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새로운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새로운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9.08.3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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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사랑하는 지인을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늦가을,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질 때처럼 사람들이 순간 사라진다. 어제 한 사람을 보냈는데 내일은 또 누가 갈 것인가? 더운 날씨에 저승에 갈 노잣돈은 있는가? 문상객들은 정성을 담아 부조를 하지만 정작 그 돈이 가는 곳은 유족의 호주머니 속이다. 이렇듯 망자는 가는 순간까지 몸을 사르면서 보시(報施)를 한다. 마르셀 뒤샹은 ''죽음은 결국 남의 일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나중에 그의 묘비명이 됐다. 그렇다. 죽음은 결국 남의 일이다. 부모조차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대신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부모의 가슴을 후벼 파고 그 자리에 ‘한(恨)’을 심는다. 그래서 자식의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세상은 아수라장이지만, 그 속의 심연에는 질서가 드리워져 있다. 삶과 죽음이 그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는다는 필멸의 자연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유지된다. 그 위에서 펼쳐지는 각자의 인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말을 빌리면 한 편의 연극이며, 인간은 연기자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악역과 선역이 있을 뿐이다. 그 무대를 어떻게 무엇으로 채울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연기자의 마음과 의지에 달렸다. 비록 인생이 한 편의 연극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오늘 얼책(facebook)을 들여다 보다 뜻밖의 부음을 접했다.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사는 알랭 빠뻬로네(Alain Paperone)가 그 주인공이다. 10 여 년 전에 나는 그를 얼책에서 만났다. 사진을 통해 본 그는 알랭 드롱처럼 미남이었으며, 검정색의 짙은 라이반에 베이지색 버버리 코트가 잘 어울리는 멋장이였다. 그 이후 우리는 급속히 친해졌고 얼책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화가인 그는 디자인적인 감성이 풍부했다. 설화에 바탕을 둔 많은 그림을 남겼다. 오늘의 세계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를 섞어 몽환적이며 유머러스한 캐릭터들을 창안했다. 2011년, 내가 얼책에 ‘국제상상대학(International University in Imagination I.U.I)’과 ‘부러진 삽(Broken Shop)’을 창설하고 회원들과 온 오프라인의 활동을 벌일 때 그는 깃발과 ‘스내키(Snaky)’라는 캐릭터를 디자인해서 회원들을 기쁘게 했다. 생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Jin''하고 나를 부르며 사연을 쏟아내던 그. 내가 올린  글에는 꼬박 댓글을 달며 편을 들어주던 그가 죽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왕(Wangzie), 부러진 삽, 2010

사람을 만나려면 걷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직접 찾아가야 했던 아날로그 시대와는 달리, 가상공간에서의 소통이 가능한 디지털 시대에는 하루에도 수 백 번씩 대화가 가능하다. 트위터를 비롯하여 얼책(facebook), 인스타그램 등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SNS)의 매체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온라인의 사이버 세상이라고 해서 사람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은 댓글 하나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감정이 고무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돋우는 사람도 있다.

시장에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이버 세계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광고가 있고, 전자 상거래가 있으며, 사이버 시장이 형성돼 있다. 아마도 미술시장의 미래적 형태는 전자 상거래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시장이 점점 더 부각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실제의 질감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과 같은 비물질적인 작품들이 점점 더 큰 비중을 갖게 될 것이므로. 테크놀러지의 발달과 병행하는 미디어 아트의 놀라운 진전은 관객들에게 점점 더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통제하게 될 편리한 유비쿼터스 환경은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 논쟁을 야기하겠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할 사람들이 아니다. 내일 지옥 불에 떨어지더라도 오늘을 즐기겠다는 못 말리는 욕구는 새로움을 찾아 창조의 불을 피우게 마련이다.

2009년부터 얼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10년째다. ‘facebook'을 의미하는 ’얼책‘이란 단어는 ’얼굴 책‘의 준말로 내가 붙인 것이다. 얼이 담긴 책, 얼로 대화하는 책이란 뜻이다. 나는 얼책 활동 초기인 2010년과 2011년 두 해에 걸쳐 이와 관련된 학술논문을 두 편이나 썼다. “새로운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New creation comes out of the fingertips)."라는 문구는 스마트폰과 같은 SNS 매체를 통해 전개되는 사이버 시대의 예술적 특성을 집약해 보여준다. 아날로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예술 패러다임의 도래를 이 문장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는 저작(著作) 앱들은 이제 전문가와 일반인의 구분을 허문다. 저작용 앱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후 이를 사이버 공간에서 전시하는 것은 이제 흔하게 보는 광경이다. 예술은 천상의 지고한 곳에서 지상으로 하강하는 중이며, 사이버 세상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는 중이다. 그곳은 들어가기는 쉽지만 길을 찾아 다시 나오기는 힘든 미궁과도 같은 곳이다. 감자뿌리를 닮은 리좀(rhizome)의 구조를 지닌 사이버 아트의 세계는 디지털 문서의 하이퍼링크처럼 겅중겅중 건너뛰는데 꼭 들불에 놀란 캥거루 떼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미적 경험은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던 아날로그 시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사회적 관계망 예술(SNS Art)은 선형적 시스템이 아니라 리좀적 구조를 바탕으로 예술의 생산, 향수, 소비, 전파, 소통이 이루어지는 형태로 얼책,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각종 SNS 매체를 중심으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해 이루어지는 실시간 예술을 가리킨다. 이 예술의 성격과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관계(relationship), 2. 공유(sharing), 3. 대중참여(mass participation), 4. 일상 속의 예술창조(artistic creation in daily life), 5. 소통(communication), 6. 동시성(simultaneity), 7. 논평(comment), 8.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리좀적 구조(rhizomatic structure) 등등. 물론 이것은 아직 구상중이며 체계가 잡히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십년 전부터 얼책에 국제상상대학(I.U.I), 부러진 삽(Broken Shop), 파자마공화국(Pajama Republic) 등등 다양한 그룹을 통해 SNS 활동을 펼쳐 온 나의 경험에 의하면, 놀이에 바탕을 둔 이 퍼포먼스는 작고한 나의 친구 알랭도 잘 알다시피 경이 그 자체이다. 이러한 문화적 혁명에 앞장섰던 나의 친구 알랭이여, 부디 영면하시길!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