이바쿠무용단의 핵심 단원으로 급부상한다.

행운도 뒤따랐다. 1926년 10월 3일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개최된 무용공연에 이시이 바쿠 안무의 ‘그로테스크’에 출연하는 기회를 거머쥔다. 최승희 데뷔영상 ‘그로테스크’는 1926년 10월 3일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열린 공연실황을 촬영한 것이다. 

‘그로테스크’를 안무한 이시이 바쿠는 1920년대 초반 유럽에 유학하여 표현주의 계열의 모던댄스 세례를 받은 신흥무용가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그로테스크’는 근대 유럽풍의 낭만적 유희성과 일본 전통무용의 제의적 율동성이 혼재된 작품이다. 괴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감이 독창성을 더한다. 

영상 속 ‘그로테스크’ 작품에서 최승희는 이시이 에이코, 이시이 요시코 등과 함께 3인무 형식의 춤을 추고 있다. 이시이 에이코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친여동생이다. 무용수들이 두 팔을 사방으로 휘두르고 다리는 굴신과 펴기를 반복적으로 교차한 가운데 큰 원을 그리면서 이동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로테스크’ 출연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5세였다. 단발머리 앳된 소녀의 모습이다. 발랄하고 경쾌하게 춤추는 천진스런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숙명여고 시절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내렸던 머리는 짧은 단발로 바뀌어 있다. 영상 속 무용의상도 이채롭다. 양 팔과 두 다리를 휜히 드러낸 모습이 과감하다. 

‘그로테스크’ 무용영상은 최승희가 무용입문 7개월 만에 스승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주요 단원으로 활동했음을 증거한다. 타고난 천재성을 엿볼 있는 대목이다. ‘그로테스크’는 서양 근대 표현주의 무용의 일본 수용 초창기의 미적 양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특히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담긴 최고(最古)의 영상이라는 점은 희소적 가치를 더한다. 

그런 만큼 자료의 발굴 경위에 대한 관심도 높다. 이 영상은 1926년 10월 3일 도쿄 베비 시네마구락부 아사이클럽 주최로,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파테베비촬영회’에 이시이 바쿠무용단이 초청되어 공연한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프랑스 필림 제조회사가 제품설명회를 겸해 촬영대회를 개최하면서 유럽 유학파 출신인 이시이 바쿠를 초청해 무용공연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승희의 첫 데뷔 모습이 담긴 ‘그로테스크’ 영상은 시즈오카현 시마다(島山) 시립도서관 ‘시미즈(淸水) 문고’에 「쇼와초기의 영상」이라는 제목의 영상물 안에 포함돼 있다. 시미즈문고는 문화수집가였던 시미즈 신이치가 기증한 근대문화자료 중심의 컬렉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미즈 신이치는 일본 근대시기 귀중한 역사자료를 기증한 공로로 시마다 시(市)로부터 명예시민권을 받았다. 

20세기 조선을 빛낸 최고의 예술가 최승희는 신무용의 대가로 통한다. 신무용가 최승희의 예술적 모태가 서양 모던댄스로 귀결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최승희 신무용의 예술적 아이덴티티 저변에 흐르는 ‘서양춤의 한국화’ 징후는 이와같이 외래적 미감의 기원적 요인과도 무관치 않다. 민족 고유의 춤 원형과 정통성이 중시되는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에서 신무용 주자는 절대 불가하다는 학적 논거는 이렇듯 뚜렷하다.    

최승희 데뷔영상 ‘그로테스크’는 한국 모던댄스의 기원을 상기시키는 기념비적인 자료로서 소장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연낙재가 최승희 데뷔영상을 소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의 소수 지한파 지식인 덕분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일 관계가 첨예한 외교 갈등으로 치닫는 등 점차 격랑 속으로 빠져드는 최근 정국의 혼돈 속에서 보다 냉철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요청된다. 정치는 정치, 예술은 예술로서 접근하는 문화인의 자세 말이다. 한일 문화예술의 교류와 협력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