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유니버설발레단∙‘발레 춘향’과 국립발레단∙‘호이랑’
[이근수의 무용평론] 유니버설발레단∙‘발레 춘향’과 국립발레단∙‘호이랑’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2.1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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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발레 춘향(오페라극장, 10,4~6)>
영상으로 나란히 보이는 춘향과 몽룡의 방이 대조적이다. 왼쪽 춘향의 방엔 수틀에 수놓는 여인과 다듬이질하는 여인, 곰방대를 입에 문 여인이 앉아 있고 화병에 담긴 꽃이 여인의 방을 장식한다. 오른 쪽 몽룡의 방, 경상 위에 책이 쌓여 있고 벽에 걸린 난과 대나무그림이 글 읽는 선비의 방임을 알려준다. 영상을 제외하면 무대장치는 단출하다. 춘향과 몽룡, 방자와 향단, 춘향 모 월매와 몽룡의 엄격한 부친, 변 사또 등 등장인물에 변함이 없고 연인들의 만남과 이별, 수청을 거절하고 고초 받는 춘향, 감옥을 찾은 몽룡과 춘향의 재회, 어사출도와 해피엔딩 등 춘향전의 극적인 서사도 변동은 없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춘향’과 ‘심청’은 둘 다 한국전통설화가 바탕이 된 대작 발레다. 사랑과 효도가 주제인 한국고전을 한국무용 아닌 발레형식으로 만들어 세계무대에 내놓은 소중한 작품 들이다. 발레단 창립 35주년을 맞는 2019년 가을, 두 작품이 일주일 간격으로 오페라극장(예술의 전당)무대에 올랐다. 나는 홍향기, 이동탁이 캐스팅된 10월 4일의 ‘발레 춘향’과 김유진이 주역을 맡은 11일 ‘심청’을 보았다.   

2007년 처음 제작되고 2014년 대대적인 리메이크를 거친 2019년 판 ‘춘향’은 극히 현대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직선적인 스토리전개에서 스피드와 경쾌함이 돋보이고 소도구를 과감히 생략하고 영상미를 극대화한 무대미술이 세련미를 더해준다. 분홍과 노란색을 주조로 활동성을 강조한 한복 의상에서는 봄 냄새가 풀풀 풍기고 관청기생들이 입고 있는 오방색 화려한 의상과 대비되면서 민속과 관아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판소리 춘향가나 국악기 대신 차이콥스키 음악과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음악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차이콥스키의 만프레드 교향곡(op.58) 1~4장을 주조(主調)로 하고 교향곡 1번(op.13)과 3번(op.29), 관현악 조곡 1~3번을 장면 장면에 투입했다. 볼쇼이극장 지휘자였던 미하일 그라노브스키가  코리아쿱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한국의 고전설화를 러시아 음악과 결합시킨 것은 한국의 춘향을 글로벌 무대에 보여주려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2막 3장으로 구성된 장면 중에서 가장 빛났던 것은 첫날밤의 에로티시즘과 옥중 재회장면에 나타났던 격자형 창살의 미장센이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과 이별 장면을 암시하는 먹구름 낀 하늘 등 사건의 전개를 영상으로 처리한 것도 효과적이다. 길게 끌고 간 2막의 과거시험과 기생점고 장면은 지루한 감이 있었고 공연의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할 어사와 춘향의 재회장면이 평범하게 처리된 것이 아쉬웠다. 40명의 무용수가 등장하여 100분에 걸쳐 끌어간 대작임에도 춤 부분이 연기부분보다 약했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클래식발레나 로맨틱발레의 명작들과 견주려면 춤이 연기를 압도해야하고 작품을 대표하는 춤이 여운으로 남아야할 것이다. 춘향과 몽룡의 첫날밤을 그랑 빠드되로 확장하고 기생점고나 사또 생일잔치에 화려한 한국 전통춤으로 구성한 디베르티스망을 도입한다면 외국 관객들에겐 풍성한 볼거리가 될 것이다. 부채춤, 장고춤, 화관무, 태평무, 검기무 등이 훌륭한 레퍼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클라이맥스의 약점을 보강하는 안무다. 기절에서 깨어난 춘향이 죽음을 떨쳐낸 기쁨과 어사가 되어 돌아온 낭군을 다시 찾은 여인의 환희심을 발레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푸에테 32회전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랑의 테마인 ‘발레 춘향’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백조의 호수에 비견할 수 있는 명작발레로서 다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걸어본다. 황혜민 은퇴 후 유니버설발레의 프리마 발레리나 자리는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춘향 공연 꼭 일주일 후에 올려진 ‘심청’에서 처음 주역으로 데뷔한 김유진의 성장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국립발레단 ‘호이랑’(오페라극장, 11,6~10)>
제목부터 특이하다. ‘호이 랑’의 랑은 히로인의 이름이고 ‘호이’는 랑을 수식하는 감탄사 혹은 추임새다. ‘호이’를 영어의 ‘Hoy' 혹은 독일어의 ’Hue'로 이해한다면 ‘워~’ 혹은 ‘이랴’와 같이 가축을 몰 때 쓰는 워낭소리이고 현대식으로 해석한다면 ‘파이팅!’이나 요즘 유행어인 ‘가즈야!’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국립발레단이 여수에서의 5월 초연을 거쳐 제181회 정기공연 레퍼토리작품으로 오페라극장(예술의 전당)무대에 올린 창작 발레가 ‘호이랑’이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이며 2017년 전막 발레 ‘허난설헌-수월경화’를 안무하면서 무용수 겸 안무가로 인정받고 있는 강효형이 안무를 맡았다. 강효형은 2009년 동아무용콩쿨 금상수상자로 한예종 무용원을 졸업하고 국립무용단에 입단한 재원이다. 나는 박슬기와 박예은이 각각 ‘랑’역을 맡은 11월 6일과 8일 공연을 보았다.

무대의 첫 색감은 녹색이다.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랑과 아버지, 사냥꾼 오빠의 세 식구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 전운이 감돌며 배경이 검은 색으로 바뀌고 오빠는 징집되어 전장에 나가 전사한다. 아버지에게도 징집명령이 떨어진다. 랑은 남장을 하고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징집에 응한다. 고된 훈련과 군대 내부의 시련을 이겨낸 랑은 어엿한 군인으로 성장한다. 외국과의 전쟁에 이어 내부의 반란이 계속되며 남성군무를 중심으로 한 전투 신이 무대를 압도한다. 러시안 발레 ‘스파르타쿠스’에 비견할만한 스펙터클한 무대다. 춤이 많은 것은 이 작품의 장점이다. 전투 신외에도 마을 사람들의 축제, 병사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남녀의 군무, 결혼식에서의 화려한 디베르티스망은 작품의 볼거리다. 2009년 베를린국제무용콩쿠르 금상을 수상하고 2012년 한예종 졸업 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박예은은 남장한 여군사로서 능숙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후 무대를 누비는 그녀의 솔로와 김기완과의 인상적인 파드되는 김지영을 대신할 미래의 프리마로서의 성장을 기대하게 했다.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진 대본은 너무 많은 스토리를 담았다. 중간에 삽입된 사슴이야기나 두 개로 나누어진 전쟁 신을  축소함으로써 무용수들은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무대를 피하면서 춤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김장연)과 조명(고희선), 무대장치(정승호)가 무대의 시각적 효과를 높여준데 비해 루이자 스피나텔리(이탈리아)가 디자인한 의상과 소도구는 전반적으로 아쉬웠다. 

‘이괄의 난’이 역사적 배경이라면 조선 중기 17세기 초엽이다. 중세 십자군 병사들의 의상을 연상케 하는 군복이나 로마 검투사들이 썼을법한 짧은 검들은 낯설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랑’의 잠옷과 같은 솔로 의상과 결혼식에서 입은 ‘정’과 ‘랑’의 혼례의상도 괴이했다.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은 음악은 안무자가 선택한 곡 들을 편집한 것들로 무대를 가득 채운 풍성한 춤에 비해 임팩트가 약했다.  ’호이랑‘을 위해 작곡된 음악을 갖는 것이 무리가 된다면 선곡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각 장면에 선택한 음악을 밝혀주는 것이 관객들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아람 카챠투리안(Aram Khachaturian)’의 음악으로 명성을 얻은 것처럼 국립발레단이 ’왕자 호동‘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대표적인 창작 드라마발레라면 이만큼의 욕심은 부려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