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노트르담 드 파리’, ‘모돌전’으로 새롭게 태어나다!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노트르담 드 파리’, ‘모돌전’으로 새롭게 태어나다!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9.11.1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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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는 유명합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프랑스 뮤지컬입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시작된 뮤지컬과 다른 매력이 있지요. 이 작품은 빅토르 위고가 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56년)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저와 같은 세대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감독은 장 들라누와,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에스메랄다, 안소니 퀸이 콰지모도를 맡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두 배우에 대한 인상은 매우 강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그런데 콰지모토를 유태평양, 에스메랄다를 박애리가 맡은 작품을 알고 계시나요? 창극 ‘모돌전’입니다. 사성구가 대본을 썼고, 주호정이 연출을 했습니다. 이 작품이 감동적입니다. 안소니 퀸보다 유태평양이 뛰어나고, 지나 롤로브리지다보다 박애리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설마’라고 하셨죠? ‘정말’ 그렇습니다. 이 작품을 당신이 볼 기회가 또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서양의 고전작품을 한국적으로 각색하는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이렇게 당신에게 말을 걸었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전(前) 근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창극이 어떤 소재를 하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잘 만드느냐고 중요하죠. 지금 여기서의 주제와는 좀 거리감이 있지만, 제가 얼마 전 한 포럼에 참석해서 들었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거기서 창극을 주제로 한 자리였습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중에서 ‘우주소리’라는 작품을 얘기하면서, 발표자는 ‘창극도 이제 SF를 다루게 되었다’고 크게 고무적인 발언을 하면서 ‘SF창극’이라고 명명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고 해서, 그 작품의 실제적 성과와 무관하게 인정하는 것을 매우 꺼려합니다.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하는 게’ 중요한 것이겠죠. 작품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소재주의’도 문제이겠지만, 작품을 평하는데 있어서도, ‘소재주의’적인 접근은 평론가나 이론가로서 그리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까요? ‘여성국극’을 아시지요? 1948년 ‘옥중화’(춘향전)를 시작으로 해서, 1949년 ‘햇님과 달님’이라는 작품을 공연해서 말 그대로 공연계의 ‘대박’ 상품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지요. 이로 인해서 1950년대를 ‘여성국극의 시대’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전반기,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히트상품은 ‘여성국극’입니다. 한국영화(방화)는 존재하였지만, 아직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요. 컬러시네마스코프가 대중화되지 못한 ‘흑백영화’의 시대였습니다. 

이 때 ‘여성국극’은 어떠했을까요? 여성국극의 매력은 많지만, 그 중 하나가 ‘화려한 색채감’입니다. 여성국극은 대개 상고설화(上古說話)라는 이름으로 걸고, 우리의 역사에서 특정 시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실을 얘기보다는, 전해지는 얘기를 각색하거나, 작가가 창작을 해서 만든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사는 여성들의 ‘문화적 해방구’가 된 여성국극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성국극은 비슷한 소재가 고갈되고, 여성국극 단체가 난무하면서, 차츰 질적 저하를 가져오게 되지요. 1960년대 들어서 때마침 ‘춘향전’과 같은 컬러영화와 다양한 소재의 영화들이 관객들의 다양한 눈높이를 맞추게 되면서, 여성국극은 점차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럴 때 만들어진 여성국극이 한편 있습니다. ‘흑진주’(1961년)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번안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이 등장을 하자, 어떤 평론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이제 여성국극은 ‘소재가 고갈’되어서 외국작품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평하는 사람이, 저는 참 한심합니다. 여성국극의 맥락, 곧 여성국그의 시초와 변화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평론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여성국극의 작품 중에서, 초기에 크게 인기를 얻은 작품이 ‘햇님과 달님’(김아부 작)이라고 말했지요. 원제목은 이렇지만, 나중엔 그냥 ‘해님달님’으로 통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름이 너무도 강해서, 여성국극단체가 많아지면서, ‘햇님국극단’도 생겨났습니다. 암튼, 이를 통해서 ‘해님달님’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것을 아시겠죠. 

여기서 질문 하나 해봅니다. 여성국극 ‘햇님과 달님’은 어떤 스토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작품일까요? 바로 ‘투란도트’를 가져와서, 한국적 상황과 공연적 현실에 맞게 만든 작품입니다. 잠시 일본의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알다시피 한국의 여성국극과 비교되는 일본공연예술이 ‘다카라즈카’입니다. 다카라즈카의 많은 소재는, 외국작품이나 외국에서 찾고 내서 작품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성국극’을 처음 만든 분들은, 일본의 다카라즈카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의 그것을 모방했다기 보다는, 한국의 현실에 맞게 그와 비견되는 공연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장르가 ‘여성국극’이고, 그런 장르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이 ‘햇님과 달님’입니다. 여성국극의 공연의 계보가 이러할진대, ‘이제 여성국극의 소재가 고갈이 되어서, 외국작품을 가져와서 번안해서 공연을 한다’고 말하는 ‘평(評)도 아닌 평’을 읽으면서, 제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소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서고금의 어디에서 가져오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혹시 지금도 ‘모돌전’이 ‘노틀담 드 파리’라는 작품의 번안이라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낮게 보는 분이 계실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창극이 ‘SF소재’를 다뤘다고 해서 ‘창극의 최전선’ 운운하면서 인정하는 것도 잘못된 시각이고, 창극이나 국극이 ‘외국작품’을 번안했다고 해서 ‘소재의 고갈’ 운운하는 것도 모두 편협한 시각임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창극으로 어떤 것을 하던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걸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평가를 해야 합니다. 내 시각으로 보면 ‘우주소리’는 크게 아쉬운 작품이고, ‘모돌전’은 그걸 잘 한 작품이지요. ‘노트르담 드 파리’를 가져왔지만, 이 땅으로 옮겨서 역사적인 사실성을 그려낸 작품이지요. 

‘판소리극’을 표방한 ‘모돌전’은 진도군 향토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10월 22일 오후 5시, 향토문화회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지역의 어르신이 많이 계셨지만, 이 지역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도 함께 공연을 지켜봤습니다. 이 작품을 소재하는 글을 잠시 옮겨 올까요? 

“고려 무신정권의 암흑기, 벽란도 무량사를 배경으로 광기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들을 통해 무엇이 암흑의 감추어진 주체이고, 무엇이 거짓과 진실이며, 무엇이 진정 아름답고 추한지를 집요하게 파헤침으로써 그 예술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노트드담 드 파리’ 혹은 ‘노틀담의 꼽추’는 어느새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모돌전’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모돌’에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유태평양이 모돌을 맡았습니다. 그의 연기는 영화속의 안소니 퀸 이상으로 진지하고 깊이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오버’하지도 않으면서, 극 중 배역에 몰입을 해서, 우리에게 ‘모돌’의 모습을 잘 전해줄까요? 정말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서 아쉬운 두 분께 모돌을 연기하는 유태평양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은 영화 ‘노틀담의 곱추’에서 주인공으로 분했던 안소니 퀸 (Anthony Quinn, 1915 ~ 2001), 또 한 분은 바로 유태평양의 아버지 고 유준열 선생(1958~2011)이었습니다.  

‘모돌전’은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출은 장마다 특색이 잘 살려내지만, 무대 전환에서 있어서 ‘암전’이 너무 많아서, 극의 흐름이 다소 끊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시대와 장소를 잘 짚어주는 영상이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무엇보다도 대사와 부합하는 ‘노래’가 기억에 아주 많이 남습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주호종, 이 작품의 작창(作唱)을 한승석은 모두 진도출신이었지요. 이렇게 ‘진도의 아들’들이 만든 작품이라서 더욱 그러했을까요? 작품의 후반부에서 많은 어르신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950년대, 여성국극을 보는 관객들도 저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을 받고 힐링을 했을 거란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이렇게 관객들에게 큰 재미와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인데, 예나 이제나 이른바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 맥락을 짚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편협한 시각에 빠져서 ‘그것만이 정답’인 줄 알고 평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란 생각이 듭니다.

국극이나 창극과 같은 ‘국악극’을 다루는 평론을 할 때, 그것을 사후에 이론의 영역을 통해서 의미부여를 하고자 할 때, 제발 “역사적인 맥락을 바로 알고, 보편타당을 전제로 해서 바로 기록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내는 오리지널 대본도 중요하지만, 그간에 있었던 좋은 작품의 소재를 가져와서, 그것을 판소리와 창극 등으로 잘 풀어내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걸 알렸으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작품은 어쩌면 외국에서 공연했을 때 더욱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들이 ‘모돌전’을 본다면, 역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과거 ‘고려시대’가 있었고, 그 때가 ‘무신정권기’인데, 그런 시대가 갖는 태생적 한계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요즘 저의 최대 관심은, 국악극에 관련한 대본입니다. 배삼식(적로), 고선웅(만세대더늠전), 사성구(내이름은 사방지)의 대본은 매우 훌륭합니다. 특히 사성구는 ‘내 이름은 사방지’와 이번 작품 ‘모돌전’을 통해서, 역사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핍박을 받았던 ‘소수자’에 대한 얘기를 담백하면서도 깊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배삼식, 고선웅, 사성구의 작품은 앞으로 계속 공연되길 희망합니다. 때론 연출을 달리하면서,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은 거창하게 말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이란 화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합리한 현실과 유한한 인간의 삶’ 속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행간을 통해서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판소리극 ‘모들전’, 두세번의 공연을 끝날 수 없는 작품입니다. 당신이 ‘노트르담 드 파리’나 ‘노틀담의 곱추’를 알고 있다면, 이제 ‘모돌전’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볼 기회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지역사회의 문예회관이 담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