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뉴욕 화이트 웨이브 김영순 무용단’ 김영순 예술감독, 1988년 시작된 뉴욕發 무용한류의 중심
[Special Interview] ‘뉴욕 화이트 웨이브 김영순 무용단’ 김영순 예술감독, 1988년 시작된 뉴욕發 무용한류의 중심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조두림 기자
  • 승인 2019.12.1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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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웨이브(White Wave) 김영순의 '춤, 꿈, 그리고 사랑'

한류라는 단어가 대중화되기도 전인 1988년. 현대무용의 모국이라 불리는 미국 뉴욕에서 한국인으로서 세상으로 용솟음치는 하얀 파도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1988년 창단한 ‘뉴욕 화이트 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김영순 예술감독이다. 

“로고의 원은 우주를 상징하고 하얀 파도는 한국인의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하얀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최근 부상한 한류의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김영순 예술감독
                 ▲김영순 예술감독

김영순은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1977년 뉴욕 마사 그레함 컨템포러리 댄스 스쿨에 유학간 뒤 20세기 현대무용의 거장 마사 그레함에게 직접 사사 했다. 이후 프로댄서로서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아갔으며 유학을 떠난 지 11년 만에 직접 무용단을 창단했고, 2014년에는 전세계 공연예술계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 받는 ‘BAM(Brooklyn Academy of Music)’무대에서 한국인 안무가로서는 최초로 “Eternal NOW(이터널 나우)”를 세계초연 했다. 지난 8월에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도 공연하며 호평을 받았다.

2008년에는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뉴욕 스테이트 세네트에서 주관하는 ‘미국사회에서 성공한 한인 예술가’로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뉴욕에서 활약이 대단하다. 또한 현재 뉴욕에서 열리는 3개 무용페스티벌을 프로듀싱하고 있고, 2001년부터 시작한 덤보페스티벌은 뉴욕을 대표하는 다섯 무용축제에 손꼽히고 있다.

“덤보 1회를 시작하기 약 한달 전 9‧11 사태가 발생했다. 더군다나 덤보 극장이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강 너머로 보이는 곳이었다. 개최를 망설였지만 예술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 더욱더 개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술가로서 영감과 열정을 강조하며 향후 계획은 한 가지,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것이라는 김영순 예술감독을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뉴욕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Eternal NOW(이터널 나우)’라는 작품으로 한국인 안무가로서는 최초로 BAM(Brooklyn Academy of Music) 무대에서 2014년 세계초연 했다. BAM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Eternal NOW’는 2010년부터 작업해 온 멀티미디어 댄스/씨어터 테마인 “Here NOW”시리즈의 4번째 작품이자 완결편이다. 이터널 나우의 특징은 콜라보레이션이다. 우선 매력 있고 테크닉이 뛰어난 우리 무용단 멤버 10명과 함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들었고, 이탈리안 아방가르드 뮤지션의 선두주자 마르코 까펠리와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케이티 프레어&하오 바이, 예일대학교 교수 제임스 레버러트가 드라마터그, 그리고 무대의상 및 세트는 a Bessie Award 우승자 사라 큐바즈가 함께 협업했다. 

댄서들은 각 장에서 구성된 이미지와 동시에 라이브로 편집되는 영상과 어우러지며, 와이드 스크린 모니터에 비춰지는 라이브 장면과 교감하며 춤을 춘다.

BAM에서 평이 좋았다. BAM은 150년 역사 있는데 저희는 BAM Fisher Theater에서 공연했는데, 그 극장이 생긴 이래로 화이트웨이브처럼 이 극장을 완벽하게 사용한 무용단체가 없었다고 하더라. 지난 8월에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도 공연했다. 아문당 공연장이 좋아서 공연하기 좋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상징하는 ‘신문’을 활용한 ‘Eternal NOW’ 오프닝.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문은 공연장이 위치한 지역의 당일 신문을 사용한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상징하는 ‘신문’을 활용한 ‘Eternal NOW’ 오프닝.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문은 공연장이 위치한 지역의 당일 신문을 사용한다

‘Here NOW’ 제작할 당시 내 안에서 생각의 전환(thinking out of the box)과 돌파구(breakthrough)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무용은 춤사위가 어휘(vocabulary)니까 춤사위로 관객들한테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다. 나는 안무를 시작할 때 거의 24시간 잘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머릿속으로 춤사위를 계속 창조해내는 데 집중한다. 안무설정이 되고, 그 테마가 설정이 되고, 섹션이 설정이 되면 댄서들한테 충분히 설명하고 즉흥적으로 플레이하게끔 한다. 댄서들이 자기의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내가 코칭을 할 때는 정말 피토하면서 열정적으로 한다.(웃음) 그런데 어떨 때는 아무리 기회를 주고 설명을 하고 디렉팅을 해도 안 되기 때문에, 조각을 할 때 계속 조각을 해가면서 뭉뚱한 물체가 모형이 나오는 것처럼 댄서들하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8개월이 걸렸다.

뉴욕의 마사그레함 컨템포러리 댄스 스쿨에서 유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1977년에 유학을 갔다. 유학스토리만 해도 책 한권은 나올 거다.(웃음) 나는 공무원 집안의 9남매 중 셋째 딸이다. 광주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다닐 시절 3학년 쯤 되니까 마음이 딱 한 곳으로 꽂혔다. ‘나는 졸업하면 유학 간다’. 현대무용의 모국(motherland)은 미국이니까 뉴욕으로 유학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대 졸업식 바로 다음날부터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 교사로 근무하면서 유학 준비를 했다. 이후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에서 한차례 고배를 마신 뒤 국립극장 현재 달오름극장에서 1976년 12월에 개인발표회를 열어 무용에 대한 내 열정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이후 비자를 받고 유학을 떠났다.  

20세기 현대무용계의 전설 마사그레함에게 직접 사사했나

물론이다. 당시 마사의 뮤즈 솔로이스트가 되고 싶은 게 나의 꿈이었다. 이후 제니퍼 뮬러 무용단에 입단하면서 나의 진정한 프로댄서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퍼펙트 테크니션'으로 불렸던 현역 댄서 시절 김영순 예술감독
                                                     ▲‘퍼펙트 테크니션’으로 불렸던 현역 댄서 시절의 김영순 예술감독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얻는다. 상상치 않았던 곳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스튜디오에 살 때 배스로브에 신문을 들고 모닝커피를 들고 아침시간을 보내는데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이 있다. 문득 오늘 여기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담겨있는 게 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here NOW 공연 오프닝을 그 지역 당일 신문을 사용해 안무에 활용한다. 

개인적으로 특히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와 관련한 작품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최근작 ‘iyouuswe’도 처음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게 나(i)와 너(you)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 몇 달을 구상 좀 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Why not including us and we?” 왜 나하고 너만 포함하면서 우리하고 우리들은 포함하지 않을까 해서 최종적으로 'iyouuswe' 작품을 만들었다. 

내 작품이 평론가들에게 "emotionally rich, visually stunning", 즉 보기에도 기가 막히고 감성적인 면에서도 특출나다는 평을 듣는다. 

2008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뉴욕 스테이트 세네트에서 주관하는 ‘미국사회에서 성공한 한인 예술가’로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뉴욕에서 활약이 대단하다. 뉴욕에서 43년 예술인생 소회를 밝혀본다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다. 일례로 2006년 뉴욕시 문화국(New York City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년간 지원사업 무용부문 심사위원 5명 중 1명으로 선정돼 지원금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제 나이도, 경력도 리더의 위치에 와있으니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인간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 삶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게 ‘나눔(share)’이다. 내가 여지껏 무용가로서 이렇게 성장하고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정말 젊은 댄서였을 때 뉴욕에서 나를 이끌어준 고마운 현대무용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깨우쳐주고 찾아주고 빛나게 해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나도 존재하게 됐다. 

지금 화이트 웨이브 무용단이 주최하는 페스티벌이 1년에 3개가 있다. 내가 페스티벌을 하는 이유도 나눔이 목적이다. 1년에 거의 200단체의 1000여 명이 넘는 퍼포밍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는 페스티벌을 계속 프로듀싱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시작한 덤보 댄스 페스티벌(DUMBO Dance Festival)은 뉴욕에서 개최되는 축제 중 뉴욕을 대표하는 다섯 무용축제에 포함돼 있다. 현대무용 분야에서 젊은 안무가들의 등용문이 되다시피 하는 축제를 프로듀싱해서 현대무용의 대모라고 불러주시기도 한다.(웃음)

▲2019 덤보 댄스 페스티벌
▲2019 덤보 댄스 페스티벌 갈라 오프닝 나이트

이제는 뉴욕을 대표하는 다섯 무용축제에 포함되지만, 2001년 처음 덤보페스티벌을 시작하실 때는 고민이 많았다는데

2001년 첫 덤보페스티벌을 열기 약 한 달 전 9·11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덤보극장이 9·11이 일어났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강 너머로 보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덤보페스티벌을 열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예술은 사람들에게 영감(inspiration)을 주는 것이지 않나.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더욱더 덤보를 해야 되겠다고 해서 계속 밀고나간 게 내년이면 20주년이다. 뉴욕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문화의 도시로 손꼽히지만, 거기서 젊은 안무가들이 정말 마음 놓고 자기 작품을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이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더 축제를 개최하려고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제 다른 극장에서 덤보를 개최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5년에 덤보 극장 월세가 계속 올라서 기존 금액의 2배로 뛰었다. 그걸 어떻게 버티겠나. 뉴욕의 예술가들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 

▲2019 덤보 댄스 페스티벌

1988년 화이트 웨이브 무용단을 창단했다. 화이트 웨이브라는 이름이 인상적이고, 로고 역시 사람인(人)을 형상화한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좋은 질문이다. 화이트 웨이브 김영순 무용단 로고의 원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리고 하얀 파도는 한국인의 백의민족을 상징해 하얀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근래에 한류(Korean wave)가 부상하고 있지 않나. 88년 당시 무용단을 창단할 때 내가 염두에 둔 의미도 그와 같았다. 로고는 1987년 켄터키에서 공연할 당시 디자인 팀이 제작해줬다. 당시 디자이너가 한국과 관계없는 외국인이었는데 의미를 설명해줬더니 너무 마음에 들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로고를 사용하고 있다.

벌써 뉴욕에서 예술활동을 해온 지도 43년이 됐다. 뉴욕에서 인터뷰를 하면 내가 올림픽에서 뛰는 선수의 마음으로 태극기를 가슴 한복판과 등에 달고 그야말로 40년을 뛴 사람이라고 말한다. 문화 대사로 활동한다는 마음으로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한국을 대표해 현대무용에서 나름의 한류를 일으키기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했다. 

무용단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 무용단은 항상 '멀티내셔널 컴퍼니(multinational company)'로 여러 나라 댄서들이 모여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개개인의 댄서들의 성격과 개성이 춤에 뭍어나오는 것이다. 만약에 19명의 댄서들이 유닛은 같은 동작을 해도 마네킹처럼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다른 뉘앙스와 고유성이 나올 수 있도록 코칭 한다. 독창성과 Authentic함, 소울이 느껴질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코칭할 때 둥그렇게 서서 손을 잡고 서로 한번 바라보라고 한다. 나하고 너하고 다들 너무 다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그 춤이 무대에서 빛을 낼 수 있도록 하라고 종용하고 코칭한다. 

무용단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준다면

화이트 웨이브는 뉴욕시 문화국(New York City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으로부터 문화예술단체 부분에 주어지는 3년 연속 지원단체로 선정된 바 있고 예술의 천국이라 불리는 브루클린을 빛나게 하는 단체로 수년간 선정됐다.

화이트 웨이브의 미션은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고 페스티벌을 제작하고, 리허설, 공연장 및 예술교육을 제공해 무용/예술계의 변화를 확장할 수 있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무용단은 시대를 초월한 주제와 철학을 반영하는 다차원(multidimensional)적인 작품을 통해 모든 예술관객에게 영감을 주고자 한다. 

1988년 창단 이후 현재까지 춤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헌신해왔다. 다양한 형식의 음악, 시, 영상과 협업을 통해 무용어법을 확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데 전진하고, 각 매체의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무용단의 비전을 확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감독으로서 춤의 새로운 표현을 창조하는 영감과 열정, 상상력의 내면영역에 도달해 무브먼트 언어를 확장하고 참신성(novelty)을 담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1988년 창단과 동시에 서울 올림픽 경축 국제 현대무용페스티벌에 초청됐으며 그 후, 아시아 순회공연을 비롯해 미국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Duet - ysk & pascal
▲Duet - ysk & pascal

2007년에는 특히 뉴욕 30년 인생을 기념하기 위해 신작 숯 SSOOT을 Dance Theater Workshop's Bessie Schoenberg Theater에서 초연했다. 열정적인 춤과 아름다운 에리얼(Aerial) 안무에 대한 찬사로 SSOOT 시리즈를 2008년과 2009년에 연작으로 만들게 됐다. 

2011, 2012년에는 연속으로 뉴욕 최대 공연예술축제인 SummerStage에 초청됐다. 2012년에는 16명의 댄서 및 콜라보레이션 예술가들과 함께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광주 빛 고을 오! 페스티벌 개막식 및 성남아트센터에서 초청공연을 올렸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2014년에는 전세계 공연예술계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BAM(Brooklyn Academy of Music)에서 초청공연이 성황리에 있었다.

최신작 “iyouuswe”는 2017년 라 마마 무브스 댄스페스티벌과 2018년 밴쿠버 인터내셔널 댄스 페스트벌에서 초청공연해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앞으로 계획은 

앞으로 계획은 딱 하나다. 남은 인생동안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은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 마스터피스를 남기는 거다.

예술의 가는 길이 끝이 없지 않나. 그런데 남은 인생동안 그리고 이제 나이가 이제 점점 드니까 가끔 ‘내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스터피스는 꼭 남기고 싶더라.
또 하나는 참 오랫동안 생각하고 조금씩 추진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게 하나 있는데 책을 내는 거다. 제목은 ‘춤, 꿈, 그리고 사랑’이다. 나의 춤과 꿈, 그리고 사랑이야기를 담고 싶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인터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스토리는 좀 책으로 내세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예전에 잡지 <춤>에 7개월 간 칼럼을 썼다. 무용하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김영순의 글은 화려하게 쓰는 게 아닌데 굉장히 감동을 준다며 세계공연기행 등 기고 요청을 받았다. 77년에 뉴욕으로 떠나 83년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 초청을 받고 한국에 왔을 때 김포공항에 부모님이 “영순아” 하면서 가슴 벅차게 우시던 그런 내용들도 썼다.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좋다고 잡지사에서는 계속 기고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책 분량이 하나 나오면 책을 내주시겠다고 했는데, 한 7개월 후부터 해외공연이 많이 생기니까 더 이상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그 후 더 풍성해진 나의 춤과 꿈, 사랑이야기를 한 번 펼쳐보고 싶다.