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인터뷰] 김주영 작가 길 위에서 예술과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다
[Special-인터뷰] 김주영 작가 길 위에서 예술과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다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김지현 기자
  • 승인 2019.08.3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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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에 안티테제, 제3세계 관심이 노마딕 프로젝트로, 노마디즘 작가로
회화, 조각, 설치 등 예술의 경계 짓기 지양해야

유럽 중세시대 귀족들이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종종 장기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그곳의 생활인으로 지냈다. 그들이 당시 가장 선망했던 곳은 ‘문화예술이 절정을 이루던 ’르네상스‘의 나라 이탈리아였다. 오늘날 예술인들에게는 그 도시가 프랑스 파리로 환치됐다. 그러나 작가 김주영은 이런 부르주아 여행과 자신의 노마드는 전혀 결이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유랑‘은 현대판 방랑객 김삿갓에 가깝다는 것.

▲김주영 작가가 자신의 작품 ‘밤의 심연’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노마디즘 작가’ 김주영은 평생을 부유하는 삶과 예술세계를 동일시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던 미대 교수직을 거침없이 던지고 1986년 파리 유학을 시작으로 인도ㆍ몽골ㆍ티베트ㆍ일본ㆍ유럽에서 20여 년간 지내며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을 해 왔다. 그 길에서 제3세계의 삶의 현장이 만나는 지점에도 자주 섰다. 몽골과 티벳에서 유목민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삶의 깊숙한 자리로 들어갔다. 그 이후 사유가 행위로 전이되는 그 모든 과정이 예술, 그 자체가 됐다. 

지구촌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작업한 ‘노마딕 프로젝트’는 작가의 핵심작업이다. 행위예술 작업으로 2000년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 :등잔불 祭>, D.M.Z.ㆍ2000년 프랑스 미술학교가 후원한 <神木>부터  최근 2017년 Projet Nomadic Village: du Villatalla(Italie)에서 à Granada( Espagnol)까지와 2016년 <제식: 꽃의 제전> 봉평-알제리-남불까지의 작업들이다. 국경을 초월해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아픔을 되새겼다. 일시적인 작업들이 대부분이기에 작가는 텍스트나ㆍ사진 영상ㆍ글로 자료(아카이브)화하거나 임상으로 작품을 남겼다.

그럼에도 김 작가는 “고향에 돌아와서야 안도감을 찾을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토속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황토집의 서까래, 마루 밑에 처박혀 있는 농기구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웅변하듯. 작가는 머나먼 문명을 향했지만, 떠난 곳으로의 본능적 회귀와 마주한 것이다. 이 본능적 회귀의 상징이 ‘쌀’이다. 쌀은 곧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자연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살아있는, 살아있었던 것에 대한 ‘경외’가 바로 이 생명과 직결돼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동네의 폐가에서 수집한 옷가지와 정미소의 잔재들 등, 한 때는 그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던 ‘생명성의 소재’이다. 이를 다시 작품을 통해 부활시킨 그의 본능적 움직임은 ‘생명의 존귀함’으로 귀결된다.

▲김주영 작가가 전시장 중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주영은 그의 작품과 경력에 비해 오히려 저평가된 작가다. 어쩌면 그의 외고집스런 작품 활동이, 곁을 주지 않아 그렇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 안성 ‘흙’에서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그가 지금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다. 검정을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의 말대로 그의 작품은 죽음이 아닌 모든 생명성을 포용하는 ‘검정’의 신비하고 묵직한 울림을 던져주고 있었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곧바로 ‘터키의 암굴’로 날아갈 꿈에 부풀어 있는 그를  지난 25일 청주시립미술관에서 만났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수, 그것도 미술인들이 선망하는 홍익대 미대 교수를 미련 없이 버리고 방랑을 시작하셨다(웃음). 수 많은 국가 중 시작점이 왜 프랑스였는지?

30대 철딱서니 없는 용기가 결국 50이 넘어 되돌아왔다. 노마드란 예술로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돌아오니 머물 곳도 없고 모친은 노환에 홀로 계셔서, 생계수단으로 다시 교수직으로 최선을 다했다. ‘최선!’, ‘일단 무어든 붙잡으면 최선을 다하자’가 내 인생 좌우명이다.

사실 내 노마드 시작점은 프랑스가 아니었다. 충북 진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외할머니를 따라 떠난 구포 피난길, 다시 학교에 가기위해 엄마 품 진천으로 돌아온 것이 시작이다. 청주ㆍ서울에 이어 파리로 갔으니 파리는 해외 노마드(nomade 방랑, 유랑, 유목, 이동)의 시작일 뿐이다. 프랑스는 미술인들에게 로망이었는데, 서양의 시민적 풍속도가 왜 우리에게 인기일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마 19세기 미술과 모더니즘의 현장이라는 미술사 교육이 이유가 아닐까? 인상주의 작가 특별전에 지금도 많은 시민들이 몰리는 것은 인상주의라는 서양미술이 보기 편하고 강한 이국취향을 쉽게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근대사를 일본식으로 배운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 생활에서 느낀 것은 달랐다. 내 체질상 화려하고 엘레강스한 유럽문명을 바라보긴 좋아도 뛰어들긴 싫었다. 다만 마음과 예술의 시야를 넓히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기간인 것은 분명했다.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의 계기가 됐다.

노마디즘...쉽지 않은 예술세계를 펼쳐 온 것 같다

우선 노마드의 사전적 의미는 유목의, 유랑(방랑)하는, 떠돌아다니는(errance, vagabond)이다. 프랑스 문화학자 아타리에 의하면 ‘진화한 생명의 역사 자체가 이미 노마드적이다’라고 한다. 노마드라는 사유의 '유목론(nomadology 혹은 nomadism)'은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 Gilles Deleuze와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타리 Felix Guattari가 공통 집필한『천개의 고원 Mille plateux』(혹은 『천의 고원』으로 번역)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노마드란 문화의 인문적 접근 논리로서 시작되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논리라는 시각과 동일하다. 내가 도불 생활을 한 80년대 중반 프랑스 문화계의 화두였고, 난 거기에 어눌하게 매료됐다. 유학과 현장의 삶속에서 사유체계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그땐 그랬지(황토집),2019,혼합재료,340x340x410cm

노마드nomadism(e) nomad(e)예술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예술인가 질문하게 하는 것은 우리네 미술에서 유독 그렇다. ‘낯설다. 이상하다.’ 재미있는 것인데 말이다. 주의 할 것은 우리말의 ‘길 떠난다’는 점에서 ‘여행’과 같아 보이나 좀 뉘앙스는 다르다고 본다. 유랑, 방랑은 목가적이고 감성은 시적 아우라를 갖는다. 우리는 도시 문명 속에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여가를 ‘여행’이라고 여기지만 유랑으로 보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유행가 가락 ‘떠나가는 김삿갓...’이 진정한 유랑 같다.

유럽에서 만난 노마드 작가들은 문명을 기피하고 무착근성, 즉 떠도는 예술가들이 많다. 캬라반이나 개조한 트럭을 집이나 아틀리에로 삼으며 이동한다. 히피나 보헤미안 무리의 아티타스트들이다. 그라피티 작가들도 포함된다. 또 많은 대지예술가(Land art)들이 유랑의 삶을 살거나 작업장을 이동하며 작업을 하는데, 대부분 일시적 설치 작업을 대지공간, 현지(in situ) 에 하고 사라진다. 극단적인 예로 리차드 롱은 사하라 사막에 발자국(Richard Long), < 두 번 걷기Two Walks> Dartmoor, 1972을 남기고 끝이다. 여기에 기록 (프로젝트 데생, 에스키스, 드로잉 등의 밑그림, 사진 비데오, 일기)만 전시장에 내놓기도 한다. 장르도 다양해 건축적 구조물을 만들기도 하고, 물소리 녹음만 남기는 개념작가도 있다.

▲생태의 논리, 2001-2019, 혼합재료, 122x320x9cm

타국에서의 경험이 풍부해 작품이 이국적 느낌이  날것  같았지만  작품 소재나 재료 사용  에서 토속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면서도 미니멀리즘한 작품 경향도 감지된다. 작품 속에 동서양이 양립하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떠나면 돌아오고 돌아오면 떠난다"라는 말이 떠올려진다.
맞다. 앞서 말했듯 교육에 의한 편견이든 이국취향의 정신적 경험은 과정일 뿐이다. 20년 파리생활이 아니라면 지금도 파리 풍을 좋아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허물어진 황토집의 서까래ㆍ마루 밑에 처박혀 있는 농기구ㆍ머리 수건 하나로 여름 열기를 가리는 밭두렁의 아주머니들이 좋다. 이들이 작업 소재가 되는 것은 회귀 본능인가 DNA 인가 나도 모르겠다.

고향에 오니까 평생 처음 안도감이 느껴졌다. 낯선 길에 서면 왜 그리 불안한 것 인지.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그 이방인의 불안을 즐겼다. 젊은 날의 나 자신을 거기(타국)에 풀어줬다. 이질적 환경에 맘대로 설왕설래하는 것이 좋다. 정체된 것은 질색이다.

여러  저서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글쓰기 역시  예술적  표현  방법의 일부인가?  사유의 단면을 설명하는 수단인가?

예술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내게는 삶 그 자체이다. 길을 가고, 우연히 떨어지는 물건을 줍고 그 모든 것 속에는 이야기가 잔뜩 있는데, 작업은 그것들의 질료(objets)를 털어 놓는 행위다. 나는 경계 짓기, 금 긋기가 너무 싫다. 그림이냐 조각이냐 건축이냐 이런 것도, 더 넓게 옷 만들기, 음식 만들기까지도 예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회화 설치 등을 보는 것이 시각적 사유의 언어이듯, 쓰기는 사유의 읽기라는 예술적 표현이다.

한 인터뷰에서 미술계에 바라는 점에서 미술행정가와 예술가가 조화이루길 바란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현재에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작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기 위해선 행정이나 큐레이터 등에 어떤 노력과 자질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어렵고도 좋은 질문이다.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이 멘트는 한 고집스런 작가의 희망사항이다. 행정가와 작가의 길은 같이 가야하면서도 전혀 다른 입장이다. 우리나라 초기근대(서양)미술사를 보면 내가 20-30대 때만해도, 작가가 전시회하고 싶으면 갤러리 주인과 성사시켰다. 계약서도 없었다. 대관비를 내고 때론 카탈로그를 만들고 섭외를 하고 작품을 파는 일까지 모두 작가가 했다. 그러나 현재 미술계는 체계화돼 그 역할을 분담한다. 전문화ㆍ다원화 된 것이다. 대학에 전문분야 학과가 생길 정도다.

▲방앗간 추억 ,2019,혼합재료,350x200x150cm,

이런 문제가 늘 생기지는 않지만, 공공 미술관이 어떤 기획 하에 비교작가를 선정할 경우 기획자와 작가 사이에 충분한 논의와 확실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작가란 독선적일 정도로 강한 주관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한다. 방어본능으로 작가의 입장을 전한다. 선정 대상에 오른 작가가 행정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도 잘못 된 것이지만, 상황을 간과해 전시에서 작가가 의도한 작가적 자존감에 손상이 가면 조화가 깨진다.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공공기관으로서 미술관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환기해야한다. 현대미술관의 미션은 새로운 경향성에 관한 연구와 전시가 중심이라고 본다. 교육적이고 시민문화를 선도하는 공공의 미션도 뒤따르는 것이다. 여기 현대미술관의 전문성과 대중친화이라는 두 개의 양면성이있다. 이 두 개념은  공공미술관 운영의 고민요소일 것이다. 두 개념사이에는 상반될 수도 있는 양상이 많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김주영작가 모습

미술관이 어떤 기획 하에 작가를 선정할 때 기획 컨셉트가 분명해야한다. 작가 선정에서 자료(아카이브)의 충분한 확보와 전문적 분석이 필요하다. 큐레이터나 학예실의 개인 취향이나 배후의 인맥이 개입된다면 공공성을 잃을 수가 있다. 더욱 두 작가를 비교하듯 동시에 놓을 경우 아주 신중하고 작가와의 합의점을 논의해야한다.

선생이 생각하는 작가의 분류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작가는 두 카테고리가 있다고 본다. 고도의 지적 사유와 논리를 배경으로 한 작가군, 독일 컨템포러리 아트를 선도하며 미술학교를 만들기도 한 교육자인 학장 죠셉 보이스(Joseph Beuys)나 소르본느에서 수학을 전공한 루이스 부르조아(Louise Bourgeois) 같은 예술가가 있다. 반면 파리 퐁피두에서 H. 마르땅이 기획한 <지구의 마술사(Magiciene de la Terre)> 기획 전시회는 아프리카의 원주민 장인이 목각 마스크를 가지고 등장해서 화제였는데, 이들 모두가 현대미술가다.

행정이나 큐레이터는 전문적 스터디를 할수록 그 소임을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구조가 다원화 돼, 그들 각자의 역할 또한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꼭 학술적 고학력만이 아니라 그 분야에 자신의 소신을 거는 현장(국내외) 경험ㆍ작가들의 양적 질적 스펙 분석력 아카이브의 확보 등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행정가와 예술가가 각자의 분야에 집중해 전문성을 키워야한다. 그러면 작가들도 공정한 작업 발표의 기회, 지원받을 기회를 늘릴 수 있다. 그런 기회를 기다리며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걸며 창작에 전념한다.

▲밤의미로 150x2000cm, 광목에 젯소, acryliqueoilstylo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와 그 이유는

파리에서 처음 개인전 할 때다. 1994년  룩셈부르그 공원 옆 베르나노스(Bernanos) 갤러리였다. 설치작을 내놓았고 조선시대 서민 기생상을 대량복사해 바닥에 폈었다. 전시 끝날 무렵 기생의 영혼제 퍼포먼스를 불로 태우는 제식으로 했는데, 경찰이 멀리서 끝까지 지켜봤었다. 그 때 지도교수가 응원해줘서 힘이 많이 됐다.

아카이브 정리를 꼼꼼하게 해온 것으로 안다

그렇다. 70대에 들어서니 나중에라도 쓰레기로 부담을 지우지 않겠노라 생각하면서 정리해 왔다. 작품들이 전시장으로 나가 작업실 공간이 넓어졌다. 요즘은 햇빛도 좋아서, 평소 생각한 옷가지들을 검은 물감으로 박제하는(noircie) 작업을 한다. 작품 모티브를 검은 옷들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되찾는 것이다.

먼  훗날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원하나

훗날, 날 기억해 줄까? 그러면 고맙겠다. 더욱 예술가의 길을 간 ‘미아’로 기억되면 행복하겠다. 유랑(노마드)의 생태학은 귀거래사이다. 조용히 나의 반려견 철수에게 물어보겠다. 순이가 되어.

<여인의 도시, 녹색의 전령사들> 나무판, 유성, 크레용, 오일바, 오브제 꼴라쮸(풍구, 네온 )▲ 

앞으로 전시 계획과 꿈이 있다면

사실 이번 전시회 현장 설치작품 2점이 모두 내가 기획한 것에 못미쳤다.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내게 적절한 공간이 주어진다면 <황토집>도 사방에서 모두 돌아 볼 수 있고 다락방에도 관객이 올라 갈 수 있게 짓고 싶다. <방앗간>도 스케일이 실제 같게 실현해보고 싶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기다리면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김주영 작가 1948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진천과 청주에서 학창시절(청주여자고등학교)을 보내고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1986년 파리에 유학하여 파리 제 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파리 볼가 아틀리에를 거쳐 프랑스 문화성이 제공하는 세잔 아틀리에에 영구 레지던스 작가로 입주했다. 1988년 인도 행을 시작으로 하여 몽골, 티베트, 일본, 유럽, 한국 DMZ 등지에서 노마디즘 콘셉의 퍼포먼스와 설치를 중심으로 한 현장 작업을 해왔다.  현재 경기도 안성 귀촌, 분토골의 아텔리에 흙에 사는 전업작가다.

동인:
Association ‘c’est bien parti’, 프랑스
On the roud production 오스트리아

개인전:
2017 <Korean Platform>, Paris Asianow 기획 초청, 부산비엔날 큐레이팅(an/other avant-gard 한국 김주영의 설치/퍼포먼스) France
2011: <오솔실에서 만남 사람들>  레지던스/개인전, Aubagne, France
2010: Kunst DOC 초대전, 서울
2009: POSCO 초대전, 서울
2008: 미술관 몸 스페이스, 청주
2007: 장-프랑스와 메이Jean François M 갤러리 , 마르세이유, France
2005: <떡갈나무 숲 길 Joseph Beuys>한전아트센터,서울
2000: 그로 뷰쏭Gros Buission; 에꼴 드 보자르, 비뇨 –슈르-센느, 파리
      :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인사 아트 센터, 서울 

그룹전:
2019 <3.1 운동 100주년   >광주 시립미술관 pavillon 하정웅
2018 <경기 아카이브, 지금>, 경기 미술관주관
2014: Ad ognun la sua parte, 참여, Villatalla Imperia Italia
2016: <뮤즈 김향안> 1기 재단작가전 환기 미술관기획      
2012: <생각 여행>, 경기미술관 초대
2012 반추의 우물, 설치, 금강자연비엔날레, 공주
2011: <정주에서 이동으로> 소마 미술관 초대전
2008:<화가의 30년 그 아름다운 변화>, 예술의전당기획
2007: < 70년대 한국 미술전.> 예술의 전당 기획
2005:  환기 재단 소장 작가전, 환기 미술관
2002: INDEXING 2002 A KOREAN  CONTEMPORARY ART SCENE, 문화예술 진흥원 ‘<컨테이너>’ 문예진흥원 백지숙 기획, 서울
2002: 'Diaspora' 광주 비엔날, 광주 Installation; mémoire  de Koryo   
2001: <여성과 환경>, 시립 현대 미술관, 서울
2001: Pas sages전, 파리교외 오니 감옥소 (프랑스 법무성 후원)

수상:
1991 몽루즈 현대미술전 콩쿠르, 몽루즈,
1992 레아리떼 누벨전, 그랑 빨레, 파리
1989 샤를르 울몽 재단 콩쿠르 입상 전, 파리
1988 환기재단 초대전, 뉴욕 (‘90-‘91환기장학금)
1975: <한국미술 협회>전, 서울(미협 이사장 상)
1973 <대한민국 국전>입선 (시인이 선정하는 서양화부분 최고상)

PERFORMANCE-INSTALLATION in situ:
방황, 산문, 도큐맨트, 흔적
2017 Projet Nomadic Village: du Villatalla(Italie) à Granada( Espagnol)문예진흥 기금 보조 사업
2016  <제식: 꽃의 제전> 남인도
2015  projet 마을 미술: <분토길 따라 철수와>경기문화재단  기금 보조 사업
2014  <시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가깝고도 먼 사람들을 만나러 가다.> < 1, 칭짱철길(青藏鐵路)을 따라 북경(北京)에서-서안(西安)>-라사(拉薩)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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