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지옥행 스펙’ 돈 조반니, 헬게이트 앞에 서다
[공연리뷰] ‘지옥행 스펙’ 돈 조반니, 헬게이트 앞에 서다
  • 조두림 기자
  • 승인 2019.10.30 2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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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게 먹느냐 안 보이게 먹느냐 차이일 뿐, 누구나 먹는 ‘그것’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 국내 첫 오페라 지휘 기대
서울시오페라단 정기공연 ‘돈 조반니’, 오는 11월 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회개하라고? 나는 후회하지 않아”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용케도 살았다. 한 사람 원한(怨恨)만 사도 삶이 피곤해질 텐데, 무려 2000여 명이 넘는 여성편력을 자랑하고도 태평하게 살아남은 자 있으니, 시대를 호린 유혹자 ‘돈 조반니’다.

그의 스펙은 ‘부정적으로’ 화려하다. 살인·겁탈·거짓·기만·배신·바람·폭력 등이 그의 행적을 보여준다. 원수를 갚아주러 왔다가도 임기응변에 능한 돈 조반니 앞에서 사람들은 금세 마음이 녹는다. 말발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그의 재력을 나타내는 구두에 박힌 보석은 시시각각 빛을 내며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한다.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젊은 귀족 돈 조반니가 사람들의 선함을 ‘흡선(吸善)’하며 누린 쾌락은 이성에게서 누리는 만족감이다.

“이탈리아 640명, 독일 231명, 프랑스 100명, 터키 91명, 스페인 1003명…”

그의 하인 ‘레포렐로’가 주인과 연분을 맺은 여인들의 명부를 읊는다. 이들에게 돈 조반니는 사랑과 아픔을 모두 가져다준 애증의 대상이다.

“여자는 내게 빵보다도 공기보다도 더 필요한 존재야”
“나는 마음이 관대해서 모든 여자에게 사랑을 줄 수 있어”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돈 조반니는 멈출 생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쯤 되면 바람둥이 대명사를 카사노바가 아닌 돈 조반니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1일 1부도덕’을 저질러야 직성이 풀릴까. 순박한 농부 마제토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시골 처녀 체를리나에게 눈독을 들인 돈 조반니. 약혼자를 버젓이 앞에 두고 체를리나를 유혹하는가 하면, 여의치 않자 하인 레포렐로를 시켜 마제토를 따돌린다.

그리고는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을 마제토에게 보낼 수 없다며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운운한다. 체를리나의 마음을 얻고 나면 홀연히 돌아설 테지만 ‘NOW, HERE’ 지금 여기 이 순간만큼은 “나의 눈에 새겨진 정직함이 보이지 않나요”라고 태연하게 거짓말도 한다.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사실 그는 정직을 논할 군번이 아니다. 어느 늦은 밤, ‘돈나 안나’ 집에 가면을 쓰고 숨어 들어갔다가 발각돼 안나의 아버지 ‘기사장’과의 결투 끝에 살인을 저질렀다. 그 일로 안나는 두려움에 떨고, 그녀의 약혼자 ‘돈 오타비오’는 예비장인의 죽음에 복수를 다짐한다.

한편 ‘돈나 엘비라’에게는 혼인빙자간음을 저지르고 배신했다. 길거리에서 조반니는 엘비라에게 수작을 부리려 다가가지만, 최근에 자신이 차버린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급히 자리를 뜬다. 조반니에게 버림받은 엘비라는 복수를 맹세한다.

결국 여러 사람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돈 조반니는 피신한 묘지에서 기사장의 석상(石像)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기사장 석상 분장이 꽤 위엄 있다.) 유령을 보고 기겁하는 하인 레포렐로와 달리 ‘뻔뻔한 영혼’ 돈 조반니는 자신이 살해한 기사장 석상을 만찬에 초대한다.

초대에 응한 기사장 석상이 등장하면서 극은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인간들의 심판 잣대에서 요리조리 피해 다닌 돈 조반니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기사장 석상은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 하인 레포렐로도 “제발 회개하라”며 애원한다.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헬게이트(Hell Gate) 앞에 선 돈 조반니, 그의 선택은?

모차르트&로렌초 다 폰테 합작…당시 신분제 및 귀족계급 타락 비판

서울시오페라단은 모차르트 생애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돈 조반니>는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와 함께 ‘다 폰테 3부작’이라고 불리는 작품 중 하나로, 당대 명성을 떨친 성직자 출신 이탈리아 대본가 로렌초 다 폰테와 모차르트가 합작했다. 풍자적이고 재치 있는 스토리, 등장인물들의 아름다운 아리아로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제일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Top5에 들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의 장르를 ‘드라마 지오코소’라고 칭했다. 진지한 극을 뜻하는 ‘드라마’와 코믹함을 뜻하는 ‘지오코소’를 통해 두 장르가 섞여있음을 보여준다. 희극적인 상황 이면에 인간 개개인의 각자 다른 본성에 대한 풍자가 담겨있다.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라는 인물을 통해 그 당시 신분제와 귀족계급의 타락을 비판했으며, 그 외의 등장인물들에게 일반인들의 인식을 투영해 당대 인간군상의 심리를 그려냈다. 또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 오페라단은 고전적 이미지를 재현하며 정통 오페라의 매력을 드러낸다. 연출을 맡은 이경재 서울시오페라단장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로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 무대는 최대한 간결하게 구성하고 많은 장면 전환들을 영상과 조명으로 구성해 음악과 드라마 전개의 분위기를 도우려고 노력했다. 또한 고전적 시대복식의 이미지를 가지고 모차르트 오페라의 분위기를 관객 여러분들과 나누기 원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난해부터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마시모 자네티(Massimo Zanetti)가 지휘봉을 잡아 눈길을 끈다. 국내에서 오페라는 첫 지휘하는 마시모 자네티는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프랑스 바스티유오페라, 스페인 리세우극장, 이탈리아 로마나치오날레 등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지휘자로 부상하고 있는 마에스트로다. 프레스콜 당시 열정적인 지휘를 선보인 만큼 어떤 공연을 펼칠지 기대를 모은다.

보이게 먹느냐 안 보이게 먹느냐 차이일 뿐, 누구나 먹는 ‘그것’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탐스러운 ‘선악과’

헬게이트(Hell Gate) 앞에 선 ‘지옥행 스펙’ 돈 조반니. 극의 메시지가 ‘권선징악’이었던 만큼 반전은 없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악행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회개하지 않았고, 지옥불로 떨어졌다.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혹자는 돈 조반니의 최후를 보며 악(惡)은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지탄할 수도 있고, 혹자는 ‘나는 저 정도로 악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욕망의 덫’에 걸려있는 존재다.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탐스러운 ‘선악과’ 앞에서 과감하게 돌아서기보다는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며 그 언저리를 맴도는가 하면, (과장을 보태) 언제든 기회가 되면 ‘악’에 넘어질 준비 태세를 마친 것 같기도 하다.

극 중 인물들만 보더라도, 돈나 엘비라는 돈 조반니에게 배신당하고 복수의 칼을 갈지만, 미련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하고, 악행을 묵인하는가 하면 오히려 옹호하기에 나선다.

체를리나는 평생의 혼인 관계를 약속한 약혼자 마제토를 제쳐두고 “그대 운명을 바꿔주겠다”라며 애정공세를 펼치는 재력 있는 젊은 귀족 돈 조반니의 꼬드김을 뿌리치지 않는다. 체를리나와 돈 조반니 단둘만 남자 체를리나는 “더는 거절할 수 없다”라며 못 이기는 척 넘어간다. 그때 돈나 엘비라가 나타나 돈 조반니의 여성편력을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체를리나는 마제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돈 조반니의 여성명부에 이름을 올린 ‘과거’가 됐을 것이다. 이내 체를리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제토에게 돌아와 대수롭지 않게 군다.

▲ 오페라<돈 조반니> (사진=세종문화회관)

드러난 악행은 돈 조반니의 것이었지만, 드러나지 않은 익명의 욕망과 악행 역시 존재한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극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 안의 내밀한 욕망을 탐색하게 하며, 각자에게 내재한 '돈 조반니'를 움틀 거리게 한다.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마주하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탐스러운 ‘선악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공연 관계자는 “온갖 악한 일을 하고 결국 지옥에 끌려가는 오페라 <돈 조반니>는 초연 당시 관객들에게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건네줬다면, 이번 서울시오페라단의 공연은 동시대 관객에게 권선징악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고 밝혔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는 11월 2일까지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