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 수상자 인터뷰] 정귀자 민화장 "민화는 한국적 요소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대표 전통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 수상자 인터뷰] 정귀자 민화장 "민화는 한국적 요소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대표 전통화"
  • 인터뷰 ·정리/이은영 발행인·김지현 기자
  • 승인 2019.10.1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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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귀자 민화장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 전수교육조교)
“피카소 그림보다 민화가 훨씬 오래된 그림임에 자부심이 있다”
마트료시카를 보면 러시아 인형임을 알 듯, 민화는 한국 전통화를 대표 한다
시대가 변하면 시대 변화에 맞춘 민화가 나와야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세계화 지향에 있어 가장 익숙한 문장 중 하나다. 한국인의 미의식과 조형감각을 담는 그림 ‘민화’의 세계화를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다. 서울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 전수교육조교 정귀자(승희)의 이야기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 ‘민화’의 원형을 재현해 전통적 미감을 지켜왔다. 그러면서 민화를 접목시킨 공예품을 만들며, 실용성을 지닌 ‘민화’의 의미를 더했다.

▲정귀자 민화장이 전시도록을 보며 민화를 설명하고 있다

정귀자 민화장은 서울시무형문화재인 故 김만희 선생에게 민화를 사사했으며, 2003년에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전수조교가 됐다. 이후 그는 국내외 전시참여와 민화체험을 지도하며, 민화의 저변확대 및 전승ㆍ전수활동에 주력했다. 돈화문교육관에서 체험교육과 전수활동을 펴며, 민화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도 해왔다. 그는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지난 1월에는 제10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부문에서 민화로는 최초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아록전통민화연구소는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자, 선후배간의 사랑방이다

정 민화장은 김만희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민화 전통 보존과 창작을 강조했다. 젊은 작가들에게 “민화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달라질 필요가 있다”라며 “세계화에 맞춰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한다”라고 주문한다. 세상의 변화로 쓰임을 다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책가도’ 속 기물을 현대 기물로 바꾼다거나, 맹수의 왕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그린 ‘작호도’처럼 민화 속 한국적 요소를 세계인에게 전파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민화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화 상품의 변신도 제안한다.

▲까치호랑이(작호도)6점 중 일부(도판=정귀자 제공)

인터뷰를 위해 지난달 찾은 아록전통민화연구소는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전통기법을 보존해 그린, 오래된 민화 작품부터 스타벅스 커피잔이 그려진 ‘책가도’까지 시대 변화를 반영한 민화작품들이 다채로운 꽃을 피우는 공간이었다. 또한 선후배 함께 모여, 민화 세계화를 도모하는 사랑방이기도 한 아록전통민화연구소에서 정귀자 민화장을 만났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분야 최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소회를 다시 한 번 말해달 라

이번 상을 추천 받았을 때, 민화부분이 최초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수상에 대한 기대는 있었지만, 다른 좋은 분들이 많아 과연 내가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 수상 결과를 듣고 많이 설랬다. 시상식에 참여해 보니 유명한 분들도 많았다. 이런 자리에서 상을 받게 된 것에 더욱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자들도 시상식장에 많이 와서, 축하해줬다. 제자들의 응원에 분위기가 살고 좋았다. 응원 온 제자들은 내게 민화 배우는 걸 자랑스럽게 느끼는 거 같더라.

▲지난 1월에는 제10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부문에서 민화로는 최초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신문을 보관하고 있다

수상소감에서 '돌아가신 김만희 선생님께 이 상을 바치겠다’라고 했다

내 스승님은 다른 무형문화재들 보다 순수했다. 연세가 많았는데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 스승이 남자일 경우 대게 어려울 수 있는데 김만희 선생님은 내게 꼭 아버지 같았다. 김 선생님은 밖으로 드러나는 활동보단 안에서 작품을 많이 하고, 실력 쌓는 것을 중시했다. 김만희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선생님이 수상하셔야 했을 상황인데, 대신 내가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작년 4월 27일에 돌아가셨는데, 작고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상하게 돼 선생님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또 옆에 선생님께서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선생님은 제자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굉장히 기뻐해 주셨다. 특히 내가 유일한 제자니...

김만희 선생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 되었나

내가 민화를 처음 만난 건, 지금은 호주 퍼스로 이민 간 정수희 선생님의 그림을 접하면서다. 1970년대 후반 광화문 서울사대 동창회관 건물의 민화연구소에서 민화를 배웠다. 정 선생님이 김만희 선생님을 소개해 줬다. 그 후 모임이나 행사 때 마다 김만희 선생님이 나를 꼭 초청해 주셨다. 당시는 민화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귀했기 때문에 더 그러셨을 것이다.

김만희 선생님과 처음 만남을 가진 후, 제자로 직접적인 인연이 시작된 건 1982년부터다. 당시 내 나이는 20대로 젊고 발랄하기도 했고, 젊은이가 민화를 한다고 하니까 김 선생님이 좋게 봐주신 거 같다.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이론적으로 해박한 지식이 많던 선생님이 내게 강의하듯이 많이 가르쳐 줬다. 어떤 전시 건 나를 꼭 참여시켜 주셨다. 그러면서 차차 선생님의 제자로, 민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생님 공방이 청담동이어서 과천에 살던 나는, 서울과 과천을 오가며 민화를 배웠다.

▲정귀자 민화장이 김만희 선생과의 추억을 사진을 보며 회상하는 모습

스승님과의 관계가 남다르게 끈끈했던 거 같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성격적으로 많이 비슷했다. 점점 비슷해진 것 같기도 하다. 특히 꼼꼼한 성격이 비슷하다. 나는 스승님만큼 꼼꼼하지 못하지만, 선생님은 굉장히 섬세하고 완벽주의자셨다. 내 아버지가 많이 꼼꼼하신 편인데 내가 그걸 닮았다. 아버지가 은행 쪽에서 일 했는데 꼼꼼하고 섬세한 부분이 흡사하다. 아주 완벽 꼼꼼! 거기에 익숙해서 그런지 선생님의 꼼꼼한 성격에 전혀 거부반응이 없었다. 참 좋은 스승이었다. 내가 표현을 잘 안하고 무뚝뚝한 편인데 오히려 그런 성격으로 우직하게 밀고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거 같다.

많은 미술 장르가 있는데...민화를 선택하고,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내 전공은 회화가 아니었다. 그림을 좋아했지만 대학은 이과(화학과)로 갔다. 그럼에도 중ㆍ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다. 전공자들은 그림그리기의 연속성이 있지만, 전공자가 아니면 그렇지 못하다. 나는 미술전공을 하진 않았지만 응용 또는 한국화ㆍ서양화ㆍ사군자 장르별로 안 해본 게 없다.

민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TV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82년 방영)에서 민화를 본 직후다. 무대 배경으로 그림이 나왔는데, 민화가 탁 와 닿았다. 어떤 그림은 난해해서 이해하지 못했는데, 민화는 가깝게 와 닿고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친숙하게 다가왔다랄까. 당시만 해도 민화전공자가 없었고, 대학 나온 사람도 거의 없던 시절이다 보니 민화를 하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귀자 민화장의 작업실 아록전통민화연구소 전경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운명처럼 민화를 시작한 것이다. 시작하니 너무 재미있더라. 처음 그림을 배울 땐 모방부터 시작하고, 작가개성은 그 이후에나 들어가지만 민화는 그렇지 않아 흥미로웠다. 민화를 하면서 모이는 사람들도 참 좋았고, 민화를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당시는 손에 꼽을 정도? 한 6명 정도가 민화를 하던 시절이었다. 민화에 대한 관심 은 커녕, ‘그걸 뭐하러해?’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민화를 한다고 하면 언뜻 듣고 만화?? 그렇게 이야기 하던 시절이었다.

그 동안의 전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민화를 시작한 후 1984년 후쿠오카 KBC화랑 그룹전에 처음 참여했다. 그러다 91년도에 ‘한국민화와 추엽산(秋葉山) 모란축제전’(주최: 국제교류협회)이란 제목으로 개인전을 일본에서 열었다. 당시 외삼촌이 ‘일본 거류민단’ 단장이었다. 외삼촌의 친한 지인에게 작은 민화작품을 선물로 줬다. 갤러리 관계자가 그 지인에게 선물로 준 민화작품을 보고 연락이 와 성사된 전시였다. 니카다 모란축제를 기념해 여러 단체에서 전시를 준비하는데 민화를 초대했다. 우리나라 갤러리는 나를 초대한다고 해도, 나중엔 소식이 없을 때도 많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제안이었다.

▲정귀자 민화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날짜가 가까워지자 전시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 전화가 왔다. 작은 공간의 전시로 알고 50여 점을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시청직원이 전부 나와 세팅 해주고, 전시장 작품도 지켜줬다. 전시 후원이 20여 곳이 될 정도로 많아서 놀랐다.

전시 이틀 만에 50여 점 작품이 다 팔렸다. 세월이 지나 돌이켜 생각하니 민화가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어서 일본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이틀 만에 작품이 완판 된 게 아닐까 싶다. 민화는 한국적인 그림으로 다른 나라 사람 눈에도 한국그림으로 각인된 거 같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동양권에선 같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본다. 공감대로 인해 인기 있었던 게 아닐까? 민화가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보니 염원이 깃든 그림으로 의미가 전해졌다.

전시회 성공 이후로 민화를 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때의 성공이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다. 한 때 채색화에 심취한 적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민화를 그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채색화는 석당 우희춘 선생님께 사사했는데 민화와 맞닿는 부분이 많았다. 선생님 세대보단 젊다보니 채색하는 과정을 더 쉽고 요령 있게, 아름답게 표현고자 했다.

전통 민화의 변형과 현대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나

옛 것의 재현은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내가 해야 될 일이다. 전수조교로서 전통 재료를 사용하고 민화의 전통 표현기법을 따라야한다. 내가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전통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전통에만 머무는 것은 안 된다고 본다.

시대가 변하면 시대 변화에 맞춘 민화가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서 민화의 책가도를 보면 기물들은 시대에 따라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옛 썬글라스나 타이핑 기계 등... 민화에 표현된 기물들을 하나씩 변모시킨 것도 민화인 것이고, 실생활의 변화를 반영해도 민화가 된다. 본인 스스로 해석이 많아 민화적 해석이 안 될지라도, 민화는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다. 도안을 새롭게 사용하거나 디자인적 요소를 넣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변화들이 문화상품들로 탄생한다.

▲정귀자 민화장이 민화작업을 하는 모습

작호도의 호랑이 등은 갈라져 있다. 이는 민화의 동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옆과 앞에서 본걸 한꺼번에 표현 한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저런 그림은 없다. 민화=한국적이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요즘 한복에도 책가도가 자수로 표현됐다. 정관장 홍삼ㆍ화장품 용기, 한과에도 민화가 들어간다. 지금 민화 인구가 30만이다. 30~40대의 젊은 작가들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20대는 유학을 가도, 우리 것을 알고 외국에서 사용하고자 배우는 사람도 많다.

앞서 일본 전시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해외에서 우리 민화를 인식하는 정도를 좀 더 설명해 준다면

동양화는 일본이나 중국의 원조가 많고, 서양화는 유럽 쪽이 원조 격이다. 그런데 민화는 한국 그림이다. 내가 다른 나라에 가장 많이 소개 하는 게 ‘까치호랑이’다. 한국의 호랑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문자도와 같이 글자 속에 그림이 들어가는 경우가 아예 없다. 그림이 속에 들어가 있고, 한국에만 존재하는 거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형 마트료시카를 보면 그것이 러시아 것임을 알 듯, 민화를 딱 봤을 때 이 그림은 ‘코리아’다가 인식돼 있는 것이다. 민화 자체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화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민화의 세계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사람이 민화차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상업적인 측면으로만 보는 건 좋지 않지만, 이 길을 걷는 젊은 작가들은 전통화에 기반해, 민화 세계화에 힘써야한다.

젊은 작가들이 전통민화 형식에 많은 변형을 줘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젊은 작가들은 시대에 맞춰 달라질 필요가 있고, 세계화에 맞춰 많이 활동해야 한다. 특히 생활 속 민화와  같이 문화상품에 민화를 넣으면 알리기가 수월할 것이다. 일상생활에 필요로 하는 시계나 스카프에 민화를 넣는 것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책가도 8폭병풍(도판=정귀자 제공)

젊은 작가들이 변형된 것을 해야 한다. 젊은이는 현대에 맞게 재해석 하는 게 맞다. 전통도 중요하지만 확 벗어나 변모해 보는 것도 그들의 역할이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융합된다면 해외에도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민화는 소수만 누리던 양반문화에서 점차 백성들에게도 유행했다.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피카소 그림보다도, 민화가 훨씬 오래된 전통 그림임에 자부심이 있다. 왕실 그림인 일월오악도ㆍ일월오봉도ㆍ책가도 등 로얄패밀리로부터 시작한 옛 그림이 여러 개 있다. 내가 누리지 못한 왕실의 삶이 있는 그림으로 집에 걸며, 건강을 챙기고 악귀를 쫓으면서도 지위가 올라간다는 느낌을 받는달까? 영ㆍ정조시대 초기 땐 책가도로 방 장식을 할 수 없었지만, 점차 유행하며 백성들 방을 장식하게 된다.

민화 대중화를 위한 방법과 방향성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

나름대로는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내게 배운 제자들은 밖에 나가서 강의를 하거나 교육을 함으로써 실력도 늘고, 제자의 제자까지 늘고 있다. 이러한 배움과 후학양성이 민화 저변 확대의 길이라고 본다. 나도 젊은 사람들에게 배우는 게 많다. 젊은 친구들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 민화발전을 위한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해외에 우리 것을 많이 알리는 것도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락도 8폭 병풍(도판=정귀자 제공)

후학들에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부분은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진실해라라고 말한다. 속에 있는 나를 다 드러내라고 주문한다. 작품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림을 그릴 때 순수성을 가지고 하는지, 날림으로 하는지 말이다. 그림 그릴 땐 정성을 다해, 순수성을 잃어선 안 된다. 또 선배들이 못다 한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작품들을 하라고도 조언한다. 민화를 발전시키는 방안이라 여겨 권한다. 기존 방식보단 현대에 맞는 재료를 사용하고 응용해, 민화 발전을 보여주면 좋겠다.

앞으로의 전시와 계획, 바라는 목표가 있다면

민화의 맺은 인연 민연회(民緣會)가 3년만 있으면 30주년을 맞는다. 30주년 때는 전시 규모를 크게 할 계획이다.

요사이가 외국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많이 알려졌다고 멈춰있거나 자만하지 말고, 좋은 흐름을 타고 발전키는 과정에 기여하고 싶다. 나 혼자해서 될 일은 아니고 여럿이 같이 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민화를 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일이다.

옷칠하는 제자도 대만에서 전시를 하고 상금도 받았다. 대만에서 첫 전시인데 이룬 성과다. 대만에서 도자기와 함께 하는 전시도 계획 중에 있다. 제자들 중 회화를 전공했지만 민화에 관심 두는 사람이 느는 것도 좋은 현상이다. 이런 것들은 통해 내 나름대로 민화 세계화와 대중화를 위한 역할을 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