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민중의 한이 꿈틀대는 유연복의 ‘온몸이 길이다’ 목판화전
[전시리뷰]민중의 한이 꿈틀대는 유연복의 ‘온몸이 길이다’ 목판화전
  • 정영신 기자
  • 승인 2019.11.2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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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에서 내달 31일까지 이어져

우리 민중의 질긴 삶을 화판에 옮겨 담은 류연복작가의 온 몸이 길이다초대전이 1231일 까지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에서 열린다.

동강(고성산성에서)1999, 57X107cm, 단색목판
동강(고성산성에서)1999, 57X107cm, 단색목판

이번전시는 민중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 일상적인 삶에 대한 잠언, 작은 생명에 대한 풍경을 주제로 한 1984년부터 2019년까지의 류연복 목판화 전부를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을 둘러보면 남도가락의 육자배기가 들리는 가운데, 민중의 춤사위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작품곳곳에 아쟁의 울림이 스며드는 듯 애잔한 느낌에 빠져든다.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시나위처럼 펼쳐져 관람자를 역동적으로 이끈다. 빈 들판에 맨발로 땅을 딛고선 농부의 손에 들려진 호미는 그의 삶이 용해되어 황토색으로 피어난다.

판화가 류연복작가 Ⓒ정영신
판화가 류연복작가 Ⓒ정영신

류연복작가의 판화는 암울한 정치적 세월에 저항한 삶의 흔적이며 역사였다. 시대적 현실에 저항하며 비판의 칼을 휘두른 칼춤이다. 실천을 통해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원형(原型)이며 사회 변혁을 향한 경종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국토를 온몸으로 누비며 체득한 풍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 땅을 지키고 살아온 민중의 정신이 담겨 있다. 때로는 서정적인 느낌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다독이기도 하는데, 그의 지리 목판화는 분단풍경인 DMZ를 비롯하여 독도,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무등산, 북한산, 동강 등 우리나라 산하를 방방곡곡 누비며 우리 민중의 뿌리를 칼날로 형상화해 왔다.

나는 온몸이 길이다-봄, 2012, 91X91cm, 다판다색목판
나는 온몸이 길이다-봄, 2012, 91X91cm, 다판다색목판

그의 목판화에는 원초적이고 민초적인 울퉁불퉁한 힘이 서려있다. 한 획으로 수묵의 농담을 표현하듯 단칼의 칼질로 새겨진 뚜렷한 골짜기로 응어리진 한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박금리 시인은 판화가 류연복을 칼질로 밤새우는 백정으로 은유했다. “천하의 잘난 놈들 / 다 잡아주는 사람 / 나까지 잡을 사람 / 이런 무서운 백정을 / 난생 처음 보았다고 썼다.

꽃 한송이 2018, 97X72cm, 소멸다색목판
꽃 한송이 2018, 97X72cm, 소멸다색목판

판화가를 백정으로 표현한 시인처럼 칼을 잡았으니 칼잡이가 틀림없고, 평생 나무에 칼질을 하였으니 나무 백정임에 틀림없다. 그는 작품설명을 하면서 불연기연과 인연이 깊다고 했다. 우연과 필연, 불연과 기연사이의 틈새로 세상을 아우르는 그의 작품세계는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대장정이었다. 그러한 시대상황은 80년대는 그에게 걸개그림을 그리게 했다. 한시대의 정신을 형상화하려면 그 어떤 삶도 무관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했다.

붓을 들어 육천만 가슴에, 1989,30X30cm,채색목판
붓을 들어 육천만 가슴에, 1989,30X30cm,채색목판

그는 자연을 읽으면서도 그 자연에 몸 담아온 사람부터 생각했다. 흙에서는 생명을, 생명에서는 소외계층을 떠 올린다, 시대적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는 칼질의 언어가 생기적인 사건으로 말 걸어온다. 이는 남에게 들려주며 자기 소리를 듣는 진정한 나팔수처럼 사유의 운동을 통해 생성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외암골 전도, 2002, 120X84cm, 다판다색
외암골 전도, 2002, 120X84cm, 다판다색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서문에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친 대상이나 현상들, 그 낮은 곳에서 일렁이는 생각과 마음의 편린들, 그러면서도 거대한 시국과 사건에서의 상처들을 자분자분 낮은 언어로 얘기한다. 마치 80년대 문화 투사로서 그가 일정 부분 유보했던 삶의 지혜에 대한 잠언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손색이 없다. 이는 노자나 장자가 판화 이미지 밖으로 걸어 나오듯 소탈하고도 깊은 사유들이 쉬운 시각언어로 번역되었다고 썼다.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1,1989,37X37cm,채색목판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1,1989,37X37cm,채색목판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정분(精分)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람과 자연을 귀히 여기는 작가의 마음이 그림 속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황소가 엄마처럼 보이고, 구불구불 이어진 동강전도에서는 산과 계곡을 흐르는 물길이 사람과 사람의 정을 잇는 역동성으로 보여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 달을 블루로 표현한 가난한 사랑노래는 가난한 달동네도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랑 노래,1998, 37X27cm, 채색목판
가난한 사랑 노래,1998, 37X27cm, 채색목판

해방 춤에서 보여주는 여인의 힘찬 몸짓은 가락을 불러내듯 역동적이다. ‘온 몸이 길이다의 사계를 보면 우리인체의 세포를 보는 것 같다. 세포 하나하나가 길을 만들어 사람을 만나게 하며, 삼라만상을 경험하는 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 속에 많은 이야기를 새겨 넣은 이 작품은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이로움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면 사람도, 자연도, 풍경도, 강산도 모두 함께 만나 하나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해방춤1,1986, 45,5X53cm,채색판화
해방춤1,1986, 45,5X53cm,채색판화

미학자이자 한예종영상원장인 심광현교수는 류연복이 찍어낸 지도들은 대상화된 풍경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자신의 체취가 육화된 장소다. 눈으로 재단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육체와 마음이 함께 교감하는 장소다. 손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발로 몸으로 살아낸 지도라고 진경판화에 의미를 부여했다.

동강전도, 1999, 180X110cm, 다판다색목판
동강전도, 1999, 180X110cm, 다판다색목판

판화는 한 땀, 한 땀 수놓듯, 조각칼로 수없이 반복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노동에 가깝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나무 한그루가 자기 안으로 들어와 그 나무에 그림을 그리고 각을 뜨고 찍어냈을 뿐이라며 목판 작업을 하는 순간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구상하는 것도 재미있고, 완성된 판화를 확인하는 순간도 짜릿하지만, 정신없이 칼질을 하다보면 자기는 물론 세상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심연의 끝까지 들어가 작품의 뒷모습까지 들여다 볼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그는 나무를 희생시켜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킨다. 그리고 그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면 삼라만상의 자연이, 아니 민중의 모습이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갈라치며 나아가자,1989,28X49cm, 채색판화
갈라치며 나아가자,1989,28X49cm, 채색판화

내달 31일까지 열리는 류연복의 온몸이 길이다목판화전은 작가의 35년 판화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오는 22(금요일) 오후 3시에는 전시장에서 작가와의 대화도 있다.

전시문의 043-539-3607. http://jincheon.go.kr

전시장에서 작품설명을 하고 있는 류연복작가 Ⓒ정영신
전시장에서 작품설명을 하고 있는 류연복작가 Ⓒ정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