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 논란❸] 겨레의 민족문화유산 태평무, ‘불공정’의 산물로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 논란❸] 겨레의 민족문화유산 태평무, ‘불공정’의 산물로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19.11.2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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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2015~2019년까지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 논란 한복판에 있었다. 무용계는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심사에 대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결성하여 비판에 나섰다. 문화재청 60年史 초유의 사건으로 회자되는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 논란 중심에서 겪은 다양한 행태를 후대의 무형문화재학 및 한국무용학 사가(史家)들을 위해 기록으로 남긴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을 새삼 반추케 한다. 그중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韓成俊 1874~1941) 선생은 이른바 사라져가는 조선의 전통춤을 보존 계승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전국유랑을 통해 터득한 민속장단과 춤을 토대로 약 100여종에 달하는 전통춤을 집대성하고 무대양식화한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춤으로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낸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이자 이른바 ‘문화독립투사’였다. 

영친왕과 문화독립투사 한성준

‘문화독립투사’ 한성준의 업적을 반추하면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여사를 떠올렸다. 이방자 여사 사진 몇 컷이 연낙재에 소장돼 있다는 영향도 있으리라. 이방자 여사는 신무용가(新舞踊家)로 한 시대를 풍미한 조택원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의 전통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 천황의 친족으로 원래 이름은 나시모토미야 마사코로 불렸다. 우리에겐 이방자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그녀는 16세 때 한·일 양국의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됐다. 일본 군벌에 의해 아이를 낳지 못할 것 같은 상(像)을 지녀 조선의 황태자비로 발탁됐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몇 해전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지식공작소, 2013)를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의 아내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온 그의 일생은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살면서도 한국을 ‘나의 조국’이라 서슴없이 고백하곤 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영친왕은 중일 전쟁 이후 한국의 문화재에 부쩍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을 왕래하는 지인들에게 판소리음반을 구해오라고 당부할 정도로 조선의 전통문화에 집착했으며 실제 이동백, 김창룡의 목소리가 담긴 고음반을 소장했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창들의 판소리를 들으면서 지배국의 볼모로 잡혀있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견딘 것이다. 

일본에 갇혀 지내던 영친왕은 1940년 7월 전통예인 한성준이 도쿄에서 공연무대를 갖는다는 소식을 접한다. 당대 최고의 가부키 무용가 이치가와 엔토스케는 아사이신문 기고문에서 한성준 가무는 조선의 고전을 계승한 고귀한 예술이라고 극찬했다. 민속춤에 투영된 유머와 향토적 야취(野趣)를 인상적으로 봤다.

영친왕은 아사이신문에 실린 한성준 공연평을 읽고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이방자 여사와 단 둘이서 한성준 공연이 개최된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으로 달려갔다. 이방자 여사는 훗날 이날의 감동을 자신의 회고록에 담담히 술회해 놓았다.

이방자 여사는 한성준이 선보인 조선의 춤과 음악에 취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영친왕에 대해,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 흐뭇하고 어린애 같이 신나는 표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영친왕은 한성준의 춤과 음악을 통해 망국의 한(恨)을 달랬던 것 아닐까 짐작된다.  

태평무의 창안과 두 개의 유파

태평무 창안자 한성준은 영친왕의 부왕인 고종과도 인연이 깊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전통무악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한성준은 한말 고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어전에 나아가 기예를 선보이는 영광을 누렸다. 뿐만 아니라 참봉(參奉)이라는 벼슬까지 얻었다. 

참봉은 조선시대 관직으로 치면 종구품(從九品)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고종이 하사한 참봉은 실제 권한이나 실권은 없었고 단지 명예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평생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았던 한성준에겐 심리적으로나마 신분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짐작하건대, 한성준의 태평무 창안배경에는 고종과의 특별한 인연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춤의 주제가 예사롭지 않다. 나라의 태평성대가 주제인 태평무는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며 만들어진 춤이다. 창안 당시엔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상정한 2인무 형식이었다. 한성준의 손녀딸 한영숙이 ‘왕의 역’을 맡고, 제자 강선영이 ‘왕비 역’을 맡았다.

알다시피, 태평무는 현재 두 가지 버전이 전한다. ‘왕의 춤’을 계승한 한영숙류 태평무와 ‘왕비 춤’을 전승한 강선영류 태평무가 바로 그것이다. 강선영류 태평무는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반면 한영숙류 태평무는 지금껏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한성준이 창안한 2인무 형식의 태평무에서 ‘왕의 역’을 맡았던 한영숙은 1980년대 중반 무렵 자신의 태평무를 무형문화재 지정신청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한 무용학자 정병호 선생이 기증한 연낙재 소장 ‘한영숙아카이브’엔 한영숙이 직접 실연을 한 사진으로 작성된 태평무 무보 등 지정조사보고서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한성준의 손녀딸이자 진정한 춤 후계자였던 한영숙은 강선영류 태평무와 달리 자신이 계승한 태평무를 독자적 유파의 춤으로 간주했다. 무용계 역시 강선영류 태평무와 한영숙류 태평무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춤으로 전승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은 한영숙류 태평무 전승자가 보유자로 인정됐다. 그는 태평무 전수자도, 이수자도, 전수조교도 아니다. 한영숙류 태평무가 국가무형문화재 미지정 종목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은 춤 유파의 보유자를 선정한 셈이 된다. 

한성준은 작고하기 전 태평무 의상으로 수의(壽衣)를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태평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태평무 창안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다는 증거다.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불공정 논란 속에 민족의 혼과 얼이 담지된 태평무의 시원과 유파, 나아가 문화독립투사 한성준의 민족혼을 새삼 곱씹어본다.   

법령위반 의혹제기, 태평무 보유자인정 불공정 논란

4년째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불공정 논란으로 무용계가 온통 시끄럽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무용계의 반발로 철회된 것으로 인식됐던 이 문제가 다시금 불거져 파장이 커지고 있다. 2015년 12월 승무·태평무·살풀이춤 등 3종목에서 총 24명이 보유자 인정심사에 응시했다. 심사위원 편파구성, 특정 학맥의 영향력 행사, 콩쿠르식 심사 등이 문제로 지적됐음에도 태평무 1종목에서 단 1명만을 보유자로 인정예고하여 불공정 논란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문화재청장이 바뀌었고 담당관료들도 자리이동이 있었다. 연임된 일부 위원을 제외하고 무형문화재위원들도 절반 이상의 숫자가 교체됐다. 무형문화재위원회는 2019년 3월 15일 느닷없이 11명의 보유자후보를 선정하여 파장을 예고했다. 그후 청와대 국민청원, 성명서 등 무용계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화재청은 지난 9월 6일 무형문화재위원회 회의를 통해 승무·태평무·살풀이춤 등 3종목에서 9명의 전승자를 보유자로 인정예고하여 비판을 자초했다.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다뤄지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무용계 내지 전통예술계를 넘어 전 국민적 관심사로 확산되었다. 특히 태평무 심의 시, 의결정족수 미달 등 법령위반 의혹이 지적되어 큰 파장을 몰고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1월 15일, 법령위반 의혹이 제기되는 태평무 포함 승무·살풀이춤 등 3종목에서 총 8명의 보유자가 한꺼번에 무더기로 인정됐다. 태평무의 경우, 4년 전 응시자 4명이 전원 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국감에서 지적됐다시피, 지난 9월 6일 실시된 무형문화재위원회 태평무 심의엔 11명의 무형문화재위원 중 5명의 위원만 의결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무용위원이 모두 제외된 채, 비전공 위원들에 의해 태평무 보유자가 결정되어 후폭풍이 거세다.  

주지하다시피, 한영숙류 태평무와 강선영류 태평무는 춤사위, 장단, 의상 나아가 미학적 질감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다른 유파의 춤으로 간주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된 춤은 강선영류 태평무다. 한영숙류 태평무는 엄연히 국가무형문화재 미지정 종목이다. 따라서 한영숙류 태평무 보유자로 인정된 전승자는 기존 태평무 무형문화재 전수체계(보유자 <- 전수조교 <- 이수자< - 전수자)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이다.

무용전공자가 아닌 비전공 무형문화재위원들은 과연 어떤 기준과 잣대로 한영숙류 태평무를 기 지정된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강선영류 태평무와 동일한 유파의 춤으로 판단한 것일까? 기존 무용학계 및 전통춤 현장에서 통용돼온 태평무 유파 구분의 기본 틀을 무용전공이 아닌, 타분야 무형문화재위원들이 맘대로 재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의 용기와 결단이 놀라울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 스스로 태평무 보유자 심의 당시 절차의 부당성 및 전문성 부족을 실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정조사보고서라든지 이런 형식을 갖추지 않고”, “무용 전문가들이 없어서 ··· 우리가 전형을 원칙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굵은 골격까지 다 부수면서 전형하는 것은 창작이죠”, “저희가 비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가 어려워서요”(「서울문화투데이」, 2019.10.23.)

위의 언론이 보도하고 있듯이 문화재청이 지난 9월 국정감사 때 국회에 제출한 무형문화재위원회 회의 속기록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다. 국가무형문화재 미지정 종목으로서 지정조사보고서 없이 보유자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문화재위원들 스스로도 그토록 반대 기류가 역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영숙류 태평무 전승자는 끝내 보유자로 결정되어 여러 의혹을 낳고 있다. 

뿐만 아니다. 4년 전 ‘서양춤의 한국화’ 산물로 비판된 강선영류 태평무 전수조교는 당시 보유자로 인정예고 되었으나 무용계 반발이 거세지자 철회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4년이 지난 현 시점에 이르러 결국 보유자로 인정됐다. 무형문화재위원들 스스로 “전형을 원형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굵은 골격까지 다 부수면서 전형하는 것은 창작이죠”라고 주장했으면서도 말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영혼이 없는’ 부류는 비단 관료만이 아닌 것 같다. 

겨레의 민족문화유산 태평무, ‘불공정’의 산물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판단 준거는 전통춤 고유의 원형성과 역사성 및 유파의 특징 그리고 학술적, 예술적 가치 유무로 모아진다. 따라서 해당분야 무형문화재위원의 전공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안목, 그리고 전문성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여부를 판단하는 전공영역에 대한 전문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무용분야 무형문화재위원이 모두 제외된 채, 비전공 위원들 손에 민족의 혼과 얼의 상징인 태평무 보유자가 선정되어 공분(公憤)을 사고 있다. 비전공자들에 의해 한국무용사의 형질 변경 내지 무용 생태계가 파괴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용계 안팎에서 개탄스럽다는 얘기가 쏟아진다. 

10월 국감에서 의결정족수 미달 등 법령위반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문화재청은 지난 11월 15일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8명의 보유자를 한꺼번에 인정하여 논란을 키우고 있다. 조서보고서도 없이 미지정 태평무 종목의 보유자인정을 비롯 “재심의는 1회에 한 한다”라는 조항도 지켜지지 않아 법령위반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태평무 보유자가 최종 선정되어 의구심을 낳고 있다. 승무 살풀이춤 역시 원칙과 기준이 없이 보유자가 지정됐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문화재청은 비대위를 비롯 무용계에서 불공정 보유자인정 절차를 철회하고 선(先) 제도개선을 수차례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엔가 쫓기듯이 보유자 인정을 처리했다. 한마디로 막가파식으로 밀어붙였다는 인상이 짙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공정 가치’ 훼손한 정재숙 문화재청장 퇴진하고 무형문화재위원회 해체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4년째 불거진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불공정 논란이 지속되자 항간에는 정·관계 및 문화계의 견고한 카르텔의 소산이라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도 불거졌다. 보편적 상식을 넘어서는 치명적 결과가 초래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간의 사정 속 숨겨진 ‘불편한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더 증폭되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불편한 진실’을 탑재한 채 미래 시간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한마디로 통탄스럽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불편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무용계의 연대와 결속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이야말로 ‘춤역사 바로세우기’ 또는 문화재계의 오랜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공감대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지금·여기’ 춤역사 바로세우기는 시대적 사명이라 여긴다. 

태평무가 어떤 춤인가? 일제강점기 명고수·명무 한성준이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고 만들었던 민족문화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미지정 태평무 유파의 보유자 인정, “재심의는 1회에 한 한다”는 법령위반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에도 문화재청은 끝내 태평무 보유자를 지정했다. 4년간 불공정성에 대한 비판, 여러 특혜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말이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척박한 토양에서 일제의 폭압을 견디며 지켜온 겨레의 민족문화유산이 정부가 표방한 ‘공정 가치’를 훼손한, 이른바 ‘불공정’의 기념비적 산물로 남게 되었다.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역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