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의 여신, 자유의 물결을 연주하다!
해금의 여신, 자유의 물결을 연주하다!
  • 양문석 기자
  • 승인 2009.11.10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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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우연히 접하게 된 해금, 국악계의 블루오션을 개척하다

국악은 대한민국에서 만큼은 여전히 생소(?)한 장르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도 해금이란 악기는 더더욱 낯설기만하다. 그런 불모지대에 한 줄기 단비를 내리는 이가 있다. 해금의 디바, 준비된 마에스트로 강은일. 고교시절 뜻하지 않게 잡은 해금으로 국악계의 블루오션을 개척한 여전사.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정신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 온 우리시대의 진정한 ‘대가’. 몇해 전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굳은살 투성이의 발이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듯이 겉으로만 드러나는 아름다운 외향에 심취돼 왔던 일반인들에게 정상에 오른다는 것, 대가가 된다는 일이 얼마나 멀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인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그녀의 굳은살 더깨로 박힌 손으로부터 세상은 울고 또 웃는다. 두 줄의 하얀 명주실 사이에서 끊임없는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을 토해내는 몸부림. 해금의 예비 마에스트로 강은일은 오늘도 새로운 지문(指紋)을 만들어 간다


‘해금의 디바’란 애칭에 대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궁금합니다
팬들과 주변분들께서 디바란 애칭으로 불러 주시는 건 개인적으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부담스러울 때가 있지만 더욱 채찍질하란 뜻으로 생각합니다. 마에스트로강이란 애칭을 얻을 때까지 거듭나야하지 않을까요?(웃음)

▲소녀처럼 앳된 미소가 매력적인 해금의 디바 강은일
해금이란 악기가 일반적으로 주목받는 악기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영향으로 최근 해금에 대한 인지도도 함께 상승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누군가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주목받을 수 있는것 같습니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김연아 씨의 경우처럼 비인기 종목이었던 피겨스케이팅이 김연아 씨 한분으로 인해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습니까?

이런 점은 음악 분야라고해서 다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 보다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힘이야말로 어떤 장르냐 악기냐에 상관없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도 참여하셨는데 당시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기 한시간 전쯤 시어머님도 돌아가셨어요. 문득 두분이 동료 삼아 같이 가시는거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슬픔이 배가 되더군요. 봉하에서 아는 동료가 굿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죠.

공연 때문에 중국으로 가고 있는 중에 때마침 장례위원회에서 연락이 와 귀국 후 기꺼이 참여하게 된거죠. 비록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부담도 없진 않았지만 한나라의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서글펐고, 가시는 길에 작지만 살풀이라도 해서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동안 클래식, 재즈, 프리뮤직, 국악 등 여러 장르와 접목을 시도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악기에 비해 해금만이 가진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른 악기와 궁합이 잘 맞는거 같애요. 해금 자체가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조화가 잘된다고 봅니다. 서양악기와 협연시 조옮김이 쉽다는 것도 장점이구요. 해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특히 클래식 기타랑 편안하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챔발로랑도 잘 어울리구요. 아무래도 바로크 음악의 악기랑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해금을 깡깡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특유의 비음은 물론 하얀 명주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 서양 현악기는 활대로 줄을 누르는 반면 늘 두 줄 사이에 활대가 끼어 있는 해금을 볼때면 왠지 모르게 자유를 꿈꾸게 되더군요.

그런 자유를 꿈꾸는 순간이야말로 열정적으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웃음) 한 네티즌께서 해금에 대해 두 줄 중 하나는 웃음줄(유현), 나머지 한줄을 울음줄(중현)이라 표현해 주신 것이 문득 기억나네요. 특히 중현은 우리나라 현악기 줄 가운데 가장 많이 울어주는 소리를 내는 줄이기도 한데, 얼마나 멋진 표현이던지...
▲해금을 굳게 움켜 쥔 모습이 흡사 잔다르크를 연상시킨다

판소리나 기타 국악에도 능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악을 하게 된 동기가 있으시다면?

음악은 원래 아버님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바이올린을 했습니다. 사실 꿈은 연극 연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실제로 연극을 하기도 했었구요. 친했던 연극반 언니가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어느날 선배 언니를 따라 남산 국악고등학교에 놀러 갔는데 국악기들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양악 깡깡이나 국악 깡깡이나 어차피 음악의 길을 걷게 된다면 신비한 느낌의 국악을 선택해야겠다 싶었죠.

우리 나라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금, 해금을 처음 봤습니다. 소리를 듣고 난 후에는 더더욱 매력에 빠져들었죠. 그동안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것을 느꼈으니까요. 너무 멋있었다고 해야할까요? 어떻게 이런 음악이 있을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실은 예고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물론 가족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남산 자락의 호젓함과 신비함이 느껴질 정도로 국립국악고등학교에 대한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는지 부모님께 시험만 일단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겨우 시험을 볼 수 있었답니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바람소리며 학교 기둥 사이에서 새나오는 음악소리가 얼마나 멋지던지요. 혹시 떨어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교감선생님 다리 붙잡고 저를 꼭 붙여달라며 애원까지 했습니다.(웃음)

정말 가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것 같애요. 합격한 후에야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를 구경시켜드리면서 겨우 설득했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합격 사실조차 전혀 모르셨거든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국악을 해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 제게 어머니께서 감수성을 키우고 우리것을 알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국립극장도 가까이 있었기에 자주 공연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키워 왔답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어요. 오로지 음악만이 위안이 됐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더 집착하고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았나란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님께서 제게 음악을 가르치셨던 이유가 악기 하나만 제대로 다룰 줄 알면 먹고 사는데 문제 없을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하더군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웃음)
▲강은일의 손은 굳은살 투성이다. 그가 아름다운 이유...

루치아노 파바로티, 바비 맥퍼린, 조수미, NHK 쳄버 오케스트라, KBS 국악관현악 등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 및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가 있으시다면?

바비멕퍼린의 내한공연을 함께 했는데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가 음악을 너무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연주도 연주지만 한번은 디즈니 홀에 갔는데 공연장 자체에 뿜어져 나오는 음악도 있더군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공연장이 꼭 하나 있었으면 부러울게 없더라구요. 얼마전 모 국회의원을 만난 자리가 있었는데 이 말을 미처 못했네요.(웃음)

제대로 된 국악 전용홀 하나 없다는 사실은 문화 선진국을 지향하는 국가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큰 아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남산 국악당이 있긴 하지만 음향 부분 등 개선해야 될 점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좋긴한데 미국의 디즈니홀 등에 비하면 너무 아쉬운 점이 많더군요.

디즈니 홀이 원래 클래식 홀임에도 불구하고 국악 연주도 너무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매료된 기억이 납니다. 마이크를 안쓰다시피했는데도 음향이나 다른 모든 부분에서 훌륭한 소리를 만들어 주더군요. 꼭 한번 음악을 들어 볼 만한 장소라고 봅니다.

파이프오르간, 사물놀이, 대중음악 등 해금으로 이질적인 소리내기를 통해 악기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이외에도 독창적인 연주 기법이 있으시다면?

처음에 해금을 가지고 세상에 나와 무엇인가를 하긴해야하는데 아무도 해금을 모르더군요.당시만해도 해금이란 악기는 정악이나 산조의 깍두기 역할을 맡곤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악기로 몰 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본격적으로 악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죠.

해금의 장점을 찾기 위해 다른 악기와 비교도 해보고 이런저런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해금보다 소외받는 악기도 볼 수 있었고, 그런 악기를 감싸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더군요. 반면에 소리가 크거나 왠지 해금보다 돋보이는 악기를 만날때면 지지안으려고 싸우기도 했구요. 악기 사이에도 치열한 경쟁이 있답니다.(웃음)

실은 인기종목(?)이었던 가야금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가야금을 하려면 공부를 매우 잘해야했었습니다. 성적뿐만 아니라 재력과 미모 등 갖춰야 할 것이 많았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무용을 시작하기엔 이미 늦을 때였구요. 대금은 체격이 좋아야했답니다. 결국은 제가 해보려 했던 분야가 다 안됐죠. 보기 안타까우셨는지 선생님께서 해금이라도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정말 서러웠죠. 아시다시피 해금이란 악기가 모양도 썩 이쁜 편도 아니었고 주목받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요. 선택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왠지 보잘것 없게만 느껴졌고, ‘저것도 악기냐’ 내심 그랬었는데(웃음)

그 악기를 지금껏 하게 됬네요.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번 해보자라는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늘 같이 지내고 아끼고 하다보니 해금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것 같아요.(웃음)
▲미소와 열정은 그의 영원한 동반자

모 매체와의 인터뷰 중에 ‘해금은 21세기에 가장 가능성이 많고 할 일도 많은 악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금이 다른 악기와 잘 어울리는 큰 이유가 있다면...

할 일이 많은 악기라면... 우리나라 음악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것을 지켜야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지금의 국악이 존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음악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 다른걸 할 수 있을 수 있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 이것을 가지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음정이나 박자를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는것보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등 더 좋은 일에 쓰임을 받고 싶습니다.

그동안 어려웠던 점이 많으셨을텐데요...

서양악기들과 협연 할 때 음정, 템포, 리듬 맞추기게 참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애가 울고 있는데 왜 이걸 해야하나란 의문이 들 때?(웃음)

또한 제 스스로를 라이벌로 생각하면서 연습이나 연주에 몰두하다보면 너무 힘든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바이올린의 정경화 선생님을 모델로 삼고 해금의 대가를 꿈꾸던 시절 우연히 예술의 전당에서 정경화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날 해금을 수리점에 맡기고 빈 케이스만 들고 있다는 걸 깜박 잊은 채 선생님과 만났던거죠. 선생님께서 해금 구경 한번 해 보자고 하셔서 무심코 가방을 열었는데 아뿔싸 빈 가방이었던 거에요. 얼마나 당황스럽고 창피했던지. 아마 정경화 선생님께서도 이 사연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때 더 훌륭한 인물이 되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꼭 한번 협연도 해보고 싶구요. 물론 기회가 주어진다면...(웃음)
▲연습실 한켠에 마련된 소파에 앉은 모습이 여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일년에 연주회는 몇회 정도 하시나요?

정기 연주회는 일년에 1번 하고 있습니다. 개인 연주회만 50여회 정도될 듯 싶구요. 단독 콘서트나 협연 등은 80여회 이상 하고 있는 것 같네요. 물론 그 외 다른 연주회는 셀 수가 없을 정도구요.

개인적으로 솔리스트로는 아프리카, 중동, 남미 쪽 빼곤 거의 전세계를 다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쪽에서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애요. 특히 프랑스 리옹오페라하우스 연주는 물론 체코에서 사람들이 비명소리를 지르며 기립박수를 치는데 태어나서 그런 반응은 너무 놀라웠습니다. 8월엔 디즈니홀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부 기립박수를 치시더군요.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격스럽게 인사했던 기억이 있네요.

강선생님 이후로 해금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국내에서는 해금소리가 좀 흔해졌죠?(웃음)
국악이 서양악에 비해 소외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 가장 큰 문제는 교육에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심미안이나 감정을 악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도록 어릴때부터 듣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전문가일지라도 고급 오디오의 음향 차이를 분별해 내기 힘들듯이 음악도 어느 단계부터는 한 단계 올라가는게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국악을 이해하는 수준은 아직은 멀기만 한 것 같습니다. 대중들이 국악이 정말 귀하고 소중한 소리란 인식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들고 싶습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언제나 좋은 음악을 남기고 싶은 꿈을 가진 강은일

어떤 음악가로 기억되길 바라실까요?

90년도에 졸업하면서 KBS 국악관현악단에 있었어요. 당시 재즈곡과 협연을 했는데 주위 분들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혼이 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언제까지 조선시대 음악만을해야하지?’ 라는 끊임없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국악계의 이단아니 뭐니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통을 버린다기 보다는 음악의 폭을 넓혀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들겠다란 꿈. 이제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나를 따르는 후배들을 볼 때 세상이 변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간절히 열망하고 노력하면 정말 변하더군요. 주변에 누군가 안되서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니까요.

지금까지 해 온 노력 이상을 바탕으로 세상이 바뀌어도 언제나 들어도 좋은 음악. 그런 음악을 남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몇 년째 계획 중인데 해금 교칙본을 하나 내고 싶어요. 그동안 경험한 노하우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교칙본을 반드시 만들고 싶습니다.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앙상블을 만들어 해금 연주자 백명, 천명이 모여서 한번 연주도 해 보고싶구요. 물론 장기적인 계획입니다. 단기 계획이라면 오는 12월 1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해금플러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이구요.(웃음)

인터뷰 ☞ 이은영 편집국장 young@sctoday.co.kr
정리 및 사진 ☞ 양문석 기자 msy@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