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최은주 대구미술관장 "대구미술관, ‘한국근대미술의 중요한 도시·한국현대미술관 중추적 역할’ 정체성 만들 것"
[Culture Interview]최은주 대구미술관장 "대구미술관, ‘한국근대미술의 중요한 도시·한국현대미술관 중추적 역할’ 정체성 만들 것"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김지현 기자
  • 승인 2019.11.2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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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ch Me If You Can’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대구미술관 최은주 관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루쉰(魯迅, 1881~1936) 소설 『고향』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최 관장은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미술 행정가로 한 길을 걸어왔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이론과 미술교육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몸담으며 학예연구실장ㆍ보존관리실장ㆍ덕수궁미술관장ㆍ서울관 운영부장 등을 지냈다. 20여년 몸 담았던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나 경기도미술관장으로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길을 걷는데 타협하지 않았다. 남다른 발상과 문제의식으로 미술계에 다채로운 색을 입혀왔다.

▲대구미술관 최은주 관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기자가 최 관장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경기도미술관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관장이 기획한 한민족 이산의 아픈 역사를 조명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 특별기획전이었다. 전시는 시대정신을 조명하며 반짝였다.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 관장은 러시아 사할린과 중앙아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외한인 동포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를 위해 학예사와 함께 지역예술가를 잘 아는 국내 최고 전문가들을 현지에 파견했다. 수없는 발품을 판 결과, 곳곳에서 숨겨진 보석 같은 작가들이 발굴됐다. 이후 최 관장은 그들을 모두 국내로 초청해 분단과 이산의 현장을 함께 돌아보며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주는 웍샵을 꾸렸다.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은 물론 거시적인 안목과 미시적인 디테일을 갖춘 기획자이자 운영자로 각인됐다.

지난 4월 대구미술관장에 부임한 최 관장은 취임사를 통해 “대구미술관이 일류 미술관으로 거듭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것”이라는 각오를 밝혔다. 특히 최 관장이 신설한 ‘전시회의’는 주시할 만하다. 대구미술관 학예직들 기획 역량을 키워, 기초가 강한 대구미술관을 만든다는 의도다. 이런 면모가 최 관장의 전문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구미술관 비전을 발표했다. 특히 ‘전시기획 시스템’ 구축을 강조했는데.

대구미술관에 와 보니 전시기획 부분에 헐렁한 부분이 많았다. 즉흥적인 전시 결정으로 전시가 결정돼, 준비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대구미술관에 맞는 전시로만 진행해온 것이다. 소장품도 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주지만, 전시는 시대 흐름에 따라 미술관의 역사를 말해주는 아이템이다. 기존 형식은 안 될 것 같아 ‘전시회의’를 만들었다. 나와 학예실장과 학예직 전원이 참여하는 회의체다. 지난달에 한 번 시도했다. 그러나 회의에 익숙하지 않아 어설프지만, 회의를 통해 학예직들 스스로 기획하고, 하고 싶은 전시를 발의를 할 수 있게 했다. 개방적으로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연속 회의를 만들었고, 거기서 나온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회의를 만들었다. 회의가 거듭되다 보면, 아무개가 제안한 전시가 성숙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성숙한 전시를 선정하거나 기획안이 좋으면 바로 채택하는 방법을 찾을 계획이다. ‘전시회의’를 만든 이유가 전시를 중장기적 안목에서 세팅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는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전시로 깊은 연구 없이 3~6개월 만에 만들어 내는 전시들이다.

‘전시회의’를 통해 이미 2021년부터 23년까지 전시기획의 구체적인 전망을 하고 있어, 벌써 맡겠다는 학예사가 포진돼 있다. 연구해야만 하지만, 연구 예산이 따로 있진 않다. 인턴십 예산도 없지만, 전시예산 속에 녹여 해외전시는 해외에 체류하며 연구 할 수 있게 하고, 국내전시라도 필요하면 출장 가서 연구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시작은 했고 내부 구성원들의 반응은 좋다. 이 시스템을 내가 처음 시도한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을 때 학예사 수는 많고, 경쟁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이런 시스템을 가동했었다. 그 경험에서 국현보다 작은 규모 미술관인 대구미술관에서 더 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소장품을 활용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돼야 할 것 으로 본다.

당연하다. 시스템 구축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대구미술관 구성원들이 경험하지 못한 소장품 연구를 할 예정이다. 소장품 연구 축적이 전무하고, 수집만 했을 뿐이더라. 미술관은 현재 1,300점이 조금 넘는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다. 내년 초 첫 전시가 ‘소장품 100선’전이다. 연말까지 명품작품만을 선별할 예정이며, 선집까지 만들 계획이다. 그 선집에는 학예사들의 실명을 공개하고 연구 텍스트들을 다 넣을 예정이다. 따라서 학예사들의 성과나 연구 실적이 된다. 여태껏 소장품 관련한 서적이 나온 적은 없었다. 연구집을 국ㆍ영문으로 만들어 출장 갈 때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할 예정이다. 학예사 자신도 자기 글을 소개도 하고, 자부심도 느끼게 하도록 준비 중이다.

관장은 임기제라 언젠간 떠난다. 그러나 미술관이 건재하기 위해선 전문직들을 육성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외향적으로 화려한 육성이 아니라 소장품을 잘 알고 소장품에서 비롯된 연구 역량을 갖추는 것이 기획력까지 연결되게 하고 싶다.

이번에 유럽을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어떤 협의와 전시계획을 세웠나.

MOU를 맺은 상태가 아니어서, 공식적으로 아직 발표하기는 이른 감이 있다. 대강 큰 윤곽을말하자면, 내가 대구미술관에 와 보니까 전시기 능으로만 모든 기능과 역할이 모여 있었다. 미술관의 주요 기능을 보면 교육ㆍ소장품 연구 기능도 있고, 출판기능 등 여러 기능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기획전 위주 프로그램으로 짜였더라.

내년 가정의 달 5월에는 교육형 전시를 꾸밀 예정이다. 유럽의 거장 중 교육 전시를 크게 한 분이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유리창을 색채로 입힌 다니엘 뷔렌(Daniel Buren,1938~)이 있다. 그 작가가 스트라스부르 현대미술관(Strasbourg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에서 색채로 ‘어린아이의 놀이처럼(Like child’s play)’이란 전시구성을 했다.

참 대단한 작품이다. 그 작가가 색채의 마술사니까 색채로 큰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 구조물 한쪽 편에 홀을 통해 보면, 저쪽 세계까지 보이고 형태가 있어 아이들이 들어가 놀고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지난번에 다니엘 뷔렌 선생이 한국에 와있었는데, 동아일보 외관 설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프랑스에 가서 만나 대구미술관 전시를 제안하니, 이전 전시도 성공적으로 했고, 작품 관리도 잘 되어있었기에 기꺼이 하겠다는 승낙을 얻었다. 교육체험프로그램과 연계한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미술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협상이었다. 미술관 내 천장이 18M 정도나 되는 ‘어미홀’이란 좋은 공간에, 내년 5월 꽃필 때 ‘어린아이의 놀이처럼’을 설치할 것이다. 내가 대구미술관장으로 오자마자 교육팀을 만들었는데, 이 전시를 교육팀에 투입된 학예사와 에듀케이터가 협업해 전시의 목적을 다각도로 충족시킬 것이다.

▲대구미술관 내 시설 ‘어미홀’ 전경(사진=대구미술관)

내후년은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이다. 미술관 개관일은 5월 26일인데 세계 최고 수준의 유럽에 있는 파운데이션 컬렉션전을 준비 중이다. 그 파운데이션 관계자들을 다 만났고, 내 아이디어를 전달했다. 한국에는 어떤 파운데이션의 작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데서 끝나는데, 대구미술관 은 그런 것을 원치 않고 유럽 쪽 파운데이션 컬렉션과 대구미술관 컬렉션이 만나서 대화하는 방식의 전시를 만들고자 했고, 기꺼이 동의해 줬다. 작가나 소장품이나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과 작업이 같이 만나야만 동등해진다고 생각한다. 한 번의 계기가 ‘대구’라는 지역적 한계에 갇힌 미술관과 작품들의 수준을 직접 올려줄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 20세기 후반’과 21세기를 보면 여전히 ‘모더니티(Modernity)’에 대한 토론들이 계속 일어난다. ‘모더니티의 문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대들 파운데이션과 대구미술관 소장품을 매칭시켜 작품들끼리 대화하며 질문을 나누자는 주제를 설정했다. 유럽 쪽에선 주제가 참신해 기꺼이 하겠다고 해서, 구두로 동의를 얻고 왔다. 내년부턴 MOU도 맺고 각 기관 소장품은 공동 연구조사에 들어가, 2년 후에 전시를 선보일 계획이다.

대구 출신 작가의 경쟁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보나.

상당하다. 6개월 지냈는데 작가의 범주나 작가의 수준면에서 사실 다른 지자체보다 월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는 근대기부터 시작된 미술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으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열망과 자존이 있는 도시다. 통계적으로 봐도 전국 지자체 중에 미술대학이 제일 많다. 학생 배출수도 가장 많다. 따라서 미술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가 일어나는 장소라는 것은 분명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대구에 있는 화랑 수가 60개 정도로, 항상 그 수준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 역시 서울을 뺀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화랑들이 존속할 수 있게 작품 유통이 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화랑유통을 위해선 작가들이 발굴돼야 하는데, 신진작가부터 중견작가, 원로작가까지 각 화랑의 특성에 따라 움직이는 인력풀이 갖춰져 있다 들었고, 확인했다.

다른 도시와 비교해보면 서예나 수묵화 부분도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이 맹렬하다. 고전적인 서예 작업을 하는 작가부터 현대 서예로 전환해서 하는 작가들까지 활발하게 활동한다. 각자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 자체로 돌아가는 힘이 대구에 있다. 물론 이것은 예술 분야의 한 영역만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지만, 대표적 분야라 여기는 회화, 조각 분야 심지어 미디어 분야까지 각각의 영역까지 무너지지 않고 잘 유지되는 도시가 대구다. 그런 면에서 미술 영역이 상당히 월등하다 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사와 관장(덕수궁미술관), 경기도미술관장을 거쳐 현재 자리에 왔다.

대구미술관의 소장품도 프랑스에서 전시를 하나.

유럽에서 오는 것만 결정된 상태다.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대구미술관 개관 특별전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학예사들끼리 공동으로 정보를 교환하며 각각의 소장품을 크로스 연구를 통해, 교류의 계기와 출판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고 서로 축하하자는 의미다. 특히 우리가 교류하게 될 파운데이션은 내가 아주 오랜 시간 관심이 있던 곳이다. 내가 경기도미술관에 있을 때 ‘프랑스 벽화전-그림이 된 벽(2018)’전을 하며, 프랑스 쪽과 네트워크를 만들었더니 대구미술관에 와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여러 프로젝트를 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프랑스에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도 많더라.(웃음) 그래서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작업에 들어갈 차례다.    

▲대구미술관 최은주 관장의 기자간담회 참여 모습(사진=대구미술관)

지난번 라크마(LA미술관) 한국 담당 큐레이터인 버지니아 문이 대구미술관 강의에서 ‘미술관대 미술관의 교류가 한국은 많이 어렵다’라고 하더라.

나는 그 부분에 있어 적극적으로 개척해온 편이다. 덕수궁미술관을 떠나기 직전에 해온 것도 있고, 작년 경기도미술관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전시《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도 대만 가오슝미술관과 뮤지엄 대 뮤지엄 전시다. 앞으로 그런 전시를 많이 계획하고 있다.

학예사와 관장직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두 역할의 차이점은 많다. 학예사로 일할 때는 전시에 관한 소장품 수집에 직접 내 손이 닿는 경우가 많다. 그게 실무 기획자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이다. 자기 손으로 실현하는 즐거움이 크다. 그러나 관장직은 그런 일에서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관장 경험이 적다고 할 순 없다. 덕수궁관장은 10여 년을 했고, 경기도미술관은 만 4년, 대구미술관에서 6개월 차인데, 내가 덕수궁미술관장을 하면서 느낀 건, 관장의 역할은 그 자신이 컨트롤해야 하는 조직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A라는 관장이 ‘이건 내 전시니까 이건 꼭 내가 해야 해’ 이런 건 우습지 않나? B라는 관장이 ‘이건 내 개념에서 시작된 전시니까 내 말대로 하세요’ 이것도 좋지 못하다. 미술관을 구성하는 전문직종들은 학예사 뿐 아니라 전문직들의 직능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균형감각만 있으면 미술관 전문직으로선 굉장히 재미없다. 자기 색채가 들어간다거나 취향이 들어간다거나 그런 걸을 놓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균형감각은 물론이고, 자신이 이끌어가는 미술관이 지향하는 목표설정이나 비전에서 자신의 전문적 영역이 잘 드러날 수 있게 조화를 맞춰줘야 한다.

내 경우는 30년 이상 한국근현대미술을 다뤄왔고, 더 나아가 아시아 영역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미술관 식구들과 이야기하며 대구미술관 하면 ‘한국근대미술의 중요한 도시’라는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는 한국현대미술관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미술관으로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다.

전시기획에서 학예사에게 가장 중요한 점을 꼽는다면.

그 부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독창성과 창의성이다. 남들이 안 한 것. 내가 잘하는 말 중에 ‘Catch Me If You Can‘이란 말을 많이 한다. 남들이 해놓은 거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재미없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있으면 인터넷을 검색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유사한 전시가 어디 있었느냐를 찾아 이야기해 준다. 그 전시는 아무개가 어디서 어떻게 했는데 우리가 그걸 복습해서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말이다. 그런데 창의성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라 아무개 A,B,C가 어떤 전시를 보여줬더라도 D라는 창의적인 기획자는 그것들의 전환이나 결합, 혹은 이종배합 등으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 있다. 학예사들은 진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게걸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정보 수집능력이 있어야 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고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짚어낼 수 있는 감각도 있어야 한다. 그 단계까지 대구미술관 학예사들을 성장시키면 내 역할이 어느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전시 개막식에서 전시 주제에 대해 설명 하고 있는 최은주 관장(사진=대구미술관)

시간이많이 흐르긴 했지만 2013년 서울관 개관 당시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Zeitgeist -Korea)’전과  관련해 특정 학맥 편중이라 해서 크게 문제가 됐었다. 그 모든 일의 원인은 '최은주'라는 질타와 비난을 받았었는데, 나름의 할 말도 있을 듯 하다.

나는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싶다. 개관 당시 내 기억으로 전시가 7개였다. 서울관에서만 7개고 과천관에도 2개가 있어 거의 10개의 전시기획이 벌어졌는데, 나의 그 당시 분야에서의 미션은 그 전시를 전부 무사히 여는 것이었다. 학예실장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가 된 ‘시대정신’展은  외부 기획자에게 의뢰를 한 전시다. 외부 기획자는 역량 있는 분을 모시고 있어, 기획자에게 학예직 한명과 함께 하며 전시장에도 들어가거나 터치하지 않았다. 외부기획자에게 불편을 줄 것 같아서다.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했다. 당시 외부기획자가 소장품을 활용해, ‘시대정신’이란 주제를 하겠다 제안했고 그대로 진행한 것이다. 나는 당시 ‘연결_ 전개’展 과 과천관에 인도와 중국의 풍경을 보여주는 ‘중국 인도 현대미술전: 풍경의 귀환’전 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예실장이라는 보직이 가지고 있는 중대성 때문에 비난의 화살이 내게 많이 왔다.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개관전시들이 주는 상징성이 있는데 그때의 소장품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 외부기획자가 아닌 내부 기획자가 했다면 조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있다. 당시에 전시 규모 전시에 수반되는, 여러 부수적 상황들 예를 들어 전 세계에서 초청하는(초청인원만 100명이 넘었다) 인원관리 문제와 제정적인 문제를 내가 감독해야 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세월이 지나 이야기 하는 거다.

이인성 미술상을 대구미술관에서 관장한다. ‘이인성 미술상’의 성과를 찾는다면.

대구미술관에 와서 하나씩 그 상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대구가 설정한대표적인 시상제도인데, 내년이 만 20년이 되는해다. 내년에는 20년 동안 배출된 작가들을 총정리하는 전시도 기획 중이다. 상의 의미를 찾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밝히기 위해서다. 20년간의 성과에 관한 총괄적 평은 이 상이 회화 부분에서 굉장히 괄목할만한 성과를 작가들을 선정해, 그 작가들이 또 다른 발전단계에 접어드는 데 기여해 왔다는 점이다. 대구미술관은 큰 용적을 가진 미술관이기에, 많은 작가가 상을 통해 대규모 개인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들은 50-60대를 어떻게 지나느냐에 따라 말년의 성숙한 예술세계를 이루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전시며 제도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그때 건강한 자극을 주는 게 중요한데 이 상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상금도 국내에서 제일 큰 5천만 원이다. 국현은 올해의 작가 후보작가가 되면 제작비를 4천만 원 씩준다. 그 상금보다 많이 준다. 공적조직에서 주는 제일 큰 상금인 셈이다. 그동안 19번 수상자들을 배출했고, 이번에 20번째 작가 선정이다.

▲이인성 미술상(포스터=대구미술관)

쿠사마 야요이, 쟝 샤오강展 등 아시아의 대표 작가 전시를 대구미술관이 아시아 허브 역할을 하면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안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의 기대치가 더 높아졌을 것 같다.

대구미술관이 국내 공립미술관 중 후발 주자다. 2011년에 개관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초기 전략으로 굉장히 유효했다고 본다. 아시아의 대표 작가들을 대구미술관에서 보여줬기 때문에, 그 부분이 미술관을 알리는 홍보 전략으로 유효했다. 쿠사마야요이전도 대구미술관 전시로 인해 굉장히 성장했다. 상하이 전시도 봤었는데, 대구미술관에서 만들어진 전시가 상하이로 간 포맷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쿠사마야요이의 가치가 많이 올라갔다. 한편으론 대구시민들과 문화 분야 관계자분들의 요청은 아시아는 충분히 본 것 같으니 다른 세계를 보여 달라 요청해 와서, 이번 출장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구분들은 문화 수준이 높고 관심도 많다.

대구미술관에서 기획한 3.1운동을 기념한 전시가 인도 순회전을 했는데, 앞으로 계획된 순회전은 있나?

대구미술관에서 ‘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이란 제목의 3.1운동을 기념한 전시가 있었는데 인도 국립미술관에서 연락이 와서 갔었다. 인도 순회전 당시 반응이 매우 좋았다. 고답적인 전시가 아닌 3.1운동을 보는 현대작가들의 시선을 집어넣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우성’ 같은 청년작가나 미디어 작품까지 들어가니까 한국 현대미술의 수준을 알리는 동시에 3.1운동의 의미까지도 보여준 것이다. 또한 3.1운동이 인도에 미친 영향까지 파생시킬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반응이 좋았다. 내년 초 전시로 ‘단디 야트라’라고 간디의 소금 행진에 관한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다. ‘소금행진’이란 우리나라로 치면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한 것이다.

간디가 무저항 운동을 하면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는데 소금행렬을 한 거다. 그 아카이브가 잘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인도 뉴델리에 있는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품을 보내기로 했다. 전시를 통해 인도도 알고, 인도 성인반열에 든 간디의 정신도 알리는 것이다. 또한 3.1운동 간의 연계성을 알릴 계획이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자신만의 우물을 가져라’ 퍼내어도 퍼내어도 끊임없이 퍼 올릴 수 있는 우물을 가져야 한다. 전시기획을 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는 주제를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추종ㆍ모방만으론 제대로 된 기획자로 평가받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관심 있는 영역에 대해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고 공부해야 한다. 신지식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해야 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주제를 창출ㆍ기획해야 한다.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창의성이다. 이것이 발휘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 지치지 않고 맑은 물을 퍼올릴 수 있도록 갈고 닦아라. 현실적인 벽에서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있더라도 최고 권위의 지식체계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한눈팔지 마라. 다변화되는 사회 속에서 노력을 경주해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