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삶의 본질에 대한 미나유의 해답-‘구토(嘔吐)’
[이근수의 무용평론] 삶의 본질에 대한 미나유의 해답-‘구토(嘔吐)’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0.1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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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유프로젝트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무대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사람들이 한사람 씩 차례로 이동해간다. 그들이 택하는 경로는 동일하지만 취하는 동작은 개별적이다. 개별적인 움직임이 문자의 기호를 상징한다면 네 명 남성무용수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움직임은 각자의 알파벳을 조합하여 단어를 만드는 실험일 것이다. 단어들이 결합되면 의미가 형성되고 형성된 의미들은 인간의 사고를 촉진시킨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존재 의미도 그 안에서 탐색된다. 의도적인 불협화음 혹은 규칙적이거나 불규칙적인 기계음이 나지막하게 연속된다. 맥박과 호흡 등 생체 리듬이 뒷면 벽 스크린에 꾸준히 기록되고 전동식 타자기소리가 기계음을  대체한다. 종이 위에 글자가 찍혀지고 줄을 바꾸어 긴 문장이 쓰여 진다. 점점 빨라지는 타자기소리와 함께 무대의 긴장도 고조되어간다. 어스름한 조명아래 암중모색하듯 전개되던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찾아온 침묵과 함께 정지하고 영상은 뇌파의 진동만을 소리 없이 기록한다. 무용수들이 모두 지쳐 바닥에 너부러지고 벽 아래서 한 남자가 구토(嘔吐)를 하고 있다. 구토는 현실세계에 대한 불만이고 인간 본질에 대한 각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현실적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을 논리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어스름한 조명을 받으며 30분간 펼쳐지는 이러한 장면들은 ‘미나 유’가 그려내고자 한 ‘구토’(9.21~22, 국민대 예술대극장)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장면이 바뀐다. 조명이 밝아지고 음악의 톤도 높아진다. 영화 속 장면들이 스크린에 비쳐진다. 피아노 앞에 앉은 남성이 적군의 장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쇼팽의 발라드(#1)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적인 상황에서 예술은 피아니스트의 목숨을 구한다. 어두운 바다 가운데서 배가 기울어지는 듯 하더니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장면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루고 비극적인 장면들이 영상을 가득 메운다. 그 가운데 의연히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있다. 바이올린 악사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늠름하게 음악(Near, My God to Thee)을 연주하고 선장도 끝까지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 인간의 진면목은 위기 가운데서 들어난다. 여인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죽기까지 그녀를 보호하는 남성은 사랑과 희생의 완성형이다. 전반부에서 인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냈던 ‘미나 유’는 후반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20세기 최후의 지식인으로 칭송되는 불란서 실존철학자이고 ‘구토’는 일기체로 쓰여진 그의 초기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사르트르는 존재와 본질에 대한 회의를 구토(nausee)로 표현하고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계속 살아가야할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나 유의 ‘구토’는 무용가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 자신을 향한 동일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소설쓰기에서 출구를 찾은 것처럼 미나 유는 절망적인 한계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를 공연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술은 끝까지 남아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한 배려로서 완성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화여대 무용과 1회 졸업생인 미나 유(본명 유정옥)는 경희대 대학원을 거쳐 미국에서 조프리 발레, 알빈 에일리, 마사 그라함을 사사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뉴욕을 떠나 쾰른, 뮌헨, 뒤셀도르프, 비엔나, 취리히 등 유럽의 무용단을 섭렵한 그녀는 1991년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실기과 교수로 초빙되어 교육자로서 제2의 삶을 개척한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한예종 졸업생들로 구성되어(2001) 대표적인 컨템퍼러리무용단체로 성장한 LDP(Lavatory Dance Project)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정년을 맞아 한예종을 떠난 그녀는 ‘Motion Five’(2014), ‘2015, 현재 우리는 어디까지 왔을까?’등의 작품을 통해 춤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면서 그녀가 목도한 한국사회의 기이한 현상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2019년 판 ‘구토’는 그녀의 관심이 무용가와 사회문제를 뛰어넘어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 준 수작이다. 진지한 관객이라면 이 작품을 통해 사르트르의 철학과 미나 유의 예술이 만나는 접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 무용은 참 매력적인 예술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