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모차르트 이야기1-대미사 C단조에 새겨진 모차르트의 아픔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모차르트 이야기1-대미사 C단조에 새겨진 모차르트의 아픔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19.09.3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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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ㆍ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ㆍ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2019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해다. 유럽에서는 위대한 천재 모차르트를 키워 낸 아버지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음악회와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누구보다 긴밀한 동지였지만, 뼈아픈 갈등을 겪기도 했다.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해, 그 기나긴 드라마는 음악사에서 중요한 화두가 된다.

불운했던 1778년의 마지막 날,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그날 모차르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줄도 작곡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리 여행은 쓰라린 좌절로 끝났다. 어린 신동 모차르트에게 열광했던 파리 시민들은 22살 어엿한 대가가 되어 나타난 모차르트를 외면했다.

모차르트는 구직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모차르트를 돌보기 위해 아버지 대신 파리에 온 어머니, 하지만 정작 돌봐줘야 할 사람은 어머니 자신이었다.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여행비를 벌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 때문에 어머니 곁을 충분히 지키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난생 처음 깊은 시름에 빠졌다. 아버지 레오폴트도 상처를 입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처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슬픔을 느낀다”고 했고, 이내 아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 아버지의 질책은 안 그래도 시름에 빠져 있는 모차르트에게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를 뵐 낯이 없었고, 봉건 영주 콜로레도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그 곳으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모차르트는 사랑하던 알로이지아 베버를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1년 전, 그는 유망한 소프라노였던 그녀를 위해 무료 레슨을 해 주고, 맞춤옷처럼 그녀 몸에 꼭 맞는 아리아를 써 주고, 이탈리아로 데려가서 프리마돈나로 데뷔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그녀가 자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모차르트가 파리에서 좌절을 맛볼 동안 그녀는 뮌헨 궁정 오페라의 프리마돈나가 돼 있었다. 그녀는 빈손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를 싸늘하게 외면했다. 모차르트에게 의례적인 눈길을 한 번 주었을 뿐, 파리 여행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도 않았다. 모차르트는 그녀가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편지가 도착했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하소연하며, 아들에게 당장 돌아오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제 정신 못 차리고 뮌헨에서 ‘방탕한 꿈’을 꾸고 있는 아들을 심하게 꾸짖었다. 아들은 답장을 쓴다. “오늘은 아무 일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아들은 애정이 담뿍 담긴 말로 아버지를 위로한 뒤 덧붙인다. “참, ‘방탕한 꿈’이라고 하셨나요? 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것입니다. 이 땅 위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하필 ‘방탕한 꿈’이라니요. 평화로운, 달콤한, 상쾌한 꿈이라고 하셔야지요. 평화롭거나 달콤하지 않은 것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슬픔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 가지 참을 수 없는 일들로 이뤄져 제 인생을 만들어낸 현실 말입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장난감 교향곡>을 쓴 유능한 작곡가였고, 모차르트를 낳은 1756년 유명한 <바이올린 교본>을 펴내서 유럽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 책은 지금도 18세기 연주법을 공부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참고하는 명저로 남아 있다.

그는 어린 아들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자 음악가로서의 자기 경력을 접어둔 채 아들을 데리고 전 유럽의 왕실을 순방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유레일 패스를 끊어서 휘익 달려가는 신나는 여행이 아니었다. 마차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려야 했기 때문에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없었다. 마차 바퀴가 진흙탕에 빠지거나 바퀴살이 부러지기 일쑤였다. 잘츠부르크 궁정 부악장이던 레오폴트는 2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저축하여 여행을 준비했지만, 모자라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곳곳에서 가족 연주회를 열어야 했다. 어린 모차르트와 누나 난넬은 여행 중에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모차르트에게 최상의 교육 기회가 됐다. 그는 7살부터 10살까지, 머리가 말랑말랑한 나이에 유럽 주요 도시에서 활약하는 최고의 음악가들을 만나서 당시의 음악 조류를 모두 배웠다. 프로이센 궁정의 플루트 연주자 크반츠는 저서 <가로 플루트 연주 기법>에서 “도시마다 다르게 발전하는 음악들의 장점을 모두 취합하면 최상의 음악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을 실현하듯, 유럽 주요 도시의 음악을 두루 익힌 최초의 코스모폴리탄 음악가 모차르트가 탄생한 것이다. 이 놀라운 탄생을 가능케 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레오폴트였다. 어린 모차르트에게 “제일 먼저 하느님, 그 다음은 아버지”란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잘츠부르크보다 더 큰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목표에서 의기투합했다. 이왕이면 파리, 런던, 로마, 밀라노, 빈 등 대도시의 왕궁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뒤 가족이 함께 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구직 활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가장 뼈아픈 실패를 맛본 파리 여행 때문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에 더 악화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아버지가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알로이지아가 모차르트를 거절함으로써 자연스레 문제가 해소됐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1779년 봄 잘츠부르크로 돌아왔고, 아버지와 아들은 다시 새로운 미래를 함께 모색하려 했다. 하지만 1781년 모차르트가 완전한 자유음악가로 데뷔하는 순간 두 사람의 갈등은 다시 심각한 위기로 치닫는다.

1781년 초, 모차르트는 뮌헨에서 새 오페라 <이도메네오>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는 새 황제 요젭 2세의 즉위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빈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지체없이 빈으로 오라고 명령했다. <이도메네오> 초연을 위해 한 달 휴가를 낸 모차르트가 석 달 가까이 자리를 비운 것은 대주교가 볼 때 두 달 가까이 무단결근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하인 주제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차르트의 버릇을 이참에 확실히 고쳐주려 했다. 대주교는 빈에서 자신이 주최한 연주회에서 모차르트가 연주할 것을 명령하면서, 다른 공공 연주회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 금지했다.

이 무렵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분노와 모멸감, 그리고 대주교에게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결기로 가득하다. “어제는 정오 무렵에 식사를 했습니다. 대주교의 시중을 드는 시종 둘, 요리사 둘, 그리고 제가 함께 앉았습니다. 시종들이 상석을 차지했고 저는 가까스로 요리사 윗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들의 홀대를 참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1781년 3월 17일, 빈에서) 대주교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대꾸하는 모차르트에게 욕설로 응수했다. “불한당, 파렴치한, 배은망덕한 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 모차르트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하인 노릇을 해야 하냐”고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사람들은 제가 음악을 할 때는 다들 찬탄하지만, 돌아서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무시하죠. 대단한 사람 취급을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느 정도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사직서를 냈지만, 하인 주제에 자기 거취를 선택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명령을 거부하고 빈에 머물렀다. 황제 요젭 2세가 좋은 일자리를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고, 사랑하는 콘스탄체 - 알로이지아 베버의 동생 - 가 응원해 주고 있는 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파국의 6월 8일, 대주교의 부관인 아르코 백작은 글자 그대로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쫓아 버린다. 음악사상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잘츠부르크에 앉아서 아들의 편지로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아버지는 대경실색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참담한 파국이었다. 모차르트는 이제 25살,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볼 때 아들은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였다. 아버지는 이제 환갑이 지난 노인이었다. 아들은 자기 재능을 자각하고 있는 젊은 천재로서, 아버지의 보호를 벗어나 자유롭게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단 고개를 숙이고 훗날을 기약하라고 충고했지만 아들은 더 이상 자유를 유보할 생각이 없었다. 아들은 꿈꾸는 완전한 자유는 아버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그것은 낡은 봉건사회와 새로운 시민사회의 대립, 그 축소판과 같았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아버지는 이 결혼에 끝까지 반대했다. 유럽 최고의 음악가가 되어야 할 아들이 평범한 여성에게 빠져서 재능과 경력을 썩히게 될 게 분명하다고 거듭 경고했다. 아들은 “사랑이 중요할 뿐, 남들처럼 돈과 지위를 위해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결국 1782년 8월 4일, 아버지의 동의 없이 콘스탄체와 결혼을 강행했다. 이 순간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아버지는 딸 난넬에게 편지를 쓸 때 ‘아들’이나 ‘볼프강’이란 표현 대신 ‘네 동생’이란 냉정한 표현을 쓰게 된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공식석상에서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건 금지됐다.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나는 1791년까지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잊혀진 음악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이 아주 끊긴 건 아니었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자유음악가로 새롭게 출발했다. 다행히 황제 요젭 2세는 모차르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는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차르트를 궁전에 초대하여 당대의 피아노 거장 클레멘티와 경연하도록 했고, 일반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독일어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의 작곡을 맡겼다. 모차르트는 빈에서의 새로운 활동, 특히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의 작곡 과정을 아버지에게 상세히 알렸다. 결혼 생활도 행복했다. 콘스탄체를 위해 노래연습곡을 써 주었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해서 그녀와 함께 연주했다. 결혼 이듬해 첫 아들 라이문트가 태어나자 모차르트는 어엿한 아버지가 됐다.

대미사 C단조는 콘스탄체와의 결혼에 바친 기념비이자, 아버지에게 이 결혼을 축복해 달라고 간청하는 영혼의 하소연이었다. 결혼 전 콘스탄체는 3주 동안 앓아누운 적이 있는데, 모차르트는 그녀의 치유를 축하하기 위해 과거의 어떤 미사곡보다 규모가 크고 울림이 깊은 이 걸작을 썼다. 1783년,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이 곡의 악보를 소중히 챙겨 들고 잘츠부르크를 방문했다. 10월 26일,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모차르트가 지휘하고 콘스탄체가 소프라노 파트를 노래했다. 봉건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가 버티고 있는 잘츠부르크 대성당이 아니라 변두리의 성 피터 성당이었다. 모차르트는 싸늘하게 굳어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 숭고한 음악이 녹여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모차르트 대미사 C단조 K.427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몬테베르디 합창단)
https://youtu.be/OeHlSUFQKls

콘스탄체가 부른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 링크 35:35)를 통해 두 사람의 결혼은 천상의 아우라를 갖게 됐다.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오보에, 파곳은 소프라노와 어우러져 숭고한 생명의 잉태를 예찬한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끝까지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해 말, 모차르트 부부는 아픈 마음을 안고 빈의 집에 돌아왔다. 잘츠부르크 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첫 아기 라이문트가 세상을 떠난 걸 발견하고 두 사람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음호에 계속]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96

*이채훈: 중학생 때 베토벤 교향곡을 듣고 클래식에 입문했지만 결국 음악을 전공하지 못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 중 제주4·3, 여순사건, 보도연맹사건을 취재했고, 정경화·정명훈·사라장에 대한 인물다큐와 <모차르트-천번의 입맞춤> 등 음악다큐를 연출했다. 저서는 <클래식 400년의 산책>,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가 있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지만 모차르트야말로 우주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