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미술현장,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2019ⓛ "무질서, 혼동, 관습화 되어 있지 않은 것에서 오는 의미체계의 불안함"
[세계미술현장,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2019ⓛ "무질서, 혼동, 관습화 되어 있지 않은 것에서 오는 의미체계의 불안함"
  • 이은주 아트스페이스 와트 대표
  • 승인 2019.09.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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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시대에 살기를
▲이은주 아트스페이스 와트 대표
▲이은주 아트스페이스 와트 대표

필자는 예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내용을 반복적으로 반문해 본다.

‘내가 이 일에 얼마나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는가?’한 가지만 탁월해서는 안 되는 미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여정은 그야말로 고행이다. ‘이 재미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결국 이 일이 진짜 재미있나?’ 이 질문들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 될 때와 끝날 때를 비롯하여 특히 일이 진행되는 과정 중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출몰한다. 계획, 제안, 연구, 지원, 행정, 진행, 출판, 홍보 등의 다양한 갈래의 무거운 업무를 15년 이상 반복하여 그 모든 과정이 익숙해 졌을법한 시기이지만, 위의 세 가지 질문은 토씨하나 바뀌지 않은 문구로, 무섭고 두려울 정도로 순환된다.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 필자가 하는 첫 번째 실행은 골이 깊게 파이고, 존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감각의 실체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전시가 펼쳐 질 때 마나 새로운 언어와 주제가 출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필자는 그 이전에 감각해 보지 않았던 감각을 기능적으로 채집하는 것이 새로운 전시를 기획해 내는 가중 중요한 절차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레이어를 통해 형성된 고정적이면서도 유연한 이 감각 덩어리를 밖으로 표출시키기 위해서 많은 제약이 뒤따른다. 예산, 작가 리서치, 시대와의 조우, 전시를 객관화시키는 요소 등은 이미 필자가 상정해 놓은 감각 덩어리들에 엄청난 힘을 가하며 개입한다. 때때로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는 전시의 특정 형식은 그 물컹거리는 덩어리를 쥐어짜고, 갈라놓고, 특정 프레임에 가두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최초의 감각 덩어리는 이제 누가 보더라도 그럴싸한 모양을 갖춘다. 이렇게 전시가 진행되면서 수반되는 포장을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집단은 한정적이다. 결국 무수히 반복되는 이러한 행위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시작부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장-뤽 낭시(Jean-Luc Nancy)는 플라톤의 “꼬리도 머리도 없는” 몸 이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낭시는 특정 물질 안에서 지주나 실체 구실을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몸에는 꼬리도 머리도 없다고 언급했다. ‘꼬리도 머리도’ 없다고 할 때는, 양서류 동물을 지칭하기에 적합한 ‘무미류’라는 뜻이 아니다. 무력하고 무지한 몸, 그런 몸이 지닌 가능성, 그것의 힘과 사유는 다른데 있다. 몸에 필요한 것은 다만 다른 범주에 속한 힘과 사유이다.(장-뤽 낭시, 『코르푸스』, 문학과 지성사, 2012, p. 17.)

▲베니스 비엔날레 2019, 재미있는 시대에 살기를, 지아르디니(GIARDINI) 공원 입구ⓒEunjoo Lee
▲베니스 비엔날레 2019, 재미있는 시대에 살기를, 지아르디니(GIARDINI) 공원 입구ⓒEunjoo Lee

의미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야 되지만, 예술작품은 본래 의미 없는 것에 더 깊게 연루하고 있어야 하고, 몸으로 감각하기 위해 논리를 해체하고 싶지만 이 조차도 이성적 사고 이후에 발현된다. 예술작품은 감각적인 것과 의미 없는 것들과 닮아 있고, 이 작업을 감각해야 하는 관객은 이성과 논리로 분석해야하는 모순에 놓여 있다. 이때 우리는 예술작업을 보면서 어떠한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

처음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 제목을 받아 들었을 때 필자는 단어 그대로의 즉자적 의미에 고취해 있었다. 최근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대다수의 대중은 욜로(You only live once!)라이프를 지나 소확행(小確幸)과 워라밸(Work-life balance) 등의 가치를 내세운다. 특정세대에서 일어났던 이 붐은 점차 다른 세대까지 확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일과 여가를 동시에 쟁취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 듯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광고와 상품들이 우리의 지친 일상에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의 제목은 바로  《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은 흥미로운 시대에 살기를》이다. 필자는 베니스로 떠나기 전 이 전시 제목을 유심히 살폈고, 말 그대로 각 개인의 일상이 예술과 조우되는 편안한 에피소드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전시의 구성과 실상은 달랐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흥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실상 예술이 모방해 내고 있는 세계는 전쟁, 난민, 환경문제 등 ‘흥미’를 동반시킬 수 있는 테제를 품고 있지 않다. 결국 관람객 개개인은 아직 봉착하지 않은 미래의 문제마저 끌어안고 있는 사회 속 주체자로 남아있다.

필자도 베니스에서 전시를 보면서 미리 봐 두었던 일부 전시평과 여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미술관계자를 비롯하여 기자들이 쏟아낸 평에서는 전시의 난해성을 꼽을 수 있었으며, 때문에 전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선뜻 와 닿지 않는다는 지점이었다. 더 나아가 역대 치러졌던 비엔날레보다 평가절하 한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기획자의 의도를 조금 면밀히 살펴보면 여러 군데에서 울려 퍼지는 악평은 미리 예견되어 있는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 우선 기획자는 전시 서문의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작성하였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가 관습적인 범주들 사이 공간을 활용하는 작가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들의 작품에는 종종 문화나 미적 영역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장르, 관습, 이미지들을 겹치거나 결합시켰다”

▲순위엔, 펑유(Sun Yuan and Peng Yu), Can't Help myself,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순위엔, 펑유(Sun Yuan and Peng Yu), Can't Help myself,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Venice Biennale 2019, France pavilion, 프랑스 국가관 전시전경ⓒEunjoo Lee
▲Venice Biennale 2019, France pavilion, 프랑스 국가관 전시전경ⓒEunjoo Lee
▲이불, Scale of Tongue,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이불, Scale of Tongue,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이번 해에 선임된 전시 총 감독 랄프 러고프(Ralph Rugoff)가 기획한 전시는 《제안(Proposition) A》와 《제안(Proposition) B》로 《제안 B》는 지아르디니(GIARDINI) 센트럴 파빌리온에서 진행되고 《제안 A》는 아르스날레(ARSENALE)에서 선보였다.

우선 제목에서 보여 지듯이 《May You Live in Interestion Times(재미있는 시대 속에 살기를)》이란 주제를 통해 랄프 러고프가 선정한 이 시대는 폭력, 반동, 시위, 이상기후, 부인부빈익빈, 난민, 페미니즘 등 지구를 둘러싸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두운 상황이 전제돼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업을 통해 ‘흥미’를 찾을 수 없고, ‘흥미’를 찾아 나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만을 발견한다.

전시장에는 이미 각종 오염물질로 변해 버린 바다, 지구온난화 정책을 통한 정치활동, 혼탁하게 섞여버린 피와 DNA, 금기된 것들의 향연, 절단된 신체, 과잉된 신체 구조와 몸짓 등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보고 싶지 않은 분화구로 점철되어 있다. 주로 작업들은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설치 위주의 작업이 혼재되어 있었으며, 논리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곧 바로 무화시켰다. 그래서 이 전시를 보기 시작한 필자의 이성은 어느 순간 마비되었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작업과 작업 사이에서 벌어지는 혹은 연결되는 그 어떤 간극에 대해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물론 필자는 작업과 작업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관계성을 끊어내는 전시를 폭넓게 분석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전시기획에서 다루는 주제가 전 지구적인 차원 일수록 그 내용의 면면은 난해하며, 종합적 관점을 도출하려 할수록 그 논점은 더욱 흐려질 수밖에 없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예술이라는 세계를 통해서 국가 권력의 힘, 지리적 위치에서 오는 정치력, 선진국과 후진국 등을 결정짓는 요소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문명 개발 속도에 따른 국가 간 부의 편차와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점철된 예술세계를 접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드라 비르켄(ALexandra Bircken)의 ESKALATION, Proposition A, Arsenale 전시 전경, ⓒEunjoo Lee
▲알렉산드라 비르켄(ALexandra Bircken)의 ESKALATION, Proposition A, Arsenale 전시 전경, ⓒEunjoo Lee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Proposition B, 지아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전시전경ⓒEunjoo Lee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해 왔던 고착화된 관습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나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관습을 채득했던 타인의 세계를 직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관객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봉착시킨 고정관념을 더 살펴야 한다. 그래서 ‘흥미’라는 키워드 보다 불편, 불안, 작취, 유린, 폭력, 선동, 다양한 층이 혼재된 삶 등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키워드를 차곡차곡 나열하여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랄프 러고프의 전시구성 방식인 것이다.

인종, 문화, 관습, 역사, 문명, 기술,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나라와 사회를 규정하는 이론은 어디든 존재한다. 하지만 지리적 위치가 다를수록 그 다양성은 곧 차이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것으로 구별된다. 필자는 랄프 러고프가 이 전시를 통해 전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국가, 한 개인들에게 어느 정도 골고루 퍼질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그의 전시서문에 박제된 글귀를 떠나 있는 전시장의 작업을 하나하나 대면하면서 그러한 그의 발칙한 의도가 잘 실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찬성표를 들 수 없었다. 이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술작업 하나하나를 최대한 관대하게 수용하는 것이었지만 그 작업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체계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다만 설치 작업의 조형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관객은 기획자의 관점과 의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없으며, 전시 구성은 논리, 이성, 서사적 구조로 읽어낼 수 없는 느슨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허물어 졌으며,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오직 ‘타자’들이었다. 타자들만이 그 자리에 득실득실 넘나들고 있었다. ‘타자들의 자리가 분명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기획자가 선정해 놓은 《제안 A와 B》의 전시 관람을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