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한국영화 100주년과 무용가 최승희
[성기숙의 문화읽기] 한국영화 100주년과 무용가 최승희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19.11.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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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조선에 활동 사진극이 없어 항상 유감스럽게 여기던 바, 신파 활동사진을 거액 5천원을 투자해 경성 제일 명승지에서 활영하여 여러분에게 선보일 것이니, 활동사진을 좋아하는 여러분께선 보일 만한 것이올시다. 첫 조선 신파의 활동사진을 보러오세요”

1919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영화 ‘의리적 구토’의 신문광고 내용이다. ‘의리적 구토’는 김도산 감독이 만든 영화로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10월 7일은 1963년 영화인협회에 의해 ‘한국영화의 날’로 명명되었고, 1919년은 한국 영화의 기점으로 통용된다. 세계 최초의 영화는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기차의 도착’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약 10초 분량의 짧은 영상으로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시켰다. ‘기차의 도착’은 플랫폼에 도착하는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영화 ‘기차의 도착’을 접한 사람들은 실제 기차가 도착한 줄 알고 의자 밑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만큼 문화적 충격이 컸던 게다. 그로부터 24년 후, 1919년 ‘활동사진’으로 불린 영화가 한국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알다시피,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의리적 구토’가 상영되었던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옛 단성사는 영화역사관으로 단장해 새로 문을 열었다. 한국영화 100년의 발자취를 반추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전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며칠 전엔 ‘아시아의 칸영화제’, ‘영화제의 다보스포럼’을 표방한 강릉국제영화제가 첫 개막을 알렸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영화 ‘기생충’으로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낭보를 전했다. 한국영화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쾌거이자, 한국영화 100주년의 의미를 자축하는 기쁨을 안겼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영화인들의 수상 소식은 이제 그리 낯설지 않다. 그만큼 한국은 아시아의 영화강국으로 우뚝 섰다.  

전통시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구전(口傳)의 패러다임은 근대 대중매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지형에 놓여졌다. 신문, 잡지를 비롯 영화는 근대 기계문명의 대표적 소산이라할 수 있다. 특히 영화는 1920~30년대 대중문화를 선도했고, 근대 대중스타를 탄생시켰다.

주지하다피, 일명 ‘활동사진’이라 불린 영화는 다량복제가 강점으로 꼽힌다. 또 시공을 초월한 전파력과 장기 지속성은 영화라는 장르가 지닌 더없는 매력이다. 근대인은 활동사진(영화)을 보면서 이국적인 풍경에 경도되었으며, ‘미지의 세계’와의 접속을 통해 사유와 인식의 전환을 촉진했다.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희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가 무용뿐만 아니라 영화배우로서 대중스타의 반열에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36년 최승희는 신흥영화사로부터 주연으로 출연해달라는 러브콜을 받는다. 이전에도 수차례 영화 출연 제의가 있었으나 순수 무용활동에 저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사양해 왔던 터였다. 

최승희는 ‘무용을 위한 영화’라는 영화사의 집요한 설득에 굴복하고 출연을 결심한다. 최승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반도희 무희’는 무용가의 일생을 다룬 작품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촬영되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가로 성장해가는 주인공 백성희의 성공스토리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이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화려한 데뷔무대를 갖는다는 내용으로 상영 당시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고 한다. 영화 ‘반도의 무희’는 4년간 장기 상영기록을 남겼다. 배우로 출연한 무용가 최승희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고 전한다.   

최승희는 1937년 또 한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영화 ‘대금강산보(大金剛山譜)’에서 주인공을 맡는다. 주요 스텝은 일본인이었고 작곡가 홍난파가 음악을 담당하여 화제가 됐다. 영화에서 최승희는 금강산에 있는 석왕사를 비롯 평양, 수원, 부여, 경주 등지로 로케이션을 이어갔다. 강행군 끝에 영화는 3개월 만에 완성된다. 

아쉽게도 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전하지 않는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금강산과 매개된 다양한 설화가 스토리라인을 이루는 가운데 최승희의 춤추는 장면이 삽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속 춤추는 장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다만 최승희가 나오는 영화장면이 포착된 사진이 전할 뿐이다. 

사진에는 부모와 딸의 모습이 등장한다. 전통한복을 입고 두건을 쓴 채 담뱃대를 든 아버지는 가부장적 위엄이 풍긴다. 단아한 치마저고리에 비녀머리를 한 어머니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여기에 반해 한복을 입고 단발머리를 한 딸의 모습은 야무지고 당차다. 바로 최승희의 모습이다. 봉건전통시대의 유습인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는 신여성의 주체의식을 투영한 상징적 장면으로 읽힌다.   

최승희가 영화 ‘대금강산보’에 출연한 것은 전격적이었다. 거기엔 숨은 의도가 있었다. 해외공연 때 영화를 갖고 가려는 목적에서 ‘골드마운틴(gold mountain)’이라는 영문제목을 붙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최승희는 ‘반도의 무희’, ‘대금강산보’ 등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자신의 재능을 한껏 뽐냈다. 보기 드문 서구적 신체 라인과 매혹적인 자태는 근대 대중들의 심미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영화에 출연한 것은, 영화가 지닌 대중적 파급력과 확장성을 염두에 둔 의도된 선택으로 보인다. 그녀가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한 것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의 춤이었다. 댄서로서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영화라는 매체를 빌어 세계무대에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근대 대중스타 반열에 오른 무용가 최승희의 존재론적 의의를 재음미하게 된다. 그녀가 꿈꾸었던 ‘세계적 무희’로서의 야망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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